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1화 (11/131)

#11

‘누나. 나 너무 추워.’

꼭 붙어 있던 어린 동생이 자그마한 머리통을 어깨에 비비며 우는소리를 해댔다. 쯧, 세라가 대놓고 혀를 차자 오들오들 떨고 있던 여린 어깨가 흠칫 굳는다. 행여나 동정심을 받기 쉬울까 봐 데리고 나온 눈먼 동생은 조금도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약한 소리 하지 말고 우는 척이라도 좀 해 봐.’

퉁명스럽게 면박을 준 세라가 저리 떨어지라며 어깨를 퉁겨 동생을 떼어 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나왔을 텐데. 들으라는 듯이 투덜댄 그녀는 독기가 가득 서린 눈으로 근엄하게 서 있는 신상을 노려보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자비롭다던 신은 그의 코앞에서 두 어린아이가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도 어떠한 자비도 내려 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비로운 신을 믿는 사람들조차 추위 속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거리의 아이들을 마치 미관을 해치는 곰팡이쯤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발길을 돌릴 뿐이었다.

대체 이 광경의 어디에 공평과 자비가 있단 말인가.

제게는 박탈만을 선사한 신을 실컷 원망하면서도, 궁지에 몰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결국은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빵 한 조각만 내려 주세요.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그 정돈 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정 없게 진짜 빵 한 조각만 내려 주지 말고요. 두 조각은 주셔야 돼요. 얘도 먹여야 하니까.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그때, 그녀의 기도가 신에게 닿은 것처럼 누군가 세라의 앞에 멈춰 섰다.

‘이거 하나 먹어 볼래? 갓 구운 거라 맛있단다.’

굶주려 죽어 가는 자에게 온기를 머금은 빵의 위용이란 실로 어마어마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빵에 정신이 팔린 세라는 누가 뺏어 갈세라 여인이 내민 빵 두 조각을 얼른 빼앗아 하나는 동생의 입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제 입에 처박았다. 난생처음 먹어 보는 따끈한 빵은 눈물 나도록 맛있었고,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하나 더 먹을래?’

눈 깜짝할 사이에 빵 하나를 먹어 치운 세라를 향해, 여인이 새로운 빵을 건네며 물었다.

‘…그래도 돼요?’

설마 하나를 더 주겠다고 할지는 몰랐던 세라는 그제야 제게 은혜를 베풀어 준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돌아서면 잊어버릴 정도로 흐릿한 인상이지만, 틀림없이 순박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그럼. 물론이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여인이 선뜻 빵 두 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세라는 이번에도 하나는 동생의 입에 다른 하나는 제 입에 넣은 채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저런 많이 고팠던 모양이구나.’

가엾게도.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 여인이 짐승처럼 빵을 뜯어 먹는 세라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하마터면 눈물이 울컥 솟아오를 뻔했다. 방금 전까지 신도, 세상도, 어린아이 하나 돌아봐 주지 않는 사람들도 모조리 욕하고 있었는데, 빵 몇 조각에 눈 녹듯 녹아내린 어린 마음은 그래도 아직 이 세상은 살 만하다고 손바닥 뒤집듯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 자신이 받았던 선의를 기억해 두었다가, 언젠가 자신도 어른이 되면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기특한 마음이 들 정도로.

‘다 먹었니? 이제 배가 좀 불러?’

‘네.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로?’

‘……네?’

그게 얼마나 안일한 감동이었는지 알려 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사 같던 그 여자였다.

‘그럼, 내 작은 부탁 하나 들어줄래?’

달콤한 목소리, 인자한 미소,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손. 코끝을 스치는 고소한 빵 냄새.

세라가 제게 좋은 것만 주었던 어른을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저 부탁을 들어주면 아까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나. 세라는 여자가 주는 빵보다 그 손길이 더 그리웠다.

‘부탁이 뭔데요?’

그래서 덥석 들어준다고 했었다. 순진하게도.

“…….”

그때부터였던가요. 제 인생이 진창을 구르기 시작한 게.

세라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해 줄 말을 미리 읊조리며 회상에서 깨어났다. 한 번 죽음으로써 그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은 줄 알았건만, 300년이나 지난 지금, 그녀는 자신이 그때와 같은 기로에 서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갈림길 앞에 서 있기는 했다.

안전한 바깥과, 가시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에녹에게서 모든 설명을 들은 세라가 시커멓기만 한 가시의 입구를 가리켜 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그냥 저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거죠?”

“어우우!”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여기서 기민한 반응이라는 건, 세라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검 끝을 함께 움직이는 것을 뜻했다. 그 사람들 속에는 마커스도 포함이었다.

세라가 면역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무기를 빼 들던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난 뒤에도 쉽사리 검을 거두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손가락 하나로 모두의 감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세라는 이 모든 게 과연 현실인지 긴가민가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가 짜고 자신을 광대 취급하고 있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

오로지 에녹만이 이 모든 게 별일 아니라는 듯 평온했다.

어렵사리 대답을 들은 세라가 다시 한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저 안에 당신의 동료가.”

“어우!”

어깨 위로 손가락을 치켜듦과 동시에 또 주변이 난리였다.

세라는 반쯤 포기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이런 상황이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슬 짜증이 치미는 시선으로 에녹을 노려봤다.

길드원들이 저 정도로 난리를 피우면 대장이 된 입장에서 좀 진정을 시켜 주거나 정리를 해 줘야 하는데 정작 세라를 데려온 에녹은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었다.

“주인님의.”

그런 주제에 세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호칭을 부득불 바로잡고 앉아 있었다.

“네. 그러니까 주인님의-.”

죽은 눈으로 그 호칭을 받아들인 세라가 여태까지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했다.

“…주인…님의 동료가 조난당했는데.”

“그렇지.”

“초면인 저한테 그 사람을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렇지.”

“저한테 칼을 들이대는 저 사람들은 못 들어가지만.”

“그렇지.”

은근슬쩍 비꼬는 뉘앙스를 실어 말했다.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좀 찔리라고. 하지만 에녹에게는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고, 오히려 돌아오는 대답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

피로한 낯으로 입을 다문 세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시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마지막에 덧붙였다.

“저는 가시의 안개에 미혹되지 않는 면역자니까?”

이유인 즉, 세라가 그 지긋지긋하게 말로만 듣던 ‘면역자’이니까. 대체 무엇에 대한 면역인가 싶었더니. 저 가시 안에 도사리고 있는 미혹의 안개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정확해. 기억력은 좋네.”

묻는 족족 맞장구를 쳐 준 에녹이 기특하다는 낯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하지만 하나가 빠졌어.”

……가 아쉽게도 백 점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에녹이 말하는 그 하나를 일부러 빼먹었을 뿐인 세라가 짜증 섞인 어조로 에녹이 말했던 원물을 고스란히 읊었다.

“네! 네! 저는 안개에 미혹되지 않고 언제 뒈져도 아쉽지 않은 면역자라고요!”

나쁜 년 소리를 밥 먹듯이 듣고 산 세라가 듣기에도 인성이 의심되는 발언이었다. 보통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타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제 발언을 다시 들으면 조금 미안해하는 기색은 보이던데, 에녹은 비로소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지.”

화낼 기운도 없어진 세라가 음산한 위용을 자랑하는 가시를 올려다봤다.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솔직한 말로 흑마법을 쓸 수 없어진 그녀가 저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무기 같은 건 없나요? 저 안에 마물도 있다면서요.”

“무겁기만 할걸? 기억도 없다면서. 검, 휘둘러 본 적은 있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사그라들었다.

가타부타 말이 길었지만, 에녹은 지금 기억을 잃은 사람 하나 잡아온 다음 면역자니까 사지로 걸어 들어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켜보는 이들도 딱히 그것을 말릴 생각 없어 보이고 말이다.

악마가 있다면 이 새끼들이 아닐까.

살아 있는 악마를 마주한 기분에 허, 하고 헛웃음을 지은 세라가 마침내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면역자는 그거네요.”

전문 용어로 고기 방패. 고급 언어로는 화살 받이.

하지만 세라는 굳이 다음 말을 입에 담아 분위기를 험악하게 끌고 가지 않았다.

더럽네.

간단히 제 심정을 곱씹은 세라가 안 그러는 척 가시 주변을 살폈다. 혼자서 들어가다니 차라리 잘되었다. 남 이사 누가 조난당했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흑마법도 쓰지 못하게 된 세라가 저 안에서 마물이라도 만났다간 면역자고 나발이고 바로 지옥행이었다.

일단 들어가는 척하고 안쪽에서 또 다른 입구를 찾아 슬그머니 도망을 친다면….

“그럴 리 없겠지만 안에서 도망칠 생각이면 그만두는 게 좋아.”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에녹이 여유로운 어조로 경고했다.

“가시의 입구는 하나뿐이고, 아무리 면역자라도 오랜 시간 가시에 갇히면 중독돼서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

순조롭게 박살 난 도망 계획에 세라가 질린다는 눈으로 에녹을 노려보았다.

감 하나는 좋은 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그냥, 안이 보일까 해서 쳐다본 거였어요.”

호호, 어색한 웃음을 흘린 세라가 곁눈질로 흘끗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가.

“……어?”

진짜 뭐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의 눈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저런 게 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갈라진 세라의 시야 너머로 새카만 가시 안쪽이 훤히 내보였다.

안개로 가득 찬 미로의 한복판. 그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말이다.

멀리서 보아도 형체가 뚜렷한 그것은 여태 봐 온 것들 중 가장 덩치가 컸다.

저건 왜 혼자서 크기가 다른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뒤척이던 검은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두 눈이 뿅 하고 생겨났다.

뀨?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세라와 눈이 마주친 검은 덩어리는 분명 뀨, 하고 울었다.

그와 동시에 쩌적, 시야가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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