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에 세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타이밍에 그녀의 눈에 심어진 별의 조각이 반응을 보이는 이라면 가능성은 하나였다.
비틀린 운명을 가진 자.
지옥에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는 신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저 시커먼 미로 너머에 오억 년의 형량을 줄여 줄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형량만 줄일 수 있다면 그곳이 가시 속이든 불구덩이 속이든 기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뭐 해? 어서 가.”
저렇게 대놓고 뭐 맡겨 놓은 듯이 구는 태도가 영 아니꼬워서 문제지.
“얼른. 은혜를 갚아야지. 세라.”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들어가기 싫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였는지, 사르르 눈웃음을 친 에녹이 부러 생색을 내며 그녀를 재촉했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지가 들어가서 구해 오면 될 일인데,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아주 말만 많은 놈이다.
“예에….”
그래서일까.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는데 갑자기 가기가 싫어졌다.
그래도 세라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저따위 같잖은 도발에 넘어가기엔 눈앞의 기회가 너무나도 달콤했다.
“무사히 다녀오면 상으로 꼭 끌어안고 자 줄게.”
…그냥 가지 말까?
겨우 붙잡은 결심이 저 주둥아리 때문에 자꾸만 흔들린다. 만약 누군가의 의욕을 꺾는 대회가 있다면 에녹은 단연 일등을 꿰차고도 남을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저와의 동침이 뭐 대단한 포상쯤이나 된다고 여기는 저 태도가 몹시 재수가 없었다.
세라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저 말을 듣고도 무사히 돌아올 자신이.
“그것만은 정말 뒤질 만큼 싫지만….”
하지만 어디에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
본심을 숨긴 세라가 가련한 척 두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달싹였다.
“주인님의 동료분은 제가 꼭 구출해 볼게요.”
그 모습이 의외였는지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그들은 노예 주제에 거친 말투를 쓰지만 순순히 주인의 말을 듣는 세라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흑흑. 주인님. 다녀올게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쓸쓸한 걸음을 옮긴 세라가 터벅터벅 검은 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입구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빛이 사라지기 전까지도 그 가련한 척을 이어 가다가.
“하…!”
어둠 속에 홀로 남게 된 순간 곧장 낯빛을 바꿔 기도 안 찬다는 비소를 날렸다.
“재수 없어!”
시원하게 속마음을 내지른 세라가 개운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로를 가득 채운 안개가 그녀의 앞길을 방해하려 몰려들었다. 어디서 이런 하수를. 콧방귀를 뀐 세라가 가소롭다는 듯이 손을 내젓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 간 안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되어 있구나…?”
안개가 걷히자 가시 내부가 좀 더 명확히 보이면서, 흑마법의 기운이 충만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이름을 팔아 활동하는 곳이라기에 설마 했는데, 정말로 안타레스교는 제대로 된 흑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흑마법은 분명 내 죽음과 함께 사장되었을 텐데. 한때 세상에 존재하던 유일한 흑마법사였던 세라는 그 점이 잠시 의문스러웠으나 곧 생각을 그만두었다.
세상은 넓고 요지경이니 어떻게든 했겠지.
태평하게 과정을 생략한 그녀는 그냥 눈앞의 결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세라가 딱, 손가락을 튕기자 공중에서 불길한 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마력 회로만 멀쩡했다면 온 미로가 대낮처럼 훤해졌을 테지만, 지금은 성냥이라도 피운 것처럼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당장의 어두움을 해소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손 위에 불을 올린 세라는 길이 아닌 벽을 비추었다. 평범한 이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흑마법사인 세라의 눈에는 가시에 새겨진 술식이 또렷하게 보였다.
미로의 복잡도나 마물의 수준은 형편없을 정도로 조잡했으나, 가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효과는 제법이었다.
오, 응용을 잘했네.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을 읽어 나간 세라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지의 생명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었구나. 그래서 땅이 다 그 모양이었던 거야.”
일반적인 마법과는 달리, 흑마법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허락한 힘이 아닌, 다른 세계의 힘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세상을 꿰뚫은 가시는 그 대가를 자신과 맞닿은 대지의 생명력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내부의 흑마법을 채우는 것은 물론, 일정량의 힘을 어딘가로 전송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시가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안타레스교는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흑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골치 아프게도 생겨 먹었네.”
쯧쯧, 혀를 찬 세라가 마음만 심란하게 하는 술식에서 시선을 떼어 별의 조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
그 순간, 무심코 시선을 던진 세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꼭 봐선 안 되는 걸 본 사람처럼.
***
여기가 내 무덤인가 보다.
시그너스 길드의 막내이자, 어제부로 조난을 당한 청년. 세이옌 마르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그는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리가 안 움직여….”
희망이라곤 조금도 깃들지 않은 비관적인 시선이 흰 천으로 꼭 묶어 둔 무릎을 맴돌았다. 피가 옅게 배어 나오고 있는 무릎은 어딘가 크게 부러졌는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멀쩡하던 오른쪽 다리까지도 감각이 둔해진 것이 아무래도 발끝에서부터 가시의 독기에 침식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옆으로는 대충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부러진 검이, 그리고 그 옆으로는 소년에게 덤볐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마물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12마리. 와, 신기록이었는데….”
제가 해치운 마물의 수를 세어 보던 세이엔이 속상한 듯 미간을 바짝 모았다. 자체 신기록을 경신했지만, 그것이 제 마지막 기록이 될 줄 알았더라면 결코 이토록 무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저씨 말을 들을 걸 그랬지….”
뒤늦게 연륜 있는 연장자의 조언을 무시한 걸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뒤였다. 나도 이제 다 컸다고 큰소리친 결과가 지금이었다.
난 진짜 끝내주는 길드원이 될 예정이었는데….
모든 희망을 버린 세이옌이 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검사가 될 예정이었던 세이옌이 이토록 위험한 일을 자처한 이유는, 이것만이 가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골치 아픈 안개로 둘러싸인 미로의 끝. 그곳에 있는 핵을 부숴야만 대지를 침식하는 검은 가시 하나를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서넛이서 조를 짜서 움직이는데, 세이옌이 들어온 가시처럼 작은 곳은 혼자서도 가능했다. 세이옌은 그런 곳을 자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바쁜 형, 누나들이 시간 내어 같이 들어오는 게 싫었다. 자기 때문에 괜한 인력 낭비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혼자서 몰래 가시에 들어온 것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저도 어엿한 시그너스 길드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뭐, 결국 그 기특한 마음이 전해질 일은 요원하게 되었지만.
“안개만 아니었어도….”
벽에 완전히 머리를 기댄 세이옌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새카만 안개를 노려보았다.
세이옌이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리보다도 저 안개 때문이었다.
검은 가시의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것은 인간의 감각을 흐트러뜨리는 능력이 있어, 안 그래도 미로 같은 가시 속을 영원히 헤매게 만드는 지독한 장애물이었다.
그러므로, 가시를 안전하게 제거하기 위해서는 안개에 영향을 받지 않는 면역자를 앞세우거나 신성력이 깃든 정화의 돌을 몸에 지닌 채로 입장하는 게 정석이었다. 대부분의 길드는 면역자를 앞세우는 방식을 선호했지만, 시그너스 길드에는 면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정화의 돌에 의지해야 했다.
정화의 돌을 사용하면 누구든 안개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어 범용성은 높았으나, 돌에 깃든 신성력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만 가시 안에 머물 수 있었다. 만약 돌의 신성력이 다하기 전까지 바깥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나처럼 좋지 못한 꼴을 당하게 되지.”
씁쓸한 혼잣말을 웅얼거린 세이옌이 빛을 잃은 제 정화의 돌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마지막 마물을 해치운 순간, 제 검과 함께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난 그것은 더 이상 세이옌을 안개로부터 지켜 주지 못했다.
언제나 시간을 어겨 돌아오지 못하는 길드원 소식을 들을 때면, 그런 기본적인 것도 잊다니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본인이 될 줄이야. 심지어 마물을 없애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핵을 파괴하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다.
아, 쪽팔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세이옌은 이대로 죽을 거라면 그냥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다. 괜히 발견돼서 다른 사람들 마음까지 싱숭생숭하게 만들기 전에 말이다.
이쯤에서 앞으로 그가 겪을 불행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말했듯이 죽음뿐이다. 독기로 가득한 가시 내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면, 인간의 육체 또한 가시에 꿰뚫린 땅처럼 침식되기 때문이다. 듣기에도 퍽 고통스러운 최후가 예견되지만, 이는 가시 내부에서 맞이할 수 있는 죽음 중 가장 호상에 가까웠다.
운이 나쁘면 인간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마물에게 흔적도 없이 잡아먹혀 훌륭한 양분이 될 수 있었다.
크르르르….
그래. 바로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