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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3화 (13/131)

#13

아직 남아 있는 마물이 더 있었는지 저 멀리서 사나운 목울음 소리가 들렸다. 꼭 있지. 이렇게 한발 늦게 나타나서 곤란하게 하는 마물이….

“음, 이젠 찾고 싶어도 못 찾겠네.”

부러진 검과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번갈아 확인한 세이옌이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쿵. 쿵. 쿵. 쿵. 육중한 울림이 대지를 통해 전해졌다. 이렇게 가는구나. 최후를 예감한 세이옌이 스르륵 눈을 감았을 때였다.

깨깽!

“……?”

당장이라도 나타나 그를 잡아먹을 것 같던 마물이 웬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끝으로 뚝 울음을 그쳐 버렸다. 그 소리가 육중한 발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몹시 연약하고 하찮았기에 더더욱 거짓말 같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세이옌이 애써 감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공간에 문득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세이옌 마르티스.”

시야를 가득 메운 안개 너머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누구지? 설마 날 데리러 온 사람일까? 모든 희망을 버리고 있던 세이옌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기대 어린 시선이 목소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별안간 코앞에 있던 안개가 반으로 확 갈라졌다.

“……?!”

어느 틈에 여기까지…?

갑자기 튀어나온 여인의 형상에 세이옌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랐다가.

“일어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어, 어어…….”

얼간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낸 세이옌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난 여자는 가시가 보여 준 환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18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었다.

세이옌은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라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여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은 가시의 안개마저 여인의 곁에 있으니 신비로운 마법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구불거리는 군청색 머리칼은 꼭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처럼 반짝거렸고, 눈밭처럼 새하얀 피부는 우중충한 가시 속에서도 뽀얗게 빛이 나고 있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들어찬 눈, 코, 입은 말할 것도 없이 조화로워 절로 감탄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의 원피스도 마치 여자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세이옌은 살면서 눈앞의 여인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예쁘기만 한 얼굴이 아니라, 누군가를 코끝으로 내려다보는 게 자연스러운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대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있는 힘껏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나 할까. 작은 체구에서 내뿜는 기백에 완전히 압도당한 세이옌이 넋을 잃는 동안, 여신이 계시를 내리는 것처럼 신성한 목소리로 물었다.

“독기. 어디까지 퍼졌어?”

“…예?”

“하반신. 하반신은 괜찮나?”

여신의 시선이 상처를 입은 다리로 향했다.

어지간히도 걱정되는지 다급하게 물어보는 목소리에는 그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이 담뿍 담겨 있었다. 세상에, 다정하기도 하시지. 크게 감격한 세이옌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뼈가 좀 부러지고, 독기가 침식해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은 며칠 요양하면 나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리 다정하신 여신께서는 마음이 놓이질 않으셨는지 성큼 거리를 좁혀 오며 재차 물었다.

“어디까지 괜찮은데? 설 수 있겠어?”

“그럼요. 다리에 감각이 좀 희미하긴 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은 마음에, 세이옌은 부러진 검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껑충 일어서 보였다.

“아니. 그거 말고.”

하지만 여신님이 원한 건 그게 아니었던 걸까. 마뜩잖은 듯 고개를 저은 여인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춰 다시 물었다.

“서?”

“……뭐가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세이옌이 신중하게 되물었다. 뀨? 그의 어깨에 매달린 어린아이만 한 검은 덩어리도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신께서 물으시는 말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싶어서였다.

“서냐고.”

“……?”

“왜 그런 표정이야. 아무 느낌이… 없어? 이미 늦은 거야?”

철저하게 주어가 생략된 물음에 세이옌이 또르륵 눈알을 굴렸다.

이미 서 있는데, 왜 자꾸 서느냐고 물어보지? 대체 뭐가 서야 만족하실까…? 의문을 담은 시선이 겨우 바닥을 딛고 선 제 하반신으로 떨어졌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것 중에 이제 설 수 있는 거라곤….

“……?!”

거기까지 생각한 세이옌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 순간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퍼뜩 놀란 시선이 다시금 세라에게로 돌아갔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저렇게 예쁜 사람이. 저렇게 신비로운 사람이 자신을 찾아와 묻는다는 게 고작 그딴 저속한 물음일 리가….

“지, 지금. 설마 확인해 보라고 하신 게 제…?”

애써 현실을 부정한 세이옌이 차마 그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여신님이 꾸물대지 말라는 듯 크게 고함을 치셨다.

“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확인해 보라니까?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거로 보여?!”

전혀 장난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제정신으로 초면에 저딴 걸 묻는다는 게. 설마가 현실이 된 순간, 세이옌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라에 대한 콩깍지가 와장창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뭘,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안 하겠다고? 내가 직접 해 그럼?!”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니, 저돌적으로 팔을 걷어붙이는 게 이대로 뒀다간 진짜로 뭔가를 해 버릴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여신이 아니라 변태가 왔잖아?! 뒤늦게 현실을 인지한 세이옌이 제 앞섶을 꽁꽁 움켜쥐며 처절하게 소리쳤다.

“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 여기서 나가면 제일 먼저 확인해 볼게요! 그러니까 그만 좀 해요. 진짜!”

***

느닷없이 만난 변태로 인해 궁지에 몰린 세이옌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덕분에, 두 사람은 순조롭게 바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일단은 길잡이 역할인 세라가 앞장을 섰고, 다리가 불편한 세이옌이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저, 근데…. 누나는 누구예요? 저희 길드에 면역자는 없는데….”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는지. 한동안 조용하던 세이옌이 조심스럽게 세라의 정체를 물었다. 붙임성이 아주 좋은 놈이었다. 처음 보는 세라에게 누나. 누나. 하며 말을 붙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네 대장 노예.”

“……?!”

반면 세라의 사교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악이다.

귀찮아서 대충 대꾸해 주니 세이옌이 헉, 소리를 내며 놀란다. 그게 그렇게 의외로운 모양이지. 연신 관자놀이를 눌러대던 세라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냐며 닦달했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굳어 있던 세이옌이 퍽 진지한 어조로 되물었다.

“진짜요? 진짜 에녹 대장 노예예요? 그럴 리가. 누나 면역자잖아요.”

“어.”

“이상하다…? 우리 길드 사람들은 면역자라면 완전 싫어하는데?”

또 그 소리.

면역자. 면역자. 멀쩡한 이름 놔두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은 그 명칭에 세라가 지긋지긋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대체 그 면역자라는 게 뭐길래 다들 나만 보면 난리야?”

그에 세이옌이 필요 이상으로 깜짝 놀라 되물었다.

“헉, 누나. 면역자면서 그게 뭔지 몰라요?”

“몰라. 기억을 잃어버려서. 눈 뜨니까 노예 상인들에게 잡힌 뒤였어.”

딱히 불쌍한 척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세라의 반응에 세이옌이 조금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눈. 안타레스 색이잖아요.”

그리고 손가락으로 제 눈가를 툭툭 두들겼다.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던 진실을 알려 주었다.

“어떻게든 흑마법에, 그러니까 안타레스교에 몸을 담갔다는 증거요.”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이는 안타레스교의 끄나풀이라는 몹시 달갑지 않은 진실을.

아하-.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의외로운 사실에 세라가 반사적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보라색이 흑마법의 상징이 되었나.

그녀는 흑마법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를테면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눈깔을 가지고 태어났다. 애초에 흑마법사로 각성한다고 해도 거창한 변화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자의식 과잉일 수 있지만, 세라는 보라색이 흑마법의 상징이 된 데에 자신의 영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뿌듯해해야 할지 씁쓸해해야 할지 고민하던 세라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뿌듯해하도록 하자.

“……그래. 싫어할 만하네.”

그래도 세라는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감정이야 어떻든, 여기 사람들이 왜 그토록 그녀를 보고 기겁을 했는지 머리로는 이해했다.

온 세상을 벌집처럼 쑤셔 놓은 놈들과 한패였던 사람이 굴러 들어온 격이니, 그녀라도 도끼눈을 하고 노려볼 것 같았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 온건한 단어 선택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세이옌이 정색을 하며 사람들이 얼마나 세라를 싫어하는지 알려 주었다.

“증오하죠.”

“…….”

“그중에서도 대장은 특히, 더더더더더! 흑마법을 증오해요.”

특히, 에녹이 가장 널 증오하리라 콕 집어 강조한 세이옌은 바로 다음 순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근데 왜 누나 같은 사람을 데려왔지?”

그러면서 아직도 에녹이 왜 세라를 노예로 들였을까 하고 의문스러워했다. 그리고 이쯤 되자 세라도 슬슬 궁금해졌다.

“그럼 혀는 왜 집어넣은 거지?”

남이 알 정도로 면역자를 싫어하는 주제에, 그 증오스러운 존재의 입술 사이로 그토록 열심히 혀를 놀린 이유가.

“헉, 대장이랑 벌써 거기까지 갔어요?”

혼잣말을 엿들은 세이옌이 눈치 없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누나……. 어디 아팠어요?”

하지만 그 궤가 자연스러운 흐름과는 조금 달랐다. 에녹이 면역자와 입을 맞췄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며 펄쩍 뛸 줄 알았더니 곧장 그녀에게 어디 아픈 곳이 있느냐 되물은 것이다.

“뭔 소리야. 아픈 건 너-.”

지금 진짜로 좆될 뻔한 게 누군데.

쓸데없는 걱정이라 여긴 세라가 짜증스레 대꾸하려다가,

“……겠지.”

이내 뇌리를 스치는 장면에 스리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에녹과 입을 맞추고 나자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던 게 기억난 것이다.

에녹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이 녀석도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설마 얘도…….

“…….”

세이옌의 입술을 바라보던 세라가 고개를 털어 자꾸만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달갑잖은 그림을 지워 냈다.

“그래서, 안 선다고?”

그리고 엄한 상상을 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기꺼이 세이옌의 정신을 헤집었다. 이유가 조금 불순하기는 했지만, 세라에게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다.

사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아까부터 세라의 의식 일부는 그녀의 등 뒤로 향하고 있었다.

“아, 나가서 확인해 본다고 했잖아요. 악담해요. 지금?”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물음에 세이옌이 지긋지긋하다는 어조로 역정을 냈다. 안 그래도 괜히 위기감을 조성해서 불안불안한데 자꾸 저러니까 잘 서던 것도 안 설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근데 왜 아직도 울부짖고 있어?”

이런 맘도 몰라주고,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지른 세라가 세이옌이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트집 잡았다. 계속해서 모함만 당하는 중인 세이옌이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제가 뭘 울부짖어요. 누나, 괜찮아요? 아까부터 식은땀 흘리고 있는 것 같은데…….”

“악! 알았으니까. 그만 좀 울어. 지금 하고 있잖아!”

전혀 화를 낼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세라가 갑자기 두 귀를 틀어막은 채 소리를 빽 질렀다.

연신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그녀는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미치겠네. 진짜…!’

그리고 실제로, 세라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오늘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났을 세이옌의 박살 난 미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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