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늘, 이곳에 세라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세이옌은 죽지 않을 운명이었다. 늦게라도 구조되어 시그너스 길드원으로 인정받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터였다. 다만, 이때 침식당한 독에 의한 부작용 때문에 발기 부전에 이르게 되고, 그 때문에 곧 만나게 될 연인이 세이옌의 곁을 떠나 버리게 된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세이옌은 평생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수절하며 외로이 늙어 죽고, 그의 아들로 태어났어야 할 영웅이 태어나지 못해 세계는 먼 훗날 멸망에 이르게 되는….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세라는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서사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세상이 망하려니 별 시답잖은 이유로 망하고 앉아 있었다. 절망스러운 이야기가 끝난 자리엔 병상에 드러누운 세이옌이 나타나 목청이 터져라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이! 으아니, 의사 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오열하는 청년이 내지르는 비통한 울부짖음이 세라의 귓가에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그건 세이옌을 주워다 탈출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망한 미래 속 세이옌은 한시도 쉬지 않고 울고 또 울었다. 마치 저 좀 어떻게 해 달라는 듯이. 네가 어떻게 해 보라는 듯이.
“으, 으으…. 으으으….”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이제는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 된 세라가 괴로운 신음을 앓으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
그 모습이 보기 좋았을 리는 물론 없었다.
…뭐야. 진짜 어디가 아픈가 봐. 슬슬 걱정스러워진 세이옌이 세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은근슬쩍 그녀를 피해 옆으로 떨어졌다.
“어? 저기. 저기 출구 보인다. 얼른 가요. 누나.”
그녀가 괴로워하는 사이. 세이옌이 한발 먼저 저 멀리 스며드는 빛을 발견하곤 잰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내가. 내가…. 내가아….
그가 빛에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 외침이 종국에는 아련한 메아리가 되어 흩어졌다.
“어…? 이제 안 우네?”
그러다 세이옌이 거의 출구에 다다랐을 때, 주야장천 세라를 괴롭히던 울음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드디어 고자 타령에서 해방된 세라가 개운한 얼굴로 세이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뀨우우우…….
그러자 세라의 시야를 잠식하던 균열이 서서히 아물고, 세이옌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덩어리가 바람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뭐지? 제대로 해결이 된 건가?
그런 의문이 들 즈음, 별안간 멀쩡하던 왼쪽 팔뚝에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
반사적으로 통증이 이는 곳을 내려다보니. 팔뚝에 새겨진 숫자들이 휘리릭 움직이며 줄어들고 있었다. 어…? 예상치 못한 현상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세라가 그곳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참을 줄어들고 줄어들던 형량이 어느 순간 완전히 멈췄다.
그리하여, 503,932,781. 세라의 형량이 줄어들었다.
“…와, 한 방에 백만 년?”
별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백만 년이나 깠다. 세라는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세이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저 꼬맹이가 제법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파격적인 감형에 이런 식이면 생각보다 금방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기분이 째질 듯이 날아올랐다.
“누나! 거기서 뭐 해요! 안 나갈 거예요?”
먼저 앞서가던 세이옌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세라를 향해 소리쳐 물었다.
“아니! 가!”
완전히 생기를 되찾은 세라가 간드러진 소리를 내며 룰루랄라 걸음을 옮겼다. 거의 손바닥 뒤집듯 바뀐 분위기에 세이옌이 또 왜 저래? 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신난 듯 깡충깡충 뛰어 그의 곁으로 다가간 세라가 마지막 한 걸음을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판판한 등짝을 짝! 때리며 외쳤다.
“너, 생각보다 대물인가 보다?”
장난스럽게 코를 찡긋거리며 웃어 준 세라가 그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는 또 룰루랄라 앞장서 걸었다. 간만에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 세라는 자신이 무슨 단어를 어떻게 잘못 말했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 진짜 아까부터 왜 그래요. 자꾸…! 미, 미쳤나 봐…!”
그로 인해 결국, 부끄러움은 홀로 남겨진 세이옌의 몫이었다. 너무나도 직접적인 단어에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 버린 세이옌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녀를 놓칠세라 절뚝절뚝 걸음을 옮겼다.
“세이옌! 무사했구나…!”
“이 바보야! 누가 너 혼자서 가시에 들어가래…!”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어디 아픈 거니?!”
두 사람의 모습이 입구에 보이자마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세이옌에게 우르르 몰려들어 한마디씩 쏟아 냈다.
세이옌을 얼싸안은 이들은 정작 그를 데리고 나와 준 세라에게는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딱히 감사 인사를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세라로서는 오히려 말을 걸어 주지 않아 편한 일이었다.
“……오오?”
그보다 놀라운 점은, 사람들의 어깨 위에 얹혀 있던 검은 덩어리들도 세이옌처럼 모조리 사라졌다는 거였다.
이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그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볼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나저나, 에녹은 어디 있는 거지?’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고 있던 세라는 문득 마땅히 보여야 할 붉은 머리가 보이지 않음을 눈치챘다.
수없이 많은 초면 사이에 에녹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이 근처에는 보이지 않았다. 타고 온 말도 없었다. 그렇게 사람을 닦달해 대더니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어, 잠깐. 이거 기회 아냐?
기회를 포착한 세라의 두 눈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자신을 향한 무관심 속에 가장 거추장스러운 상대가 없는 이 상황, 혹시 할 일을 끝냈으니 이만 퇴장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전개에 물 흐르듯 빠르게 결단을 내린 세라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이제 어떤 식으로 형량을 줄일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지상의 사정도 얼추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혼자 다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저 너머로 뛰어내릴까?’
사라지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세라의 눈에 마침 인적이 드문 곳이 눈에 들어왔다. 지대가 높은 가시 주변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만들어 둔 난간이었다.
목적지를 정한 세라가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돌렸다.
“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혼잣말을 중얼댄 세라가 난간 너머로 훌쩍 몸을 날렸다. 비탈 아래로 몸이 떨어지는 순간, 세라의 두 눈에 불길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리 멀지 않은 나무 위, 까만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새들을 향해 명령했다.
이리 와.
망가진 회로에서 마력이 한 움큼 새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뻐근한 흉통과 동시에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른 새들이 그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너 나 할 것 없이 세라의 몸을 받쳐 든 새들이 힘찬 날갯짓으로 그녀의 안정적인 착지를 도왔다. 주변에 우거진 울창한 숲이 그녀와 새들의 비밀을 지켜 주었다.
탁, 땅에 내려선 세라가 휘파람을 한 번 불자 새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숲속으로 사라졌다.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이성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녀의 망가진 회로로도 암시를 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흐뭇한 눈으로 멀어지는 새들을 바라보던 세라가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마침내 제대로 된 길 위에 발을 내려놓았다.
“……?”
…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세라의 몸이 다시 공중으로 끌려 올라갔다. 허리를 감싸는 단단한 게 누군가의 팔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급격히 높아진 시야 너머로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의 뒤통수가 보였다.
뭐야. 내가 왜 여기에 타고 있는 거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에 두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바로 등 뒤에서 피식하고 바람 새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벅대고 있던 세라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인기척을 따라 돌아갔다.
그리하여 결국, 돌고 돌아서….
“생각보다 늦게 왔네?”
에녹 소서였다.
여유롭게 웃으며 세라를 내려다보는 그는 마치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았다.
“…….”
세라는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제 앞에 나타난 에녹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뛰어내린 비탈 위의 난간을 한 번, 평화로이 풀을 뜯는 말을 또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 상황이 너무나 맞지 않아서.
“어떻, 게…?”
스스로에게도 충동적이었던 이 선택을 대체 이 작자는 어떻게 알고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건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에 두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노예들 생각하는 거야. 다 뻔하지.”
한 수 아래를 바라보듯 코끝으로 세라를 내려다본 에녹이 코웃음을 치며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수고했어. 잠도 못 자고 고생했으니 돌아가면 상부터 줄게.”
그는 감히 자신 몰래 도망치려 한 노예에게 어떠한 야단도 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가야 할 길을 갈 뿐이었다. 히히힝. 평화로이 풀을 뜯던 말이 신경질을 내며 다그닥. 다그닥. 걸음을 옮겼다.
하씨, 안 되는데….
멀어져 가는 자유를 느낀 세라가 곤란한 표정으로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외면하지 말고 잘 봐.”
에녹은 결코 그 태도를 좌시하지 않았다.
친절하고도 자애로우신 주인님은 대놓고 현실을 부정하려는 노예의 턱을 움켜쥐어 억지로 그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니까.”
그리고 세뇌하듯 분명한 어조로 강조했다.
지금부터 여기가, 너의 집이라고.
억지로 정면을 보게 된 세라가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내린 순간, 쩌적. 하고 시야가 크게 갈라졌다.
“……!”
그 뒤로는 저 멀리 펼쳐진 시그너스 길드에 못 박힌 시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때. 낮에 보니 제법 예쁘지?”
그녀의 머리 위로 에녹의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가 떨어졌다. 세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충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예에, 진짜….”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풍경을 훑었다.
“더럽게, 예쁘네요….”
에녹의 말대로 낮에 보는 시그너스 길드는 이 삭막한 풍경 속에서도 눈이 절로 갈 정도로 더럽게 예뻤다.
여기서 귀담아들어야 할 표현은 ‘예쁘다’가 아니라 그것을 수식하고 있는 ‘더럽다’다.
나름의 규칙과 구조를 가지고 얽힌 길드의 풍경은 분명 아름다웠으나 그 건물 사이사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들이 그 감상을 망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그것들이 대지 위를 엉망으로 뒹굴고 있었다. 눈앞의 이 광경에 비하면 어제 마차의 창 너머로 보았던 세상은 종말이라기엔 깨끗한 편이었다.
뀨우우우우…….
질퍽한 몸을 뒤집은 검은 덩어리들이 둔한 목소리로 울었다. 덩치 때문인지 가시 안에서 봤던 놈과는 달리 조금도 귀엽지 않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자니 꼭 거대한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폐허 도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저 검은 덩어리가 뭔지 아직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을 굳이, 지금, 에녹의 곁에서 도망치려던 이 순간에 보여 준다는 건 너무나도 의도가 다분한 우연이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덩어리의 수를 헤아려 보던 세라는 화상을 입을 듯이 뜨거워지는 눈을 참지 못하고 질끈 감아 버렸다.
우리 신께서는….
눌러앉으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시네.
씁쓸한 혼잣말을 읊조린 세라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대지를 뒤덮고 있던 새카만 괴물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허허허허허허….”
그제야 오롯이 아름다운 시그너스 길드를 볼 수 있게 된 세라가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제게, 집이 생기다니….”
웃음을 그치지 않은 세라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지금 당장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뻐요. 주인님….”
억지로 억지로 쥐어짜 낸 기계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히히힝. 힘차게 투레질 한 말이 걸음을 옮겼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들이 나아가는 숲속에 고즈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신경질적인 웃음이 메아리쳤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전생에 나라를 판 사악한 흑마법사 세라 로젠바움이. 자신으로 인해 개판이 된 지상을 구하려 애쓰는.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휴먼 다큐멘터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