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갈 때는 한참을 달렸던 것 같은데, 돌아오는 건 금방이었다. 늦은 밤 길드를 나섰던 세라는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에녹의 말에 실려 귀환했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아침임에도 길드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물건을 싣고 온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무래도 시그너스 길드에 물건을 팔러 온 상인들 같았다. 그들이 끌고 온 짐마차 속에는 식료품, 무기, 보석, 곡식 등등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었다.
축제라도 열어야 될 것 같은 긴 행렬은 아주 느린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세라는 그제야 이들이 이렇게나 이른 시간에 길드를 찾은 이유를 눈치챘다. 이 속도면 정오나 되어야 모든 상인들이 길드 안에 전부 입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길드를 둘러싼 인파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에녹이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세라에게 뒤집어씌웠다.
세라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그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잠깐 쓰고 있어.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
세라의 얼굴을 단단히 감춘 에녹이 다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다가가자 제일 끝에 서 있던 상인 무리가 반사적으로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어? 저 사람은….”
흑마를 타고 달려오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의외성을 안고 있는 목소리에 앞을 바라보고 있던 머리통들이 주르륵 뒤를 돌아보았다. 에녹을 알아본 상인들이 언제 지루해했냐는 듯 눈을 번뜩였다. 세라는 그 순간 좌중을 뒤덮는 침묵 속에서 숨길 수 없는 흥분을 읽어 냈다.
“진짜 에녹 소서잖아.”
“내가 생전에 실물을 보게 되다니….”
스노우가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던 대로, 에녹은 어마어마한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붉은 머리의 영웅을 힐끗대다가 수줍게 아래로 떨어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성검의 주인을 영접한 사람들의 뺨이 소녀처럼 붉어졌다. 그건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청 좋아하네….’
세라는 조금 질린 기분이 되어 로브 속에 숨긴 얼굴을 더욱 깊이 숙였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
반면, 에녹은 자신을 둘러싼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한 번 훑어본 그는 말을 이끌어 검문이 한창인 입구로 향할 뿐이었다.
“아, 대장. 이제 오는 거야?”
짐마차를 검문하던 경비병이 에녹을 발견하고 가볍게 알은체를 해 왔다.
“검문은 어때?”
“순조롭지. 늘 그렇듯이.”
에녹과 경비병 사이에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세라는 경비병 주변에 거의 해체하다시피 펼쳐져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줄이 이토록 느리게 줄어드는 이유를 깨달았다.
“흐음?”
그 결에 경비병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뿐. 그는 세라가 면역자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듯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간 경비병은 곧 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인에게 들어가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상인 하나가 겨우 입구를 통과하자, 그다음 차례인 상인이 앞으로 나와 제 짐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
잠시 한가로워진 경비병이 그제야 다시 에녹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안쪽이 붐벼서, 말은 여기 두고 가는 게 좋을걸?”
“그러지 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순순히 말에서 내려서고는 세라에게 이리 오라는 듯이 양팔을 벌렸다. 세라는 저기에 안겨서 내려가자니 닭살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혼자 내려갈 방법을 몰랐기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몸을 맡겼다.
“평소보다 귀환이 늦었네. 간밤에 무슨 일 있었어?”
이쯤 되면 세라에 관해서 뭐라도 물어볼 만한데, 경비병은 끝까지 그녀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외부인의 물건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확인하는 주제에 말이다.
“그냥, 꼬맹이 하나가 애를 먹여서.”
저쪽에서 묻지 않으니, 에녹도 굳이 나서서 세라를 소개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쉽사리 사연을 가늠하기 어려운 짤막한 설명에도 경비병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킬킬 웃으며 샛문을 열어 주었다.
“수고해.”
말고삐를 넘겨준 에녹이 세라와 함께 그 문을 통과했다. 그들을 배웅한 경비병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향해 짓궂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좋은 시간 보내라고!”
좋은 시간?
어감이 몹시 불순하게 느껴지는 그 발언에 세라가 흘끗 뒤를 돌아봤다. 이미 스노우로부터 불순한 오해를 받은 후여서일까. 멀리서도 자신과 에녹을 짓궂게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랑 얘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단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참아야 한다는 게 원통할 뿐이다.
“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씩씩거리며 입구를 통과한 세라는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달빛 아래서는 영락없는 빈민촌 같았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던 활기가 돋보였다.
초라해 보이던 텅 빈 거리를 따라 기다랗게 가판대가 늘어서고, 쭉 깔린 길 안쪽으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사람이, 엄청 많네?’
말 그대로, 진짜 ‘바글바글’했다. 대체 다들 어디에 숨어 있다 나왔나 궁금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이 정도라면, 웬만큼 번화한 도시 하나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세라는 그냥 가만히 사람 구경이나 하고 싶어졌다. 지금 저 사이에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인간의 파도에 휩쓸려 원치 않는 곳으로 떠밀려 가기 쉬워 보였다.
그렇게, 세라가 걸음을 뗄 엄두도 못 내고 멈춰 있을 때. 망토 속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든 손이 그녀를 잡아챘다.
“……?”
그 상대는 당연하게도 에녹이었다.
“뭐 해? 따라와.”
그는 세라와는 달리 사람을 뭉개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인파를 보고도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꽉 잡아야 돼. 잃어버리면 찾기 귀찮으니까.”
말과는 달리 헐겁게 세라의 손목을 붙잡은 에녹이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어우.”
“악!”
에녹의 장대한 어깨에 치인 이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어찌나 세게 부딪혔던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에녹에게 퍽퍽 치이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아야……. 어? 대장. 좋은 아침.”
그들은 제 어깨를 치고 인파를 거스르는 남자를 불만스럽게 쏘아보다가도, 상대가 에녹임을 알아본 순간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대장?”
“어제는 왜 안 왔어. 다들 대장만 기다렸는데!”
그에게 말을 붙여 오는 사람은 비단 그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에녹과 부딪힌 사람들은 그대로 지나치는 대신에 동경하는 길드장에게 한마디라도 붙여 보고 싶어 안달을 했다.
“이제 돌아오는 거야? 피곤하겠다.”
“우리 점심에 피크닉 갈 건데 같이 갈래?”
특히 여자들이 무척 적극적이었다. 가녀린 몸으로 인파를 뚫고 들어온 여인들이 하나둘 그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망토는 어디다 버리고 왔어? 또 어디다 흘리고 왔어?”
“몸이 뜨겁네. 지금 졸리구나. 귀여워라.”
“어? 여기 흐트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여인들이 만들어 낸 원 안에 갇힌 후였다. 애정이 담뿍 담긴 인사와 함께 사방에서 에녹을 향한 손길이 쏟아졌다. 허락도 받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뻗어 오는 손길에는 거리감이랄 게 없었다.
강인한 어깨, 핏줄이 불거진 팔뚝, 탄탄한 가슴을 쓸어내린 이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뺨을 붉혔다. 그 모습이 꼭 화려하게 피어난 장미에 모여든 꿀벌들 같았다.
“좋은 아침. 다들 일찍 일어났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는지, 에녹은 별다를 거 없다는 반응이었다. 도리어 제 부하들에게는 절대 보여 주지 않던 사근사근한 눈웃음까지 쳐 주며 그들을 맞았다.
“어젯밤에는 어디 갔었어?”
“또 잠 안 온다고 밤을 새운 거야?”
“심심하면 나를 부르지…….”
그 눈웃음의 효과는 굉장했다.
환호 섞인 비명을 내지른 여인들이 좋아 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고는 한층 더 진득하게 그에게 들러붙었다. 개중에는 조금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손길도 있었지만, 에녹은 이번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더 달콤한 목소리로 여자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어제는 일이 있었어. 걱정했어?”
우웩.
에녹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간드러진 목소리에 세라가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을 해 댔다.
너무나도 낯선 모습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안 그래도 헐겁게 잡혀 있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걱정했지. 그럼!”
세라가 빠져나간 빈자리는 금세 다른 여자가 채웠다. 틈 없이 밀려든 여인들이 이제는 에녹의 몸에 자신의 몸을 거의 붙여 넣다시피 간격을 좁혔다.
“그래서 잠을 못 잤어? 귀엽네.”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지껄인 에녹이 걱정했다는 여인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 하고 건드렸다. 꺄아악. 다시 한번 여자들 사이에서 짜릿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지랄 났네.”
세라는 자기들만의 세상에 푹 빠진 이들을 바라보며 비위가 상한 표정을 지었다.
애정을 줄줄 흘려대는 여인들 사이의 에녹은 꼭 벌과 나비에 둘러싸인 화려한 장미 같았다. 이 여자 저 여자 신경 써 주며 웃음을 흘리는 모양새가 하루 이틀 놀아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지옥에서 구르던 시간 동안 저놈이 얼마나 즐거운 인생을 즐겨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지는 순간이었다.
안 볼란다.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세라가 에녹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대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매의 눈으로 관찰했다.
잠깐 쉴 틈이 난 김에 그녀의 형량을 줄여 줄 새로운 복덩이를 찾아내기 위해서.
‘……안 되네.’
그러나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아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멀리서 봤을 때는 이 길드 전체가 거하게 꼬여 버린 운명의 실들로 엉망진창이었는데, 막상 가까이 다가오니 야속한 별의 조각은 자기가 언제 반응을 보였냐는 듯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발동하는 데 뭔가 조건이 있는 모양이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세라가 불만스럽게 눈매를 좁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해치우고 빨리 환생이나 하고 싶었는데, 일단은 별의 조각을 발동시키는 방법부터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에녹에게로 시선을 돌리던 때였다.
“대장! 또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 같이 술 마시러 가자! 술!”
멀리서 에녹을 발견하고 달려온 무리가 세라를 밀쳐 내며 여자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으악!”
그 힘에 떨어져 나온 세라는 그에게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끝도 없이 밀려났다.
“아야.”
그렇게 밀려나고 밀려나다 누군가의 발을 엄청 세게 밟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