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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18화 (18/131)

#18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두 눈에는 미처 삼키지 못한 두려움이 일렁이고 있었다.

에녹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죽음인지, 아니면 이 추운 겨울 그를 바깥으로 내몬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정타였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아이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흐드러지는 붉은 머리칼은 하필이면 새하얀 설원과 대비가 되어서 모른 척하기엔 너무나 눈에 띄었다.

‘…….’

그곳에 시선을 빼앗긴 세라가 짧게 침묵했다.

아는 이름이었다.

아니, 사실은 이름을 듣기 전부터 세라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 넓디넓은 소서 황궁에 붉은 머리라곤 그 애 하나뿐이었으니까.

에녹 소서.

반쪽짜리 황족, 권력이라곤 쥐뿔도 없이 태어난 열다섯 번째 황자. 별 볼 일 없는 그가 이복형인 황제의 손에 도륙 나지 않고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이유는 어린 나이에도 검을 휘두르는 재주가 제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탐욕스러운 황제는 틈만 나면 저놈을 잘 키워 언젠가 일으킬 정벌 전쟁에 선봉으로 내보낼 것이라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었다.

‘……들어오렴.’

마침내 찾아낸 그럴듯한 이유에 세라는 비로소 못 이기는 척 문을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에녹이 세라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아이의 얼굴에 자그마한 안도감이 피어났다. 그제야 그 나이대의 아이 같았다.

털썩, 세라가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무사히 실내에 들어온 아이가 쓰러졌다. 거의 안 입은 것과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설원을 견뎠으니 그럴 만했다.

그냥 둘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건 또 너무 매정한 듯하여, 에녹의 발을 질질 끌어다 난롯가로 옮겨 주었다.

그러자 창백하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안색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불쌍하기 그지없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세라가 아이는 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도 참, 기구한 인생이다.’

그것이 감상의 전부였다.

그 외에는 의식적으로 쟤가 어쩌다 이런 일을 당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건사하기에도 무척이나 힘겨운 나날이었으니까.

다행히 세라가 귀찮아지기 전에 황제의 시종이 들이닥쳐 에녹을 데리고 가 버렸다.

아이를 찾아온 시종은 세라가 아니었다면 애써 살려 둔 황자가 얼어 죽을 뻔했다며 정중한 태도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막상 끝나고 나니 뿌듯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지. 내가 건져 준 애새끼 손에 요절할 줄은…….’

과거의 한때를 회상하던 세라가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그래도 어렸을 땐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흐릿한 기억 속에 유일하게 또렷이 남은 어린 소년의 얼굴을 그려 보던 세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에녹은 어느덧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 있었고, 예쁘긴 했지만 조금도 귀엽지 않았다.

쇳덩이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깐깐하고, 진부하고, 성가신 어른으로 자라 있었다.

그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해 준 은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고 말이다.

하긴, 몰랐으니까 죽였겠지.

알았으면 찔렀겠어? 그 위-대하고 고-귀하신 영웅께서?

“주인님이 그분을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주인님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 수 있죠? 혹시 주인님이 그만큼 잘나셨는지……?”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녹 소서는 세라의 인성이 어쩌니저쩌니 말할 자격이 없었다.

그야말로, 세라의 그 문제 많은 인성 덕분에 목숨을 건진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가 황제에게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세라는 결코 문을 열어 주지 않았을 거다.

“하여튼, 한마디를 안 지지.”

하나하나 주옥같이 뼈를 때리는 말에, 에녹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도 달리 반박할 말이 없는지, 그 주제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노예 주제에…….”

대신 감히 제 말에 자꾸만 토를 다는 세라에게 핀잔을 주었다.

“꼬우면 주인님이 노예 하시든가요.”

“하하!”

물론, 세라는 이번에도 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예상 못 했는지, 허를 찔린 웃음을 토해 낸 에녹이 괘씸하다는 듯 세라의 두 뺨을 잡고 주물러댔다.

“이제 좀 살 만한가 보지? 응? 말이 많아졌네.”

“네. 뭐, 덕분에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그것만큼은 부정 못 할 사실이었기에, 세라는 순순히 네 덕이라며 인사치레로 감사 비스무리한 것을 표했다.

“그럼, 몸도 녹았으니 슬슬 보내 줘야겠다.”

기다렸던 말이었나.

에녹은 세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예……? 어디를?”

우리, 또 나가?

세라는 당장이라도 어디로 가자고 할 것 같은 에녹의 행동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물음에 화답하듯 느릿하게, 혹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순조롭게 세라의 위를 타고 올랐다. 당연한 제자리를 찾듯 높은 자리를 점한 영웅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노예의 귓가에 기꺼이 두 사람의 목적지를 속삭여 주었다.

“천국.”

“…….”

그게 진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잠자리에서 흔히 오가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웃겨.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거든요.”

낮게 콧방귀를 뀐 세라가 대놓고 그의 천국을 비웃었다. 이때까지도 세라는 에녹이 제 위를 올라타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그다지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와 에녹 사이에 신뢰라고 할 만한 게 없었지만, 적어도 이 얼굴을 한 여자와 자고 싶어 하지는 않으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장난치지 말고 이만 나오시-.”

그러한 이유로, 누가 봐도 거사가 일어나기 직전의 이 상황을 대담하게 웃으며 넘기려 했다.

“뭐, 뭐야!”

그녀를 타고 오른 에녹이 기습적으로 상의를 탈의해 버리기 전까지는.

“왜, 왜, 왜, 왜, 왜…!”

너무나도 놀라 버린 세라는 갑자기 왜 이러냐는 짧은 문장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네가 기억을 잃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에녹이 친절하게도 정답을 알려 주었다.

“원래 천국은 알몸으로 가는 거야.”

그건 법으로 정해져 있어.

헛소리를 진지하게 말하는 영웅의 입에 견실한 미소가 걸렸다.

무슨 개소리야, 이 문란한 새끼야….

다른 사람의, 그것도 에녹 소서의 나체를 보는 게 망측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세라는 조각 같은 상체를 샅샅이 훑어 내리는 시선은 떼어 내지 못했다. 아마 눈앞에 나체의 인간이 지나가면 누구라도 똑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어쩔 수 없다. 이를테면 불가항력, 조금 더 과장스럽게 말한다면 반사 신경 같은 거랄까….

때마침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의 얼굴에 닿아 부서져 내렸다.

빛을 받아 한층 더 연해진 페리도트 색의 눈동자가 산란하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워낙 키와 덩치가 커서, 품이 남는 셔츠를 입고 있을 때에는 조금 둔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펄럭이는 옷감을 걷어 낸 육체는 조금의 둔중함도 없이 날렵했다.

그의 몸에 붙어 있는 근육들은 하나 같이 맹수의 것처럼 매끈했다. 전반적으로 근육이 골고루 발달했는데, 결코 보기에 부담스럽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떡 벌어진 직각의 어깨에는 잘 발달된 삼두가 붙어 있었지만,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부분은 근육이 흉하게 솟아오르지 않고 딱 적당한 정도의 근육만이 붙어 있었다. 넓게 퍼진 가슴은 눈으로 보기에도 단단해서, 손가락으로 누르면 근육의 힘만으로 그것을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늘어짐 하나 없이 탄탄히 올라붙은 복근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세라는 예전 소서 황궁에 불려 오던 일류 조각가가 빚어낸 역작보다도 더 완벽한 몸을 눈앞에 둔 기분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에녹 소서의 몸에 자그마한 흉터 하나 없다는 거였다. 꼭 태어나 한 번도 약자였던 적이 없는 사람처럼.

얼굴도 예쁜 에녹은 몸도 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예뻤다.

칭찬에 박한 세라였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도, 타협도 필요치 않았다.

얘는 대체 누구야?

세라는 처음 보는 사람을 보듯 낯가리는 얼굴로 에녹을 봤다.

그녀가 아는 에녹 소서는 언제나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다녔다. 건전하게 몸을 가린 그는 멀리서 보아도 얌전한 귀족 도련님 같았었는데, 그저 몸을 가리는 의복을 한 꺼풀 벗어 낸 것뿐인데도 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안 힘들어? 숨 좀 쉬지?”

전시하듯 제 몸을 내보이던 에녹이 짐짓 심각한 어조로 물어 왔다.

“……!”

세라는 그제야 자신이 그의 몸을 구경하느라, 오래도록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입 안에 침이 흥건했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되찾은 세라는 반사적으로 목울대를 넘겼다. 꼴깍. 그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렸다. 그녀를 깔고 앉은 에녹에게 충분히 들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아니. 이건, 이거는….”

당황한 세라가 결코 음란한 상상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한 번 고장 난 언어 능력은 그녀가 바란다고 해서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말 못 하는 짐승처럼 웅얼거려야 했다. 에녹은 신기한 눈으로 말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세라를 구경했다.

만난 이후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든 청산유수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던 주제에, 심지어 스스로가 알몸이 되었을 때에도 잘만 말하던 사람이, 에녹이 남들 다 하는 상체 탈의 한번 했다고 이러는 게 재미있는 눈치였다.

“어. 그냥 만져 봐도 돼.”

그런 세라를 더 골려 주고 싶었는지, 에녹이 멋대로 세라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에 얹어다 놓았다.

“허억……!”

손바닥에 단단하고 뜨거운 살갗이 닿자마자, 세라가 불에 덴 사람처럼 펄쩍 뛰며 얼른 손을 떼어 내려 했다.

“만지라니까?”

하지만 그 시도는, 에녹이 달아나는 손등을 잡아 누름으로써 저지당했다.

“끄웳!”

그에 세라의 입에서 한 번 더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에녹은 전기 고문이라도 당하듯 바르르 떨리는 손을 토닥여 달래 주었다.

“괜찮아. 이래야 공평하잖아.”

나도 마음대로 만질 거거든.

속살대는 목소리 사이사이로 세라의 손바닥 아래 울리는 고동이 쿵쿵 박자를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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