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설명해.”
목소리의 출처는 1층 응접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 쪽이었다. 어젯밤 세라의 의문을 자아냈던 커다란 테이블 주변으로 대여섯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아, 망했네.
뒤늦게 제 처지를 상기한 세라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중년 남자 하나, 여자 둘, 에녹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셋.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세라를 바라보는 이들은 못 볼 것을 본 사람들처럼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해서,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들 같았다.
어제 꽤 많은 사람과 마주쳤음에도, 그중 아는 얼굴은 이상한 수염을 가진 마커스뿐이었다. 동료들 틈에 함께 섞여 있는 그는 어제와는 달리 제법 근엄한 척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 근처에 모여 있는 이들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꼭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나 길드에서 높은 사람이야.’라고 말해 주듯이 말이다.
이 아침부터 길드장의 집에 모여서 뭔가, 긴밀한 회의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최소한의 상황 파악을 끝낸 세라가 얌전히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그너스는 면역자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거 아니었나?”
세라의 존재를 문제 삼은 자는 그중 ‘에녹 또래로 보이는 남자 셋’ 중 하나였다.
그는 끝이 치켜 올라간 눈매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반듯한 코 때문인지 농담으로도 인간미가 있어 보인다고 말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그나마 짧게 자른 연보랏빛 머리칼과 투명해 보이는 회색의 눈동자가 뾰족하기만 한 인상을 그나마 부드럽게 눌러 주고 있었다.
“그건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원칙인 줄 알았는데.”
황당한 비소를 머금은 남자가 세라에게 듣고 찔리라는 것처럼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이래선 약속과 다르잖나.”
비난 섞인 어조로 에녹을 재촉한 남자가 마지막으로 세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면역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과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
날것 그대로의 적의를 마주한 세라는 그 눈길 한 번에 자신이 얼마나 잘못 걸렸는지 알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글쎄.”
뾰족한 형태를 갖춘 남자의 물음과는 달리 돌아오는 에녹의 답은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었다.
창가에 둔 유일한 의자를 차지한 그는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게 중심을 뒤로 두어 의자를 까딱이는 옆모습이 어제보다 묘하게 무기력해 보였다.
저래서야 회의를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가는 말들을 듣고나 있을지 모를 노릇이다.
“난 그런 약속을 한 기억이 없는데.”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가 다소 무책임했다. 하늘을 둥둥 떠내려가고 있는 구름에 시선을 빼앗긴 에녹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면역자를 싫어했던 건 내 개인 기호였고, 딱히 그걸 원칙으로 삼은 기억은 없거든.”
쾅! 성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대답에 남자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한 방으로 응접실의 자랑인 거대한 테이블이 그냥 두 동강이 난 것도 아니고 산산조각이 났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려서 저렇게 잘게 부서지는지 모르겠지만, 조각조각 난 파편들이 온 응접실로 튀어 나갔다.
“어…. 생각보다 더 열받은 모양인데?”
“조용히 해. 바보야.”
다분히 공격적인 행위에 잠자코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이들이 쑥덕거렸다. 몇몇은 필요 이상으로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남자의 눈치를 보기도 하는 것 같았다.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 행위를 기점으로 응접실에는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식하게 저게 뭐 하는 짓이야.
그 싸늘한 공기와 자신을 애써 분리해 낸 세라는 제 발치까지 굴러온 파편을 내려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어쩐지 이 집 응접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썰렁해졌는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에녹 소서. 왜 여기. 시그너스 길드에 면역자가 있는 건지.”
남의 집 살림살이를 때려 부순 남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로 재차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한쪽 손을 슬쩍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손잡이에 가져다 댔다. 이번에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이걸 뽑아 버리겠다고 항의하는 것처럼.
“왜긴. 내 노예니까 여기 있지.”
저 모습을 에녹이 봤다면 좀 더 친절하게 대꾸해 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여전히 구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바람에 대화에 임하는 자세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뭐어?”
“대장.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면역자를?”
그에 이번에는 가만히 있던 다른 사람들 쪽에서 먼저 반응이 터졌다. 앞으로 나서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에녹의 돌발 행동이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그런 일을 왜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중 에녹과 똑같은 붉은 머리의 여자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쿵, 산만하게 들썩이던 의자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내려앉았다.
“상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녹이 말을 잘랐다.
에녹은 유독 그 단어가 거슬린다는 듯 의자를 까딱이던 것도 멈춘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낮게 실소한 에녹이 내내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제 부하들을 바라봤다.
여전히 널린 빨랫감처럼 아무렇게 드러누운 자세였으나,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무기력해 보이던 인상이 한층 또렷해졌다. 응접실에 모인 이들의 면면들을 훑어보는 그는 한 번도 굶주려 본 적 없는 맹수처럼 오만하고 강인해 보였다.
“누가 감히?”
그래서, 쉽게 반발을 살 수 있는 광오한 말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허!”
“대장.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말이 좀 그렇다?”
저런 말에 어느 누가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잠자코 듣고 있던 이들마저 얼굴을 구겼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원칙으로 정해 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암묵적인 규칙이라는 게 있는 건데.”
“맞아. 시그너스 길드는 면역자를 쓰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걸?”
“애초에 대장한테 노예가 왜 필요해? 이미 스푼도 자기 손으로 안 드는 사람이.”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불만은 끝이 없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그렇게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에녹이 못 이기는 척 면역자가 왜 필요했는지 설명만 제대로 했다면 다들 납득하고 넘어갈 것 같았다.
“안 봐도 뻔하지.”
위태위태한 분위기를 완전히 나락으로 끌고 간 건 역시나 최초에 의문을 제기한 그 남자였다.
“그렇게 온 길드 여자랑 뒹굴고 다니더니. 이젠 하다 하다 면역자까지 침대에 끌어들여?”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는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그는 원수를 바라보듯 에녹을 노려보며 한껏 빈정거렸다.
“넌 명예도 없-.”
쾅!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에녹이 창틀을 내려쳤다.
“……!”
쿠구궁. 창틀을 타고 전해진 진동이 벽을 타고 올라가 집 전체가 뒤흔들렸다. 겨우 현상 유지를 하고 있었던 낡은 목재들이 요란하게 삐걱거리고,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시계들이 바람을 맞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
“…….”
순식간에 응접실을 휩쓸고 간 폭풍의 끝에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한마디씩 쏘아붙이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합, 하고 입을 다문 탓이다. 그 속에는 명예 운운하며 에녹을 비난하던 남자도 함께였다.
그리고 세라는…….
‘아, 젠장. 저거 설마 다 나한테 치우라고 하려나?’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버린 공간을 바라보며, 지극히 현실적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대체 이 길드 놈들은 대화를 하다가 왜 물건을 부숴대는 건가. 곧 제게 닥쳐올 귀찮은 미래를 예감한 세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저 청소까지 하면, 대체 레니스는 누가 찾는데. 하면서.
“…….”
“…….”
그리하여, 모두가 입을 닥친 응접실에 옆 사람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살벌한 침묵이 내려앉았을 즈음. 에녹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 기드온.”
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름을 불린 기드온은 에녹과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썩 용맹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 졸아 붙은 사람은 비단 그 한 명뿐만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크게 부각되어 보이진 않았다.
“내 땅에 빌붙어 사는 사람은 너야.”
지켜보는 세라가 다 서운할 정도로 정나미 없는 말이었다.
“여기가 마음에 안 들면 떠나. 붙잡지는 않을 테니.”
그건 더 이상 저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최후통첩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비단 기드온. 한 사람에게만 하는 경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기드온은 오히려 분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언젠가 그 오만이 널 집어삼킬 거다.”
그러다 굉장히 시적인 저주를 남기고는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그 와중에도 세라의 앞을 지날 적에는 그녀를 위협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불결하게…….”
그 송곳 같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세라는 앞으로의 길드 생활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또 이렇게 끝나는 거야?”
“하아-. 하루라도 안 싸우는 날이 없네.”
기드온의 퇴장 이후로 회의는 완전히 파장이 났다. 한마디씩 한탄을 내뱉은 사람들이 별다른 인사 없이 터덜터덜 그 뒤를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유일하게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마커스뿐이었다.
“으이구, 못살아! 말 좀 잘하지. 거기서 꼭 그렇게 밉게 말해야겠어?”
쫙!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서슴없이 에녹의 등짝을 내려쳤다.
“면역자가 급하게 필요했다! 덕분에 세이옌이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있는 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걸 왜 말을 못 해! 말을!”
그 꼴이 딱 철없는 어린 아들을 나무라는 부모처럼 보였다.
웃기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아니 지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인간이 바로 저 에녹 소서일 텐데 말이다.
“이러다 쟤네 진짜 짐 싸 들고 다 나가 버리면 어쩌려고!”
“그럼 가는가 보다 하는 거지.”
“아니지! 대장이야 잘난 몸이시니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안 괜찮아요. 내가!”
“그럼 너도 가든가.”
“아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이래서야 마커스의 태도도 십분 이해가 되었다. 다시 물에 젖은 빨래처럼 의자에 내걸린 그는 무엇도 하기 귀찮은 사람처럼 또 멍하니 창밖의 구름만 올려다봤다.
“그러지 말고 이따가 잘 좀 이야기해 봐. 다른 놈들은 몰라도 기드온은 꼭! 그쪽 애들이 제일 빠릿빠릿하고 일을 잘한단 말이야.”
답답하다며 가슴을 내려치는 마커스는 이러다 정말 길드의 유능한 인재들이 모조리 나가 버릴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기색이었다.
“아, 몰라. 귀찮아. 너도 빨리 가. 피곤해.”
“왜 귀찮아! 당신 길드 일인데!”
반면 길드장이라는 사람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그는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 보였다.
“노예야. 손님 가신댄다.”
마커스의 울부짖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린 에녹이 너도 얼른 꺼지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안녕히 가십쇼…….”
얼떨결에 배웅을 맡게 된 세라는 멀뚱히 서 있기도 뭐해 엉거주춤 인사를 건넸다.
“그래. 간다. 가!”
명백한 축객령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판단이 섰는지, 마커스도 마지못해 응접실을 나섰다. 쿵쿵 항의하듯 발뒤꿈치를 찍으며 걸어가는 그는 차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어휴, 저 빌어먹을 우울증은 왜 또 도져 가지고.”
그 혼잣말을 들어 버린 세라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무기력해 보이기는 했지만 우울해 보일 정도였던가?
쾅. 그사이에 마지막 손님마저 사라지고 집 안엔 에녹과 세라만이 남게 되었다. 에녹에 관한 의문을 짧게 끊어 낸 그녀는 이김에 자신도 집을 나설 생각으로 에녹에게 말을 걸었다.
“주인님. 저 혹시 잠시 외출 좀…….”
뭐야. 어디 갔어?
하지만 돌아본 자리에 에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2층에라도 올라가 버린 모양이다.
빠르기도 하지.
결국 혼자 남게 된 세라는 이대로 모르는 척 에녹에게서 도망가 버릴까. 하는 충동에 휩싸였을 때였다.
쾅쾅쾅! 쾅쾅! 쾅쾅쾅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