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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22화 (22/131)

#22

“저 왔어요! 저! 늦은 거 아니에요! 제발 회의 끝내지 말고 문 열어 주세요! 제발! 제발!”

불순한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맹렬하게 에녹의 집 문을 두드렸다. 괜히 소스라치게 놀란 세라가 콩콩 튀어 오르는 심장을 내리누른 채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세요!”

그러나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허공을 헤매던 세라의 눈동자가 기척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허리를 숙인 남자 하나가 격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

그 불안정한 등짝을 내려다보던 세라의 두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그녀는 잠시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다. 무언가를 너무 맹렬하게 바란 나머지, 자신이 혹시 헛것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하아, 하아……. 아, 흐으, 다행이다. 아직, 회의, 후우, 안 끝났나요?”

세라가 놀라서 굳어 있는 사이, 겨우 호흡을 정리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치렁치렁한 검은색 머리칼이 출렁거렸다. 땀을 뚝뚝 흘리고 있는 얼굴이 여전히 창백하다. 운동을 했으면 혈색이 돌만도 한데, 남자는 어제보다도 더 시체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네에.”

세라는 꿈에서도 그리던 그 얼굴을 홀린 듯이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떠나 버린 에녹의 집. 뒤늦게 문을 두드린 사람은 놀랍게도.

“전혀. 딱 맞춰서 오셨어요.”

세라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레니스. 그 남자였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만히 앉아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된 세라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감탄했다.

정말로 신이 나를 돕고 있나?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어서 오세요!”

감격에 젖은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그를 환대했다.

“이렇게 누추한 곳에 와 주시다니 너무 감사드려요!”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그녀가 기꺼이 레니스를 안으로 안내했다.

“아, 예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의적인 태도에 레니스가 잠시 주춤했지만, 다행히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집 안이 좀 엉망이긴 하지만, 괜찮으시죠?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집구석이었으니까.”

바닥을 굴러다니는 파편을 발끝으로 대충 치워 버린 세라가 은근슬쩍 에녹의 집을 깎아내리며 벙긋 웃었다. 흐, 레니스는 흐느끼는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어색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감, 감사합니다아…….”

쭈뼛대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는 태어나 한 번도 환영받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뚝딱거렸다. 제법 대화를 나눴는데도, 그는 광장에서 마주쳤던 세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그때는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를 따라 텅 빈 응접실로 들어선 레니스가 의아한 낯으로 걸음을 멈췄다.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시죠?”

“전부 돌아갔어요! 개같이 싸웠거든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세라는 당당하게 자신이 거짓말을 했음을 실토했다.

“예에?! 1년 동안 싸우느라 회의를 못 했는데 또 파투를 냈다고요?!”

그에 레니스가 크게 경악했다.

“그럼 그렇지. 우린 전부 망할 거야…….”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모든 희망이 꺾인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근데, 테이블은 왜……?”

한창 침울해하던 레니스가 그제야 난장판이 된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는지 한 박자 늦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절 보고 화가 난 기드온이 부쉈어요.”

“시계들은?”

“그것 때문에 열받은 대장이 떨어뜨렸죠.”

“그렇군요.”

앞뒤 상황을 전부 잘라 낸 설명에도 레니스는 어떤 재앙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갔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은 그렇게 파투가 난 거군요. 또 싸워서…….”

그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는지 레니스가 괴로운 얼굴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네. 그렇게 파투가 났답니다. 의자라도……?”

레니스가 언제든 나가 버릴 수 있도록 서 있는 게 신경이 쓰였던 세라가 창가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자리를 권했다.

“이래선 영원히 회의를 할 수 없어…….”

하지만 절망 속을 허우적대는 레니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던 손을 그대로 쓸어내려 마른세수를 했다. 근심만이 가득한 푸른색 눈동자가 처참한 꼴을 한 회의실을 한 바퀴 훑었다.

“하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걱정을 혼자 짊어진 사람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라는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레니스의 입장이라도, 맨날 싸우고 부숴대는 동료들과 같이 일을 하라고 하면 저런 한숨을 쉴 것 같았다.

쯧쯧. 이러니 운명이 안 꼬이고 배겨?

위로의 의미로 레니스의 등을 토닥여 준 세라가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속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 힘밖에 모르는 무식한 놈들.”

“이 힘밖에 모르는 무식한 놈들.”

그랬더니 마치 짠 것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쳐졌다.

“……!”

“……!”

동그랗게 뜨인 두 가지 색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은연중에 새어 나간 속마음이 다른 누군가와 완전히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야, 너두? 야, 나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깊은 공감이 오갔다.

“……일단, 주인님을 만나러 오셨으니 안내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무언의 공감을 나누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방금 전의 그 교감 때문일까? 세라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레니스의 태도가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근데, 누구시죠?”

…라고, 생각하던 찰나.

세라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첫발을 내대딘 레니스가 그러고 보니 너는 누구냐며 그녀의 정체를 캐물었다.

늦어도 한참은 늦은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세라가 가장 답하기 싫어하는 질문이었다.

“저는당신대장의노예랍니다.”

한순간에 미소를 잃은 세라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가시죠.”

가까스로 미소를 되찾은 그녀는 씩씩하게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두 눈에 열심히 힘을 주어 레니스를 살폈다. 그를 다시 만났는데도 아까부터 별의 조각이 그저 조용한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세이옌을 구할 적에는 만나기 전부터 시작해서 구해 줄 때까지 통곡을 해 대는 통에 사람을 힘들게 하더니.

둘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 거지?

갈대와도 같은 조각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세라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설을 그려 내고 있을 때였다.

“아, 혹시 대장에게 보낸 제 보고서. 어딨는지 아시나요?”

뒤따라 계단을 오르던 레니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우울하게 푹 꺼진 목소리에는 희미한 기대가 깃들어 있었다.

“예? 보고서?”

이 집에서 에녹이 뭔가를 읽는 꼴을 본 적이 없던 세라는 그런 건 구경도 못 해 봤다고 대답하려다가.

“아아, 네에. 보고서요…….”

어제 아침.

제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신나게 태워 버린 서류 더미를 떠올리고는 애매하게 말끝을 늘였다.

아, 젠장할. 그거 레니스가 쓴 거였어?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구긴 세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글쎄요. 제가 왔을 때는, 이미…….”

틀렸다는 식으로 고개를 젓자, 레니스가 알아서 비극적인 뜻으로 해석해 주었다.

“역시, 또 어딘가에 버린 모양이군요…….”

모든 희망을 잃은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늘진 얼굴에 자리한 창백한 입술이 빠르게 들썩였다. 이 여자밖에 모르는 색마 자식. 문득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지만, 세라는 배려 깊게 못 들은 척해 주었다.

“아, 그리고 대장한테는 제가 왔다고 하지 말고, 예쁜 여자가 찾아왔다고만 해 주세요.”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레니스가 생각났다는 듯 뜬금없는 부탁을 덧붙였다.

“왜요? 사이가 나쁜가요?”

“아니요. 그렇다기보다는…….”

이유를 묻는 말에,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곧 개미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대장은 여자가 아니면 독대를 해 주지 않거든요.”

“예?”

“가끔 우울증이 도지면 여자도 안 만나 줄 때가 있어요.”

“예?”

“그래서 말인데……. 실례지만 어제 대장과 하셨나요?”

“…….”

주어가 없어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물음이라 마지막 ‘예?’는 하지 않았다. 초면에 주고받기엔 대단히 사생활을 침해하는 내용이었기에, 세라는 한참이나 대화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침묵했다.

거울을 볼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정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점점 굳어 가는 표정을 마주한 레니스가 오해하지 말라며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제가 정말 남의 침대 사정이나 알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대장이 하루라도 여자랑 못 하면 우울해하거든요. 그럼 진짜 까칠해져서…….”

“하하!”

그 말은 진심으로 세라의 웃음을 샀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비웃음을.

물론 주어는 에녹 소서다.

“예……?!”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레니스가 혹시 자신에게 한 말인가 싶어 화들짝 놀랐다. 세라는 그에게 일일이 변명하는 대신, 침묵으로 넘겼던 질문에 대한 답을 일러주었다.

“안타깝게도, 주인님은 오늘 까칠할 예정이에요.”

“예? 왜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남의 침대 사정이 궁금하지 않다고 해 놓고서는, 레니스는 세라와 그가 자지 않은 이유를 몹시 궁금해했다.

“왜라뇨. 그야. 주인님은…….”

세라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의 답을 맞히듯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재수가 없잖아요.”

거기에 더해 예쁘고, 문란하고, 야하고, 흉측한 거시기를 지니고 있지. 하지만 이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어. 대충 그렇게 결론을 지은 세라가 그게 다라는 의미로 빙긋 웃어 주었다.

“…….”

너무 솔직했던 걸까.

감히 위대하신 대장님을 재수 없다고 칭한 세라의 발언에 레니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 안 되는데. 얼른 친해져서 형량을 줄여야 하는데.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쏟아 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흐-.”

그때, 아무 반응이 없던 레니스가 아까처럼 또 이상하게 웃었다. 음침해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음모를 꾸미는 배신자처럼 웃던 그가 돌연 수줍은 듯이 몸을 비비 꼬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 넣은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기드온은 대체 왜 당신을 보고 화를 낸 거죠?”

“으음, 아마도 제가 면역자라서……?”

“……!”

눈이 있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는데, 레니스는 그제야 세라가 면역자라는 걸 눈치챈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다.

본능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던 그는 멀어진 걸음만큼 다시 다가와 세라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 진짜네?”

아까도 느낀 거지만, 눈썰미라고는 진짜 쥐뿔도 없는 사람이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세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더니 진짜로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어쩌다 보니 면역자라는 사실을 자진 신고한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망했다. 그냥 아무 말이나 지어낼걸.

여기 사람들 면역자라면 질색을 하던데.

다 된 밥상을 뒤엎은 기분에 세라가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정말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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