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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23화 (23/131)

#23

“……?”

기겁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레니스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그에 세라는, 처음으로 형량 때문이 아닌 진심으로 레니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면역자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요.”

“싫어하죠. 물론 저도 좋아하진 않아요…. 성가시거든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서도 레니스는 솔직하게 자신도 면역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면역자보다 대장이 더 싫어요….”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둘 빼고는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는데도,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을 살핀 그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작게 웅얼거렸다.

“재수가 없잖아요.”

“……!”

허업. 그 비밀스러운 속마음을 전해 들은 세라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시구나.”

입술을 말아 웃음을 삼킨 세라가 두 손으로 수줍게 머리칼을 꽂아 넘겼다. 깨달음을 얻은 자수정 빛 눈동자에는 반짝반짝 광채가 났다.

“……흐.”

레니스는 기꺼이 그녀와 함께 웃어 주었다. 야, 너두? 야, 나두. 서로가 같은 마음임을 알게 된 둘 사이에 아까보다 더 끈끈한 시선이 오갔다.

“운 좋게, 이야기가 통하는 분과 만났네요.”

“동감입니다.”

2층 복도에 선 그들은 한동안 몸을 베베 꼬며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어댔다.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모두가 신처럼 떠받드는 남자를 진지하게 재수 없어 하고 있다는 공통의 비밀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끌고 나올, 아니, 모시고 올게요.”

회의하셔야죠?

더더욱 레니스의 바람을 이루어 주고 싶어진 세라가 2층 어딘가에 있을 에녹을 찾아 몸을 빙글 돌렸을 때였다.

파삭. 별의 조각이 갈라지며 그녀가 배정받은 골방을 강조했다. 마치 저쪽으로 가면 네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듯이.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제 방문을 열어젖히자, 놀랍게도 진짜로 에녹이 그곳에 있었다. 이놈의 주인님은 좋은 방들 다 놔두고 굳이 노예의 방에서 쉬고 있는 걸까.

“생각보다 늦게 올라왔네.”

낮잠을 준비하는 고양이처럼 길게 늘어진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알은체를 해 왔다. 레니스와 주고받던 수줍은 미소를 잘라 내듯 뚝, 끊어 낸 세라가 차디찬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너 기다리고 있었지.”

왜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시답잖은 이유일 게 뻔했다. 알고 싶지 않아진 세라는 자연스럽게 에녹의 말을 못 들은 척 흘리고는 그 위로 냅다 자신의 본론을 휘갈겼다.

“손님 왔습니다.”

“예뻐?”

문장의 마침표가 끝나기도 전에, 예쁘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거의 반사 신경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럼요.”

그래서 세라도 거의 반사 신경에 가까운 속도로 그 질문을 튕겨 냈다. 물론 제 형량을 줄여 줄 귀한 사람이니 세라의 눈에 이 세상 누구보다 예뻐 보이는 사람이 맞았으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 누구지?”

그녀에게 낚인 에녹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문가에 다가왔다가.

“대장. 저예요.”

“아, 뭐야.”

세라의 뒤에서 나타난 시커먼 남자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시들었다.

예쁘다며.

질책이 담뿍 담긴 시선이 세라에게 돌아왔다.

“앗, 나의 실수. 머리가 길어서 여성분인 줄 알았지 뭐예요.”

열의가 느껴지지 않는 변명에 에녹이 깊게 한숨을 쏟아 냈다. 그는 모든 흥미를 잃은 얼굴로 문가에 기댄 채 불퉁하게 물었다.

“왜 왔어?”

“길드 자금이 새고 있어요. 누군가 잘못 움직이고 있습니다.”

레니스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왜 이렇게 열심히 뛰어왔나 했더니 과연, 돈 문제였다.

“그런데?”

세라가 생각하기에 그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에녹은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에 레니스가 답답하다는 식으로 주절주절 설명을 덧붙였다.

“대장이 보고서를 안 보셔서 그러는가 본데. 비는 금액이 제법 커요. 아무래도 조직적으로 돈을 빼내는 것 같은….”

“아닐걸.”

레니스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에녹이 덮어놓고 그의 추리가 틀렸다며 지적을 해 왔다. 여전히 별 흥미 없어 보이는 그는, 누가 들어도 대충 상대해 준다는 어조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한 놈이 전부 들고 나른 거야. 그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레니스가 불신이 잔뜩 묻어나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세라도 마찬가지로 그를 훑어보았다.

에녹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보고서를 봤으니까.”

“거짓말!”

그에 레니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제가 보고서를 놓고 간 건 어제저녁이고, 대장은 하루 온종일 외출했다가 들어와선 쭉 잠만 잤잖아요!”

듣는 둥 마는 둥 길고 긴 고함을 흘려보낸 에녹이 이걸 꼭 말로 해야 하냐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16 페이지, 18 페이지, 31 페이지, 66 페이지, 102 페이지, 283 페이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딱히 규칙이랄 것도 없는 숫자의 나열이었다.

“……?!”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레니스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짜증으로 가득 차 있던 검은 눈동자에 일순 이채가 서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돈을 빼내는 주기가 제멋대로잖아. 너는 이따위로 움직이는 조직 봤어?”

이어지는 에녹의 발언을 통해, 세라는 그가 늘어놓은 숫자들이 레니스가 두고 갔다던 그 보고서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진짜 읽었나 보네?

세라는 제법이라는 듯이 에녹을 한 번 쳐다봤다.

“그러니까 범인은 한 명. 모종의 이유로 돈을 노리다가, 생각날 때마다 있는 걸 싹 긁어 간 거야.”

잘난 척 으스댄 에녹이 어서 자신을 찬양하라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주, 대담한 놈이지.”

제 추리에 지나치게 감탄한 그는 길드 곳간을 털어 간 범인을 스스럼없이 대담하다고 칭찬했다. 그게 꼭 적수를 만났다는 표정이어서 두 배 재수 없었다.

“됐지? 해결~. 이제 꺼져.”

두 사람의 입을 닥치게 한 에녹이 파리 내쫓듯 레니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레니스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자, 잠깐!”

에녹이 다시 방 안에 들어가려 하자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일할 사람 좀 보내 주세요. 증거를 잡으려면 자료를 정리해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못 해요. 절대…….”

레니스는 이미 이런 반응 따윈 예상한 사람처럼 침착하게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왜 못 해? 네가 잠을 줄여서 일하면 되잖아?”

이렇게 열심히 일하려는 부하를 두고, 길드장이라는 인간의 태도가 더럽게 비협조적이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는 악덕 고용주 같은 말을 잘도 해 댔다.

“지금도 잠 한숨 못 자고 있는데 무슨 잠을 또 줄여요! 돈이 없어졌다고요. 돈! 파산하고 싶어요? 길바닥에 나앉고 싶은 게 아니면 사람 좀 꽂아 줘요!”

충분히 상처받을 수 있는 발언을 가볍게 흘려 넘긴 레니스가 똑 부러지게 주장했다. 일을 할 때의 그는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저토록 열정적으로 임하니 세라라도 그를 믿고 돈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장이 아무나 잡고 협박하면 되잖아요!”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조금 사고 회로가 망가진 것 같지만, 그런 점마저 자연스러워 보였다.

“웃기는 애네.”

아무나 협박해 달라는 말에 에녹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그딴 식으로 일을 해? 내 길드가 그렇게 힘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는 야만적인 조직인 줄 알아?”

거짓말. 그의 길드는 그런 조직이 맞았다. 방금 전 회의에서도 본인의 힘으로 찍어 눌러 기드온을 닥치게 하고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지 않았던가.

“그럼, 노예분이라도 빌려주세요.”

“……!”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거절당한 레니스가 지푸라기라도 내놓으라는 투로 세라를 지목한 것이다.

세상에, 정말 신이 나를 돕고 있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연달아 받은 세라가 크게 전율했다.

“레니스. 레니스. 이 눈치 없는 녀석아.”

세라를 내어달라는 요구에 에녹이 그게 되겠냐는 듯이 오만하게 웃었다.

“내가 여기 있는데 굳이 널 따라가고 싶을까?”

공주병 말기 환자 같은 발언이었으나 레니스는 미간을 찌푸리거나, 그를 재수 없어 하지 않았다.

“……저분이라면 흔쾌히 따라올 것 같은데요?”

그저 침착하게 사실만을 알려 주었다.

“벌써, 현관에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2층 난간까지 걸어 나온 에녹이 황당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레니스의 말대로 세라가 현관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줍어하는 표정이 무슨 데이트라도 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앗, 주인님!”

마침 에녹과 눈이 마주친 세라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선방을 쳤다.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아서요. 마침 제가 놀고 있으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누가 봐도 신이 잔뜩 나 있는 얼굴에 에녹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걸음에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가겠다고? 내가 여기 있는데?”

어린아이가 들어도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다.

“안 나가는 게 좋을 텐데.”

눈치껏 주인님의 곁에 남겠노라 말해야 하는 대목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세라는 가볍게 눈치 없는 척 에녹이 보여 준 해답을 넘겨 버렸다.

“저도 그건 정말 애석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슬프지 않은 주제에 잘도 애석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말끝을 길게 끌며 슬픈 듯이 미간을 모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길드 전체가 주인님의 땅이고 터전이니. 노예 된 몸으로 그곳을 지키기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수밖에요.”

언제부터 그렇게 충성스러운 노예였다고, 세라는 뻔뻔하게도 주인님의 터전이 어쩌고 하는 명분을 앞세워 레니스를 돕겠다 나섰다.

어차피 여기 있어 봤자 엉망이 된 응접실을 치우는 일이나 하겠지. 그딴 것보다는 레니스를 도와 형량을 줄이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리고 피차 서로 얼굴 맞대고 있으면 속만 터지는데 굳이 한 공간에 오래 머물 이유가? 허점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논리에 세라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에녹에게 가까이 붙어선 그녀가 한심해하는 마음이 흘러나오지 않게 주의하며 작게 속살거렸다.

“저 없는 사이에 어제 못다 한 ‘그거’ 하고 계세요.”

‘그거’가 뭔지 손짓도 같이해 줄까?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만두었다. 대신 제 말이 그렇고 그런 의미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듯 앙큼하게 깜빡 윙크를 날려 주었다.

“안 그러면 또 지랄하실 거잖아요.”

마지막 말은 안 하는 게 더 나아 보였지만, 어쨌든 둘 다 손해 볼 것 없는 일이었다. 세라는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고, 에녹은 그의 욕구를 해결하고. 그 김에 잠시 세라를 잊어 주면 더 좋고. 행여나 이틀 연속으로 에녹의 곰 인형 신세가 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뭐? 너 지금, 날 무슨 취급을 하는 거야?”

그녀의 갸륵한 충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에녹의 얼굴이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와락 구겨졌다.

이게 아닌가? 하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터프하게 레니스의 손목을 잡아챈 세라가 다급히 집을 빠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문밖에 선 세라가 언젠가 자신이 들었던 말을 흉내 내어 에녹에게 돌려주고는.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주인님!”

그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면전에서 쾅! 문을 닫아 버렸다.

“허-.”

굳건히 닫힌 문을 바라보는 연둣빛 눈동자는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크게 비틀려 있었다.

빈집에 혼자 남겨진 에녹이 허탈한 실소를 내쉬었다.

“……저런 취향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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