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책상을 비추는 조명이 전부인 어두운 방.
창문을 전부 가릴 정도로 쌓아 올린 서류의 산 너머로,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어지러운 책상 앞에 웅크린 두 사람은 제 등 뒤로 얼마나 새카만 밤이 찾아왔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로 가득한 그곳은 커다란 책상과 의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종이로 가득 차 있었다. 한번 쌓아 두면 정리를 하지 않는 탓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언제 쓰인 것인지도 모를 서류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혼돈도 몇 시간에 걸친 눈알 빠지는 노력 덕에 모두 옛말이 되어 버렸다.
“이것까지 하면 지난달까지의 자료도 전부 끝이야.”
마지막 서류를 내려놓은 세라가 침침한 눈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하루 종일 숫자를 노려보고, 그것을 옮기고, 계산하고, 지우고, 난리를 친 덕분에 새하얗던 손이 온통 잉크로 얼룩져 있었다.
“와, 세라. 너 진짜 빠르다…….”
그녀가 처리한 서류의 산을 올려다보며, 레니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혹시, 기억을 잃기 전에 너는 천재가 아니었을까?”
두 손을 꼭 모아 쥔 그는 스스럼없이 세라를 찬양했다. 그리고 솔직히, 세라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이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세라는 지난 반나절 동안 오늘 안에 끝내지 못하면 죽는 사람처럼 순식간에 일을 쳐 냈다.
“덕분에 살았어. 나 혼자 했더라면 계속 잠도 못 자고 한두 달은 꼬박 일만 했을 거야.”
마치 제 일처럼 열심히 임해 준 세라를 향해 레니스가 친근한 말투로 감사를 표했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지만, 오늘도 격무에 시달린 탓인지 오전보다 다크서클이 훨씬 짙어진 모습이다.
“맨날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
세라와 함께 차곡차곡 정리한 자료들을 둘러본 레니스가 꿈결 속에 있는 것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하루 종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한 두 사람은 짧은 사이에 가까워졌다. 음침하고 음울해 보이는 외양과는 다르게, 레니스는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점도 그러했고,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점도 그러했고, 무엇보다 빈둥거리는 태도로 사람 열받게 하는 에녹 소서를 재수 없어 한다는 점이 그러했다.
세라가 에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니스는 드디어 말할 상대를 찾은 사람처럼 그동안 혼자 앓고 있던 불만을 쉴새 없이 늘어놓았다.
“대장이 세라의 반만 부지런했어도…….”
대부분이 에녹에 대한 뒷담화로, 무척 듣기 좋았다.
특히 어떨 때는 너무 짜증 나서 진지하게 독살을 고민했던 적도 있다는 대목에서는 기립 박수를 칠 뻔했다.
“무슨 소리야.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하여 세라는 안 그래도 예뻐 보이던 레니스가 더 더더욱이 예뻐 보였다.
“친구…….”
그 어감이 마음에 드는지 레니스가 그녀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수줍게 뺨을 붉힌 그는 세라에게 갓 따른 물잔을 건네주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지라 기꺼이 받아 마셨다.
“많이 피곤하지? 돌아가면 대장한테 뽀뽀 한 번만 해 달라고 해.”
“푸웁!”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고스란히 뿜어냈다.
“케헥, 켁, 케흑, 뭐, 뭐라고?”
격한 기침을 토해 낸 세라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레니스가 에녹한테 뽀뽀 어쩌고 한 게 맞나? 딱 그렇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대장이랑 뽀뽀 한 방 갈기라고.”
그러나 레니스의 대답은 그대로였다. 심지어 단어가 좀 더 강해졌다.
“싫어! 내가 왜!”
쾅! 책상을 내려친 세라가 빼액 소리쳤다. 질색을 하는 그녀를 두고, 레니스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피로 회복도 되고 좋을걸?”
“……?”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에, 세라의 고개가 덩달아 기울어졌다. 그녀와 같은 각도가 된 게 좋은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인 레니스가 음울하게 말을 이었다.
“가끔 일하다 죽을 것 같을 땐, 나도 대장한테 볼 뽀뽀라도 해 달라고 빌거든.”
“……?!”
파격적인 고백에 세라가 정말 뽀뽀를 받았냐는 듯이 깜짝 놀랐다가.
“물론. 대장은 여자가 아니면 손끝도 스치기 싫다며 거절하지만.”
“휴우…….”
다음 순간, 안도했다가.
“치사하게.”
“…….”
마지막에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저은 레니스는 진심으로 불공평하다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에녹을 철저하게 자양강장제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아서, 세라는 정말 치사한 놈은 네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입에 담아 레니스의 기분을 망치지 않았다.
“그러게, 치사하네. 그럼 남자는 아무리 크게 다쳐도 안 도와주겠네?”
대신에 그의 감정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형량을 깎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장단 맞추기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세라는 스스로가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때는 어차피 남자고 여자고 소용없을걸.”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레니스는 한층 더 우울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장이랑 닿으면 성검의 기운 때문에 피로나 좀 풀리고, 까진 상처가 낫는 정도지. 대단한 병이나 부상을 회복시켜 주고 그렇지는 않아…….”
겨우 그 정도인데.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나한테는 안 해 주니까 치사한 거지. 레니스는 그동안 쌓인 불만을 쉬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으음…….”
세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저기에다 대고 ‘알고 있어.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상처를 치료해 봤기 때문이지.’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이걸 봐.”
그때, 그동안에도 일을 멈추지 않던 레니스가 열심히 정리해 둔 서류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동안 사라진 자금을 전부 합쳐 보면 3750골드나 돼. 이 정도면 웬만한 상단 하나는 거뜬히 꾸리고도 남을 돈이야.”
“엥?! 그 많은 돈을 다 어디에 숨겼대?”
생각보다 심각한 횡령 규모에 세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돈이 샌다는 소식은 고금을 막론하고 가슴에 불을 지르는 말이었다.
“대충 아무 데나 처박아 뒀을걸? 우리 길드는 화폐 단위가 높아서, 이 정도면 그리 부피가 크지도 않아.”
한, 이 정도?
정말로 그게 궁금해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아니, 애초에 질문이 아니었는데, 레니스는 그마저도 진지하게 대답해 줬다.
“와. 그거 참. 유용한. 정보다.”
가까스로 맞장구를 친 세라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몇 명 의심 가는 사람은 있어.”
원래도 증거가 필요했을 뿐, 의심은 계속하고 있었는지. 레니스는 망설이지도 않고 용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내려갔다.
“일단 다른 일 때문에 방문한 척하면서, 반응을 떠봐야겠어.”
명단을 완성한 그는 벌써부터 동선을 그리듯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 갈 거지? 같이 가 줄게. 빨리 빨리 해치워 버리자.”
세라가 선뜻 남은 일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진짜? 도와주면 나야 고맙지!”
내심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레니스가 기쁜 얼굴로 그 제안을 받았다가.
“근데, 세라 아까부터 다리를 왜 이렇게 떨어?”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3일. 3일 안에 해치우자. 그게 좋겠어.”
쿵, 쿵, 쿵, 쿵. 그의 지적을 받는 그 순간에도 세라는 다리를 떨고 있었다. 언제든지 튀어 나갈 듯이 의자 끝에 걸터앉은 채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꼴은 당장 해결해야 하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구체적이면서도 빡빡한 일정에 레니스가 자신이 작성한 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이름들은 아무리 봐도 3일 안에 해내기 어려운 업무량이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못해도 일주일은 필요한데.”
“……아니. 꼭 그 안에 해치워야 돼.”
은근슬쩍 그 일정으로는 무리라고 운을 띄워 봤지만, 세라는 단호했다. 그러면서 앉아 있는 의자에서 조금 더 옆으로 옮겨 거의 떨어지기 직전까지 미끄러졌다.
“꼭. 반드시. 3일 안에 하자. 보름달이 뜨기 전에.”
“굳이 3일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점점 구체적으로 재촉하는 세라에게, 레니스가 이유를 캐물었다.
“그냥……. 빠를수록 좋잖아.”
그래야 너도 쉬지.
병적으로 3일에 집착하던 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였다.
“알았어. 열심히 해 볼게. 우, 우린 친구니까.”
못 한다고 드러누워도 됐을 텐데. 우리의 충실한 일개미 레니스는 3일도 좋다며 웃었다. 그 미소가 레니스 답지 않게 보송보송하고 밝았다.
“그래. 열심히 하자.”
아니, 열심히 하지 마. 절대. 절대절대절대절대.
함께 각오를 다진 세라는 마음속으로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니스에게 향하던 시선을 떨군 세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를 바라본다.
레니스가 보기에는 불편하고 이상한 자세로 걸터앉은 세라만 보이겠지만, 별의 조각이 박힌 그녀의 눈에는 레니스가 볼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생생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바닥을 굴러다니는 깃펜, 넘어진 잉크병, 쓰러진 서류들, 그 위에 엎어진 긴 머리의 남성과 그를 내려다보는 에녹 소서 같은 것.
환한 보름달을 등진 에녹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남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아, 진짜로 자지 말고 일하란 이야긴 아니었는데…….’
보는 사람이 다 아찔해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세라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웅얼거렸다.
3일 안에 전부 해치워 버리자.
안 그러면 너 죽어.
과로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