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레니스.
시그너스 길드의 재무 담당자이자 유일한 행정관.
창백하고, 음침하고, 뒤로 으스스한 음모나 꾸밀 것 같은 외견과는 다르게 실상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가성비가 좋은 참된 일꾼.
길드가 완전히 자리 잡은 지금이야 매일 새로운 보고서가 필요한 재무 담당자의 업무만을 맡고 있지만, 시그너스가 막 결성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가진 직함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재무 담당자, 수석 행정관, 사법 집행자, 입법관, 도시 계획가 그 외 기타등등…….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을 하나로 끌어모은 게 에녹 소서의 명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은 레니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그너스 길드에 소속된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도시가 처음부터 완벽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뒤에는 레니스가 수명을 깎아 가며 지새운 수많은 불면의 밤들이 깔려 있었다.
워낙 조용하고,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 성격 탓에 아무도 그 노고를 몰라주는 것 같지만, 별의 조각을 통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과거를 들여다본 세라는 알았다.
레니스는 바보였다.
일밖에 모르는 바보.
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길드를 위해 헌신한 그 바보는 그동안 쌓인 피로로 인해 3일 뒤 죽을 운명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쓸쓸하게.
유일한 행정관을 잃은 시그너스 길드는 새로운 관리자를 뽑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점점 현재의 청결하고 정갈한 외관을 잃어버리게 된다. 거리에는 이전에 없던 악취와 오물들이 넘치고, 더러운 냄새에 이끌려 쥐와 각종 해충이 하수구에 터를 잡아 안 그래도 집단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약도 구하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을…….
‘멸망!’
그리하여 세계는 또 한 번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멸망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세라를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불지옥으로 떨어뜨리고서 말이다…….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레니스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저 일에 미친 일개미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요 며칠 그의 골치를 썩이는 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레니스가 추려 낸 목록 속의 인물들을 모조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
촤아악!
문이 열림과 동시에 물벼락이 세라에게 퍼부어졌다. 오늘만 해도 벌써 열 번째. 세라는 지옥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물을 원 없이 맞는 중이었다.
“안타레스를 내 집에 데리고 와?! 너 제정신이야?!”
물이 들어가 먹먹한 귓가로 화가 잔뜩 난 고함이 파고들었다. 씩씩대며 레니스를 향해 욕설을 쏟아 낸 상대가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어떻게든 레니스를 도와 그를 구해 내겠다는 갸륵한 계획에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이곳 사람들이 세라의 생각보다 훨씬 더 면역자에 대한 거부 반응이 거세다는 거였다.
“세, 세라……. 괜찮아?”
그 덕에 덩달아 함께 고생 중인 레니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뚝뚝 흘러내리는 물을 대충 훑어 낸 세라가 웃는 낯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완전 괜찮아. 시원하고 좋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몰골이 아니었고, 시원하고 좋다는 말은 정신 빠진 개소리였지만, 이런 개소리도 열 번쯤 내뱉고 있으니 말이 되는 것도 같았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대접을 받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안 그래도 몸 둘 바를 모르던 레니스가 한층 더 쩔쩔매는 어조로 웅얼거렸다.
“미안……. 원래는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순한 사람인데.”
순한 사람 다 죽었냐.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속마음을 내리누른 세라가 자꾸만 땅을 파고 들어가려는 레니스를 달래 주었다.
“네가 왜 미안해. 물은 저 새…. 아니, 저 사람이 뿌린 건데.”
그러면서도 뾰족한 시선으로 굳게 닫힌 문 너머를 노려봐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력 회로만 멀쩡했어도…….”
목소리를 낮춘 세라가 오늘만 해도 수도 없이 읊어댄 혼잣말을 짓씹었다.
레니스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양처럼 굴고 있지만, 저녁 내내 욕과 물세례를 뒤집어쓴 그녀는 몹시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이 빌어먹을 길드 놈들은 세라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그녀만 보면 더럽다느니, 악마 새끼라느니, 죽어 버리라느니 하는 심한 욕을 서슴지 않았다.
간만에 들어 보는 욕설에 절로 옛날 생각도 나고 아주 좋았다.
보다 못한 레니스가 중간에서 그녀의 무해함을 설명하려 했으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변명을 늘어놓을수록 세라의 편을 들어주는 레니스를 싸잡아 욕했다.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그런데도 레니스는 끝까지 스스로를 탓했다. 이미 하도 물어뜯어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을 재차 물어뜯는 모습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데. 도와주겠다는 말이 너무 유혹적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
……가, 이 사달이 날 줄 알고 있었다는 말에 겨우 고개를 들이밀었던 동정심이 바람과 함께 날아갔다.
“미안해. 정말 미안. 그, 그래도 우리 여전히 친구지?”
소심하게 다가온 레니스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세라의 옷깃을 붙잡는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녀의 기분을 살피는 눈동자에는 선명한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간만에 손에 들어온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당연하지. 물이 아니라 불이 날아온다고 해도 도와줬을 거야.”
안 그러면 영원히 지옥행이거든.
그 선명하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욕망은 세라의 마음을 가뿐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얼굴을 훔쳐 낸 세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레니스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가 뚜렷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 이들은 적어도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뒤통수를 치지 않으니까.
“저, 정말……?”
그녀의 진심을 느꼈는지 레니스가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감격스러운 얼굴을 했다.
“응. 정말.”
확답을 바라는 듯한 그 태도에 세라는 기꺼이 원하는 답을 돌려주었다.
농담이 아니라, 세라는 레니스가 대놓고 널 부려 먹겠다고 했어도 지금처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아, 진짜 밤을 새우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지금도 세라의 등 뒤에는 책상 위에 엎어져 죽은 레니스와 그를 내려다보는 무책임한 에녹 소서가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 진짜 밤을 새우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눈치 없는 에녹 소서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저 짜증 나는 입을 닥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세라는 힘을 내야 했다.
“그래도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어. 해가 다 지기도 했고. 또……. 너무 추워 보이니까.”
아직도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세라를 눈짓한 레니스가 이만 돌아가자며 그녀의 옷깃을 또 꾹 잡아끌었다. 걱정이 담뿍 묻어 나오는 말에 세라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옷이라도 벗어 주면서 해야 하는 거 아냐?”
그에 레니스가 애처롭게 몸을 웅크렸다.
“미안. 나도 추워서…….”
“…….”
그녀에게 빼앗길세라 제 가슴팍을 움켜쥐는 손길이 퍽 야무졌다. 안 그러는 척 실제로는 제 밥그릇을 열심히 지키는 앙큼함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다.
“호. 호. 호. 농담이야.”
그것을 대범하게 웃어넘긴 세라가 자연스럽게 말길을 돌렸다.
“정말 나 하나로 괜찮겠어? 이대로면 내일이 되어도 똑같을 것 같은데.”
“내가 밤새 범인을 좁힐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
내심 반가운 주제였는지 레니스가 얼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아! 정말 죽어 버릴 줄은 몰랐는데!’
그 순간, 이건 아니라고 눈치라도 주듯이 등 뒤의 에녹이 소리 높여 레니스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신의 뜻을 알아들은 세라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레니스에게 맡겨 두었다가는, 또 제 수명을 갈아 넣겠다는 말이나 해 댈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세라는 아까부터 머릿속 한구석을 맴도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 버리고 말았다.
“그러지 말고, 주인님한테 범인이 누군지 물어보는 건 어때? 아까 보니까 대충 눈치챈 게 있는 모양이던데.”
그 생각이란 결국 에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물론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세라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으음, 그러면 안 돼.”
하지만 레니스는 그렇지 않았는지 난색을 표했다.
“대장은 다른 누군가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아.”
“왜?”
“자기 일이 아니니까?”
뭐지. 저 치사한 이유는.
세라는 이상한 곳에서 쩨쩨하게 구는 영웅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 음. 그래. 재정 담당자가 너인 건 아는데. 부하가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하고 있으면 좀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본인한테는 별 어려운 문제도 아닌 것 같던데.”
명색에 영웅이라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세라가 입에 담기에는 상당히 모범적인 말이었으나, 그녀가 알고 있던 에녹 소서는 그런 영웅이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면 발작하는, 더럽게 착한 척하는 놈.
“이러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랬던 놈이, 중요한 인재가 죽어 나가게 생겼는데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고 있다는 게 원통했다. 필요 없을 때에는 온 세상 사람 다 구해줄 것처럼 굴면서 세라의 심장에 부득불 성검을 꽂아 넣더니. 필요할 때에는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냔 말이다.
자기를 위해 화를 내는 모습이 기뻤는지 레니스가 음산하게 웃으며 몸을 비비 꼬았다.
“그거야말로 대장한테는 아무래도 좋을걸.”
“……?”
“그 사람이 지켜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거든.”
“에엥?”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결코 웃으면서 할 만큼 가볍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 몇 죽는다고 세상은 잘못되지 않으니까. 대장한테는 그리 급한 문제로 보이지 않을 거야. 우리도 매번 대장에게 의지하면 아무것도 해결 못 하는 멍청이가 될 테니까. 이 정도는 스스로 해봐야지.”
그래도 대장이라고, 레니스는 어떻게든 에녹의 행동을 정당화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가끔 내가 고생하는 걸 구경하러 올 때나, 자기 혼자 희희낙락 뒹구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독살해 버리고 싶지만, 어쨌든…….”
뒤따라오는 말은 정말 에녹을 두둔하는 건지 어떤지 애매했지만 어쨌든 그래 보였다.
“난 대장을 조, 조, 조, 조.”
힘겹게 말을 이은 레니스가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 심각하게 말을 더듬었다.
“존……경, 해애…….”
어찌어찌 에녹에 대한 존경심을 쥐어짜 낸 레니스가 토할 것 같다는 얼굴로 땀을 훔쳤다.
“아아, 갑자기 현기증이…….”
불안하게 숨을 색색거리던 그는 어느새 성큼 가까워진 에녹의 집을 발견하고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어……?”
그 반가운 목소리는 금세 의문형으로 바뀌었다.
뭘 봤길래 저래?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세라가 곧 엑,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현관에 기댄 채 누군가와 진한 입맞춤을 주고받는 에녹이었다.
주변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엎치락뒤치락 입맞춤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어떻게 보아도 방금 한판 뒹굴다 나온 연인처럼 끈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허, 참. 그새를 못 참고…….”
제 대장의 문란한 사생활이 부끄러웠는지, 크게 헛기침을 한 레니스가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가면 좀 민망하니까. 잠깐 다른 곳에 있다가-.”
절대 저 틈에 끼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한 레니스가 세라를 데리고 스리슬쩍 사라지려고 했다.
“어어?”
그 순간 여자와 떨어진 에녹이 무언가를 건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잠깐만……?”
에녹이 여자에게 넘겨주는 물건을 바라본 세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짤랑. 여자가 그것을 넘겨받는 순간, 금속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그에 두 사람의 귀가 쫑긋 섰다.
이건, 멀리서 들어도 돈 소리였고.
저건, 멀리서 봐도 돈주머니가 분명했다.
그것도 꽤 큰.
굳이 콕 집어 설명하자면, 사라진 3750골드를 담는다면 딱 알맞겠다 싶은 정도의.
“레니스. 혹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완벽하게 들어맞는 톱니바퀴에, 세라가 오묘한 표정으로 레니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같은 광경을 목격 중인 레니스의 시선은 이미 한겨울 북풍보다도 차디찼다.
“저 새끼가……?”
그건, 방금 전까지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한 줌의 존경심마저 사라진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