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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26화 (26/131)

#26

“동작 그만.”

음산한 경고가 공간을 가른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레니스의 그 한마디는 멀찍이 떨어진 에녹과 여자의 귀에 꽂혀 들기에 충분했다.

“어머, 레니스……?”

뒤늦게 레니스를 발견한 여자가 건네받으려던 손을 물리며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꼭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이제 와?”

반면, 에녹은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태평하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주인님…….”

그 극명한 대비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세라였다. 의식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마저 집어치운 그녀가 물을 뚝뚝 흘리며 에녹과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진짜 면역자가 있었네…….”

저돌적인 접근에 여자가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은근슬쩍 에녹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불청객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 갈게.”

그렇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여자가 다급한 몸짓으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딜! 거기 안 서?!”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는 세라가 빠르게 달려가 도망치는 공범을 잡아 세웠다.

“으앗!”

…세우려고 했다.

에녹이 자신을 지나치려는 세라의 허리를 틀어쥐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왜 쫓아가? 너 쟤 알아?”

세라를 붙잡은 에녹이 뾰로통하게 물었다. 말이 의문문이지 태도는 거의 뭐 시비를 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지 애인이라고 감싸 주는 거야. 뭐야.

“하!”

잘못은 지가 한 주제에 왜 이렇게 당당하지? 빈정이 상해 버린 세라가 소리 내어 헛웃음을 뱉었다.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에요?”

“…….”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주인님은 그런 노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모습이 세라의 눈에는 어떤 변명을 늘어놓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세라는 에녹이 거짓말을 지어낼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뭐 하고 있었냐니까!”

“질투해?”

그리하여 한 번 더 따져 묻는데, 세라의 목소리 위로 에녹의 말이 겹쳤다.

“허어?”

설마 저딴 말이 첫마디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세라가 제정신이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웃기는 애네.”

그 표정을 마주한 에녹도 비슷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진짜 기가 막힌 사람이 누군데, 에녹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삐딱한 자세를 하고선 투덜거렸다.

“거절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비스듬히 웃으며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이 앙칼졌다.

“날 두고 저런 음침한 녀석을 택한 건 너잖아.”

그는 진심으로 세라가 자신과 눈앞의 여인과의 관계를 질투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재미는 좀 보셨고?”

하지만 왜 말과는 달리 질투는 이쪽이 하고 있는 듯이 구는 걸까. 세라는 문제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에녹을 짜증스럽게 노려봤다.

“……할 말이 그게 다예요?”

뜨악한 표정을 지은 세라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진짜, 뭐, 느끼는 바가 없어요? 지금 이 상황? 이 구도? 이 타이밍?”

에녹과 자신을 번갈아 쳐다본 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정말 나를 보고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거야? 누가 봐도 수상한 돈주머니를 애인한테 몰래 건네다 걸렸는데도? 하루 종일 사라진 자금의 행방을 캐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온 나에게? 그러느라 물을 왕창 뒤집어쓴 나에게?

할 수만 있다면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며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세라가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었던 탓이다.

“…….”

그녀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모르는 에녹만이 느긋이 말을 고르다가.

“젖었네. 흠뻑.”

가까이 몸을 굽혀 눈에 보이는 것을 세라의 귓가에 읊어 주었다. 담백하기 그지없는 말투였음에도, 속삭이는 숨결에 녹아든 은밀함이 여린 살갗을 핥고 지나갔다.

“……!”

그 순간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세라가 흠칫 어깨를 움츠리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방어적인 반응을 코끝으로 내려다보던 에녹이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게, 나가지 말라니까.”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선택하니까 그런 꼴을 당하잖아.

의도가 다분한 장난질을 걸어 놓고도, 에녹은 그런 적 없는 사람처럼 새침하게 웃었다.

“…….”

미간을 찌푸린 세라가 신경질적으로 귓가에 남은 여운을 털어 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에녹과 말을 섞지 않는 게 현명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지. 결단을 내린 세라가 에녹의 손에 들린 돈주머니를 빼앗듯이 가로챈 것도 그즈음이었다.

“물건 확인 좀 할게요. 괜찮죠?”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 꽉 닫힌 주머니의 입구를 활짝 벌렸다.

그러자 역시나, 빈틈없이 들어 있는 금화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는 안 세어 봐도 이 주머니 안에 금화가 얼마나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대장.”

어깨 너머로 그 번쩍이는 광채와 마주한 레니스가 유령처럼 걸어와 세라와 나란히 섰다.

“어디서 난 돈이에요?”

배당금을 모았다기엔 너무 많은데.

차분하게 물어 오는 레니스의 주변은 숫제 검은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처럼 우중충했다.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허연 몰골이 보이지도 않는지, 어깨를 으쓱한 에녹이 세라의 손에서 돈주머니를 가로챘다.

그것을 제 혁대에 잘 묶어 둔 그는 바로 다음 순간 기어코 레니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넣었다.

“금고에서 가져왔는데?”

“……!”

“……?!”

그 모습을 마주하는 두 사람이 허, 하고 입을 반쯤 벌렸다. 대체 세상 어느 도둑놈이 저토록 당당하다 못해 뻔뻔스럽게 범행을 자수할까.

“본인이 훔쳐 놓고 왜 아닌 척 사람을 고생시켰어요. 그럼?”

그 당당함에 화를 낼 정신도 빼앗긴 세라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

에녹은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어투로 대꾸했다.

“세상 어느 범인이 그렇게 쉽게 자수해. 내가 바보야?”

그래. 너는 바보가 아니지.

바보는 범인을 앞에 두고도 의심조차 하지 못한 둘이었다.

결국, 세라도 레니스도 하루 종일 헛수고만 한 꼴이었다. 설마 길드장이 자금을 가로채고 있을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그런 주제에, 통찰력이 뭐가 어쩌고 어째?

곱씹을수록 괘씸한 에녹의 행동에 세라의 분노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까 도와주는 척 힌트 줄 때 양심도 안 아팠어요?”

“말했잖아.”

구차하게 연극이나 해 대던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라고 한 말이었건만, 에녹은 칭찬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

“범인은 대담한 놈이라니까?”

“비열한 놈이겠지!”

세라가 감히 스스로를 높이는 도둑놈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이딴 장난질 때문에 자신의 형량이 늘어날 뻔했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다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개같이 굴려도 정도가 있지! 부하가 몇 날 며칠을 밤새 가면서 구르고 있는데, 대장이라는 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더 고생을 시켜?! 레니스가 너 때문에 얼마나-.”

“세라.”

그때, 누군가 어깨를 붙잡으며 그녀를 말렸다.

“난 괜찮아.”

세라를 진정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레니스였다.

결과적으로 대놓고 농락당한 꼴이 되어 버렸는데도 말이다. 으이구, 이 바보. 이러니까 괜히 남 좋은 일만 해 주다가 과로사나 당하는 거지! 제가 다 울컥한 세라가 레니스의 손을 탁, 쳐 내며 그를 돌아봤다가.

“이 바보야! 괜찮긴 뭐가 괜찮, 어머.”

뀨우우우…….

여한이 없다는 듯이 유유히 사라지는 검은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엉?”

놀라운 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레니스의 집을 나온 내내 세라를 쫓아다니던 지긋지긋한 환영도 그 덩어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팔뚝이 뜨거워진다.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시선을 내리니, 빠르게 줄어든 형량이 여봐란듯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501,932,781.

뭘 대단히 한 것도 없는데, 세라의 형량이 그새 이백만 년이나 깎여 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을 구하고 벌써 삼백만 년의 형량을 깎아 낸 것이다.

삼백만……!

만 하루 만에 달성한 그 결과에 세라의 두 눈이 번뜩였다. 여전히 총량에 비해서는 터무니없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기간을 생각한다면 미친 효율이다. 이대로만 쭉쭉 깎아 낸다면, 1년도 지나지 않아 형량을 전부 깎고 환생할 수 있는 수치였다.

‘세상에, 너무 좋잖아!’

소리 없는 전율이 세라를 훑고 지나갔다.

“괜찮아. 나 대신 화내 줘서 고마워.”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세라를 단단히 오해한 레니스가 한 번 더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이야기할게.”

그러고는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앞으로 나섰다.

“어, 어어……. 그럴래?”

급격히 온순해진 세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녀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진흙탕 같은 남의 길드 돈 문제에 개입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못 이기는 척 레니스의 뒤로 자리를 옮긴 그녀가 자꾸만 벙긋 벌어지려고 하는 입가를 관리하느라 애썼다.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 세라 로젠바움의 기분은 가히 최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 훔쳐 간 돈 돌려줘. 이 도둑놈의 새끼야!”

비록, 중간 따윈 없는 급발진에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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