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장에서 단숨에 도둑의 아들이 된 에녹이 어쭈, 하는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싫은데?”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법한 유치한 대답에 강 건너 불구경하던 중인 세라가 어우, 하고 한심하다는 듯이 야유를 보냈다.
“내 손에 들어왔으면 내 돈이지.”
그게 싫었으면 관리를 잘하시던가? 뺏긴 놈이 멍청한 거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은 고고하게 턱 끝을 치켜든 채 훔친 사람이 임자라는 다소 악당 같은 논리를 들이밀었다. 저런 놈이 영웅이라니. 세상이 말세긴 말세인 모양이었다.
“배당금을 그따위로 많이 받아 처먹으면서 또 무슨 돈이 필요한데요?”
“네 알 바 아닐걸.”
“뻔하지. 또 애인들한테 헤프게 뿌렸겠죠.”
호구처럼. 여자에 미친 새끼.
세라는 혼잣말인 척 물 흐르듯이 에녹을 비난하는 레니스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얌전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이라고, 겉보기엔 더없이 침착한 낯을 하고서는 입을 여는 족족 에녹의 양심을 후벼 파는 발언을 일삼았다.
“야.”
찔렸는지, 듣다 못한 에녹이 작작하라는 투로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애인에게 돈을 빼돌리다 걸린 못난 대장임을 걸린 시점에서, 그가 세울 수 있는 권위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놈도 대장이라고. 내심 존경하고 있던 내가 미친 새끼였지…….”
그때, 음울하게 울려 퍼지는 레니스의 한마디가 모두의 귓가에 똑똑히 꽂혀 들었다.
“존……?”
이번 말은 에녹에게도 충격적이었는지.
내내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놀란 표정으로 레니스를 바라보았다.
“뭐야. 무슨 개소리야. 네가 언제부터 날 존…했다고. 너 뭐 큰 병 걸렸어?”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팩 찌푸린 그가 수상하다는 어조로 레니스를 다그쳤다. 얼마나 놀랐으면 그는 차마 제 입으로 ‘존경’이라는 쉬운 말을 내뱉지도 못했다.
하지만 고개를 모로 돌린 레니스는 끝까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입술을 꽉 짓씹은 채 먼 곳을 노려보고 있는 레니스의 옆모습을 진심으로 에녹에게 실망한 사람처럼 보였다.
“…….”
하지만 세라는 보았다.
레니스에게 정신이 팔린 에녹의 시야 아래로, 돈주머니를 노리고 뻗어 나가는 살쾡이 같은 손길을.
‘끝났네.’
이제 와서 피하기엔 늦었으므로, 세라는 이 웃기지도 않은 사태가 레니스의 승리로 끝이 나리라 확신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콰아아앙-!
“……!”
어마어마한 폭발의 여파로 세라의 몸이 종이비행기처럼 휙 날아가 버렸다. 몇 차례 시야가 뒤집히고, 땅바닥을 맹렬하게 구르다가 겨우 멈췄을 때에는-.
“정신 차렸으면 일어서.”
에녹의 품속이었다.
그는 방금 전의 폭발 속에서도 먼지 한 줌 안 마신 것처럼 쌩쌩한 얼굴이었다.
“……흐으-. 콜록, 콜록.”
반면, 세라는 무슨 일이냐 물으려다가, 입 안 가득 들어오는 흙먼지에 놀라 기침하는 게 고작이었다. 자꾸만 빙빙 도는 시야를 억지로 붙잡은 세라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부우우우-.
그때, 멀리서 뱃고동을 닮은 둔중한 경보가 울렸다.
“면역자다! 안타레스의 습격이야!”
“서쪽 방벽이 무너졌어!”
“전투 인원은 서쪽으로! 민간인들은 안전지대로 대피해!”
뒤이어 소란스러운 고함이 뒤따랐다.
안타레스? 그 원수 같은 놈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왔다고?
어렴풋이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한 세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일어나 앉았다.
또렷해진 시야 너머로 비친 세상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도로가 온통 뒤집혀 시커먼 흙바닥을 그대로 내보였다. 푸르른 초목을 드리우던 나무는 허리가 부러진 채 불이 붙어 있었고, 폭발로 무너진 건물 사이사이 검은 연기가 끝도 없이 치솟아 올랐다.
그곳에 평화롭고, 활기찬 시그너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말로는 어떻게 된 일이냐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둘러싼 이 공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상이 부서지는 꺼림칙한 괴리.
공기 중을 떠도는 팽팽한 긴장감.
전쟁이다.
“……!”
그 현실을 깨달은 순간.
세라의 뒷덜미를 타고 차가운 소름이 돋아났다. 목 줄기를 옭아맨 죽음의 긴장감이 팽팽히 일어섰다.
“뭐, 일상이지.”
에녹은 그 황폐한 이름에 감히 일상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였다.
콰과광! 콰광!
겨우 소란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방금 전의 폭발이 길드 전반에 걸쳐 무작위로 일어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저 멀리 외곽이 난리였다. 연달아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땅이 신음을 내지르듯 바르르 울렸다.
“하, 그래. 이번엔 왜 이렇게 안 오나 했지.”
이젠 포기한 줄 알았는데…….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린 에녹이 낮게 투덜거렸다. 있는 대로 구겨진 미간은 전쟁이 아니라 귀찮은 시비라도 털린 사람 같아 보였다.
“레니스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 에녹이 짤막한 전언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가기 싫은 사람처럼 미적거리면서도 걸음은 충실하게 폭음이 울리는 방향을 향했다.
무기 하나 없이, 괜찮은 건가?
상의조차 입지 않은 상태로 떠나는 뒷모습에 아주 잠깐, 걱정처럼 보이는 의문이 떠올랐다.
“꺄아아악!”
“사람 살려!”
“어서, 어서 대피를!”
하지만 그 걱정은 지척에서 들려오는 폭발과 비명에 묻혀 금방 휘발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세라는 망설이지 않고 에녹 소서를 걱정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알 게 뭐야. 내가 죽게 생겼는데.’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기껏 깎은 삼백만 년의 형량이 헛되지 않게, 제 목숨 하나 잘 보전하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근심을 털어 낸 세라가 잽싸게 저 멀리 나뒹굴고 있는 레니스를 향해 달려갔다.
“레니스, 정신 차려!”
찰싹. 찰싹. 뺨을 후려치니 힘없이 늘어져 있던 레니스가 입술을 들썩거렸다.
“으, 흐으, 세, 라아…….”
겨우 정신을 차린 레니스가 애처로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도, ……았어.”
세라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가 무언가를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돈, 못 돌려, 받았다고오…….”
“…….”
무슨 말을 이렇게 열심히 하나 했더니.
건물이 무너지고, 비명이 판을 치는 이 와중에도 돈을 돌려받지 못한 게 한이 된 모양이었다.
“지금 죽게 생겼는데 돈이 문제야…?”
목숨부터 챙겨. 돈은 그다음이야.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그를 따끔히 혼낸 세라가 잡고 일어서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아…. 알겠어어…….”
선택의 여지가 없던 레니스는 빼앗긴 돈을 단념하며, 세라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윽!”
그러다 두 발이 전부 땅을 디뎠을 때,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아마도 방금 전의 폭발에 휩쓸렸을 때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었다.
콰광! 그와 부상을 기념하듯, 세라와 레니스의 뒤편으로 또 한차례 폭발이 일어났다.
“아아…. 복구 비용은 또 어디서 구하지…….”
과자처럼 부서지는 건물들을 바라본 레니스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에 세라가 한 충고가 무색하게도 눈앞에서 날아가는 예산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영 착잡한 눈치였다.
“잘나신 주인님이 벌어 오겠지. 레니스, 저쪽으로 가야 하니까 나 잡고 잘 따라와.”
그 정도의 상실감은 눈치껏 모른 척해 준 세라가 레니스의 팔을 어깨에 척 둘러메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기억을 더듬어 서쪽 장벽과 반대로 걸어가니, 거리에 대피를 위해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피 인원은 저쪽에서 명부를 작성해 주세요!”
“부상자는 이쪽으로 데려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 무기를 챙겨 든 인원들이 열심히 상황을 정돈하고 있었다.
그 인력이 상당히 모자라 보였지만, 대피해 온 민간인들이 하나같이 침착하게 그 말에 따르고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은근히 침착해 보이네?”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그런 걸까.
세라는 대피 지역에 모여 있는 이들이 생각보다 안타레스교의 습격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상자를 다루는 쪽의 분위기는 확실히 무거웠지만, 그 외에 단순히 대피해 온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수다를 떨거나, 누군가가 구해 온 음식을 나눠 먹는 등 소풍이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침착해 보여…?”
그에 레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가까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남자들을 눈짓했다.
폐허를 비추는 석양을 바라보며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둘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동화 속 주인공 같아 보였다.
“허허허! 집도 안 무너진 게 어디서 까불어!”
“잘됐지. 뭐! 이번 집은 욕실이 좁아서 불만이라고 했잖아!”
“맞아. 없어진 김에 이번엔 욕실 좀 크게 만들어야겠네!”
“그렇다고 너무 튼튼하게 짓지는 말구! 어차피 또 무너질 테니까!”
“허허허허!”
“하하하하!”
하지만 보기만 좋았을 뿐,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온통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차피 또 무너질 테니 튼튼하게 짓지 말라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저들은 그 말이 마치 재미있는 농담인 양 웃고 있었지만, 세라는 호탕한 웃음 저편에 숨어 있는 지긋지긋한 염증을 느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다들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있는 거지…….”
세라의 표정이 바뀐 것을 확인한 레니스가, 언뜻 괜찮아 보이는 길드원들의 속내를 대변해 주었다.
“안타레스교 놈들이…. 그렇게 자주 쳐들어와?”
멋쩍게 뺨을 긁적인 세라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딱히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물어봐야 할 만큼 중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괜히 제 눈이 보라색이라는 사실 때문에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음……. 심할 때는 한 달에 두어 번?”
성실하게 횟수를 헤아려 준 레니스 덕에 세라는 저 혼자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그래도 최근 몇 달간은 조용해서 기습은 포기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크게 하려고 늦었구나…….
안타레스교의 이야기를 하자, 레니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우울해져 갔다.
축축한 눈으로 저 멀리 부서진 도시를 바라본 그가 아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하아…….”
그러다 또 돈 생각이 났는지 깊게 한숨을 내쉰다.
“하아아아…….”
세라에게서는 그보다 더 깊고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물론 돈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이 되어서.
‘이러니까 어딜 가도 그 구박을 받았지…….’
무식할 정도로 막무가내인 습격의 현장을 돌아보며, 세라는 사람들이 그녀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이유를 그제야 완전하게 이해했다.
세상에 시커먼 철탑을 떨어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겨우 마련한 터전까지 폐허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녀가 이곳 사람들이어도 증오스러울 것 같았다.
앞으로는 아예 얼굴을 가리고 다닐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세라는 그보다 먼저 슬슬 무거워지는 레니스부터 처리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