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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29화 (29/131)

#29

“……으응.”

…정작 나는 무서워서 못 했던 일이었는데.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 레니스가 얼른 아이를 건네받았다.

“킁.”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레니스에게로 인도된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그친 채 세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세라가 또 어딘가로 떠나 버릴 것처럼 몸을 돌렸다.

“또 어디 가?!”

놀란 레니스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아 버렸다.

“…….”

그를 돌아본 세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짝이는 자수정 빛 눈동자에는,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을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꼭, 자신을 향해 가야 해. 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겁쟁이처럼 망설이는 자신과는 달리, 세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하려는 것이다.

눈에 보이듯 선명한 각오가 얼간이처럼 망설이고만 있던 레니스의 뺨을 후려쳤다.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해?”

덩달아 각오를 다진 그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쥐고 있던 세라의 옷깃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갈게.”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세라가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비탄으로 물든 폐허를 향해 달려 나갔다.

“…….”

레니스는 더 이상 세라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쭉 지켜보았다.

저 뒷모습이, 아주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릴리! 로한!”

연이은 폭발로 인해 흙먼지가 자욱하게 낀 골목 안.

길도 잃고 가족도 잃어버린 남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제 아이들의 이름을 목놓아 울부짖었다. 분명 중간까지는 함께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넘어졌다 일어나 보니 양손에 잡고 있던 아이들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부터 남자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른들도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상황에서,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 것들이 헤매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매분 매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얘들아! 어디에 있니! 아빠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돌아올 대답을 기대하며 목놓아 소리쳐 보지만, 이번에도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엇갈렸는지, 주변에는 어느새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다 더러운 안타레스교 놈들 때문이야!

아이들을 찾아 헤매면서도, 남자는 이런 비극적인 사태를 만들어 낸 원흉을 원망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남자. 오스만은 길드에서도 유명한 안타레스 혐오자였다. 원래는 흑마법을 신봉하는 광신도들 따위 별 관심도 없었지만, 몇 해 전 그들의 손에 아내를 잃은 후부터는 그렇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오스만의 일상을 박살 내 버리는 존재는 언제나 그들이었다. 아직 아내를 잃은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인간이기를 포기한 면역자 놈들이 남겨진 자식들마저 빼앗아 가려 하고 있었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들을 전부……!”

뿌드득, 이를 간 오스만이 사납게 읊조렸다.

그는 이번 일로 제 아이들이 털끝만큼이라도 잘못된다면 내일 당장 선발대에 입대하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면역자란 면역자는 모조리 도륙 내 버리겠다 맹세했다.

“아이를… 찾아?”

그때,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오스만이 흠칫 놀라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

그가 대답하지 않자,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 너머로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

뚜벅, 뚜벅,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발걸음이 오스만을 향해 다가온다.

거침없이 거리를 좁힌 상대가 흙먼지를 가르며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며, 면역자…!”

불길하게 빛나는 자수정 눈동자를 마주한 오스만이 기겁을 했다.

황폐한 폐허 위에 서 있는 면역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불길해 보였다.

막다른 길에서 적을 마주한 남자가 빠르게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렸다. 흔들리는 동공이 부산하게 상대를 살핀다.

석양을 받아 테두리가 붉게 빛나는 군청색 머리칼, 어둠 속에서도 홀로 선명한 안타레스 색의 눈동자…….

오스만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대장이 들여왔다던 면역자 노예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늘 레니스와 함께 제집 앞에 찾아왔기에 얼굴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지?”

오스만이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면역자가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잔뜩 부르튼 손에 쥐고 있는 건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단검. 그 끝은 이미 많은 희생자를 맞이했던 것처럼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스만.”

면역자의 입에서 한 번도 가르쳐 준 적 없는 제 이름이 튀어나왔다.

“허억! 내, 내 이름은… 어떻게!”

섬뜩한 예감이 든 오스만이 헛숨을 들이켜며 더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면역자가 제집 앞에 얼쩡거리는 게 싫어서 물세례를 퍼부었던 게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턱, 하지만 곧 벽에 가로막혀 얼마 가지도 못했다.

혹시 그때의 앙금을 간직하고 복수하려고…….

그 모습을 비웃듯이 바라보던 면역자가 스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애들이라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그건, 해석하기에 따라 몹시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발언이었다.

“뭐, 라고…?”

애들이 어디를 먼저 가? 아니, 나한테 아이가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의문들이 오스만의 머릿속을 혼탁하게 흐트러뜨렸다.

“아마, 당신도 곧 만나게 될 거야.”

흐려진 머릿속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여자가 히히, 웃으며 그를 향해 검 끝을 세웠다.

“……!”

누가 봐도 광기에 지배당한 눈이었기에, 긴가민가하던 오스만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리꽂혔다.

“이럴 줄 알았어! 네, 네년이 결국 그 더러운 본색을…!”

분노한 그가 욕설을 쏟아대자 사악하게 웃고 있던 면역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

그에 오스만은 선명한 죽음을 예감했다.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직선 방향에서 냅다 내질러지는 흉기를 제압할 재주는 없었다.

생각보다 망설임 없이 휘둘러지는 검 끝에 흠칫 놀라 굳어 버린 사이, 어느새 서늘한 칼날이 그의 목덜미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는다!

최후를 예견한 오스만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콰직! 귓가에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깔끔하게 죽어 버린 걸까…?

캬아악!

그때, 얼어붙은 오스만의 귓가로 사나운 숨결이 와 닿았다.

“……?”

찔끔 눈을 든 오스만이 슬쩍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쳐다봤다.

“……뱀?”

쉬이익!

그곳에는 단검에 목을 꿰뚫린 뱀이 원통하다는 듯 울어대고 있었다.

새빨간 아가리를 쩍 벌린 뱀이 울부짖을 때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서 투명한 독이 뚝뚝 흘러내렸다. 쭉 찢어진 노오란 동공은 정확하게 오스만을 노리고 있었다. 제때 목이 꿰뚫리지 않았더라면, 보기에도 무시무시해 보이는 저 독니가 오스만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것이다.

“뱀이, 왜, 여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오스만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

“…….”

반쯤 무너진 골목길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채우는 건 죽어 가는 뱀이 내지르는 원통한 비명뿐이었다.

잠깐의 유예 시간은 금방 끝에 다다랐고, 침묵을 채워 주던 뱀마저 기다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침묵했다.

뱀의 죽음을 확인한 면역자가 깊이 박힌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단검에는 새로이 고인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면역자는 이것으로 모든 볼일이 끝났다는 듯 검을 뒤로 물렸다.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는 면역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그를 턱짓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는 비록 불길한 색이기는 했으나, 처음처럼 사악해 보이지 않았다.

그게 꼭, 이제 그만 사이좋게 지내자는 무언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도, 도와줘서 고맙…, 억!”

찰싹!

그래서 순순히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불시에 뺨을 얻어맞았다.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순간적으로 눈앞이 다 번쩍거렸다.

“……아니, 왜…….”

맥락을 알 수 없는 싸대기에 오스만이 당황한 낯으로 세라를 바라보았다.

화해하자는 거 아니었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면역자의 마음에 오스만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유를 묻는 시선에 개운한 표정의 면역자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500,982,781.”

“……???”

“다음엔 진짜 뒤질 줄 알아.”

“……???????”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대화가 이어질수록 의문만 켜켜이 쌓여 가는 기분이었다. 이 대화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문제의 시발점을 찾고 싶어진 오스만이 멍해진 사이, 면역자가 그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당긴다.

“일어서.”

“어, 어억…!”

저항 없이 끌려가 일어서자 이번에는 그의 고개를 쥐고는 억지로 한 방향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지금부터 저쪽 끝까지 쉬지 말고 곧장 뛰어.”

여자가 가리킨 방향은 그가 여태껏 등지고 걸어온 곳이었다.

분위기상 가야 할 것 같긴 한데, 오스만은 자신이 굳이 그 말에 따라야 할 최소한의 이유라고 알고 싶었다.

“내, 내가 왜…?”

그러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악!”

“가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이 오스만의 심장에 벼락처럼 꽂혀 들었다.

고작 그것 좀 얻어맞았다고 겁을 집어먹은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여자의 말대로 무작정 뛰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충동이 생겨났다.

일단 목숨을 살려 줬으니까 믿고 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였다.

“허억, 허억, 허억……?”

오스만은 흙먼지가 몰아치던 골목과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그는 대피 지역이 위치해 있던 시가지. 그중에서도 운이 좋게 공격을 피해 간 멀쩡한 건물에 딸린 너른 마당에 서 있었다. 턱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폐가 아프고, 온몸이 뜨거운 땀으로 흥건했다.

“내, 내가, 왜, 언제 여기에……?”

손등으로 땀을 닦아 냄과 동시에, 그의 뇌리에 정신없이 달렸던 것 같은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달렸던가? 의문을 가져 보지만 그때의 기억이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오스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도착한 곳이 새로운 대피소라도 되는 듯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공격 때문에 무작정 이곳으로부터 도망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쪽이 가장 안전한 장소였던 모양이다.

“아빠아아아!”

“아빠!”

그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자그마한 아이 둘이 달려 나온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얘들아!”

그토록 찾던 자식들의 등장에 오스만이 얼른 무릎을 굽혀 앉아 두 팔을 넓게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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