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전속력으로 달려온 아이들이 너른 품 안에 쏙 들어온다. 오, 세상에 신이시여. 품 안에 꽉 들어차는 무게감에 깊이 안도한 오스만이 힘주어 자식들을 끌어안았다. 부모 없이 홀로 떨어져 있던 시간이 서러웠는지 아이들이 에에엥,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의 울음에 오스만도 찔끔 눈물이 났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감동적인 상봉을 뒤로한 그가 진지한 눈으로 두 아이를 살폈다.
“응! 없어!”
킁, 용맹하게 콧물을 삼킨 첫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보기에도 먼지만 조금 뒤집어썼을 뿐,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새카만 누나가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보라색 눈!”
“엄청 예뻐!”
“멋있어!”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 두 아이가 앞다투어 와다다 이야기를 쏟아 냈다.
둘이서 하는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새카맣고 보라색 눈을 가진 여자가 아이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온 모양이었다.
이 길드에서, 보라색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단 한 명뿐이었다.
……에녹 대장의 면역자 노예.
방금 그 여자에게 뺨을 얻어맞은 기억이 있는 오스만이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 그 사람이 너희한테 뭐 해코지라거나….”
“안 했어! 기다리고 있으면 아빠도 온다고 했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그 누나가 데려다준 거야!”
다행히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던 듯, 아이들이 주변에 앉아 있는 어른들을 가리키며 방방 뛰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눈이 휘둥그레진 오스만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못해도 수십, 아니 어쩌면 백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누가 훈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 혼자서 구해 냈다고…?
대체 왜?
오스만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생각했을 때, 모두에게 불청객 취급이나 받던 그 면역자 노예가 굳이 이렇게까지 그들을 도와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아빠. 얼른 가자. 저쪽에서 밥 준다고 했어.”
멍하니 멈춰 버린 아빠가 답답했는지, 아이들이 그의 손을 한쪽씩 붙잡아 끌어당겼다.
“어, 어어. 그래…….”
성화에 못 이겨 일어서려던 오스만은, 아이들에게 붙잡힌 제 손을 보고는 멈칫했다.
흙냄새 말고는 조금의 상처도 없이 매끈한 손이 유난히 시야를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구하러 온 면역자는 까지고 쓸려 엉망이었던 것 같은데….
“……그 면역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심란해지는 마음에 오스만이 낮게 투덜거렸다.
“세라.”
아래를 향하는 머리 위에서 툭, 이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들자 그곳엔 음침한 청년이 서 있었다. 레니스. 시그너스 길드의 유일한 재무 담당관이었다.
“그 애의 이름은, 세라예요.”
그냥 면역자가 아니라.
다시 한번 더 이름을 알려 준 레니스가 고소한 연기를 폴폴 내뿜는 접시를 들이밀었다.
“와! 빵이다!”
“맛있겠다!”
고대하던 음식에 아이들이 대신 접시를 이어받으며 팔짝팔짝 뛰었다.
“세라…….”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던 오스만이, 여자의 이름을 따라 읊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래전, 나라를 두 개나 팔아먹고 온 대륙을 전쟁에 휩쓸리게 한 악녀의 이름이자, 거지발싸개 같은 안타레스 놈들이 추앙하는 악마의 이름이었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그런 쓰레기 같은 이름이라니, 누가 면역자 아니랄까 봐 쓸데없는 곳까지 다 불길했다.
하지만…….
“……세라.”
얻어맞은 뺨을 쓸어내린 오스만이 그 이름을 한 번 더 읊조렸다.
제일 심한 욕을 하고 싶을 때에나 입에 올리던 이름. 오스만은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의도로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누가 지었는지, 그 여자가 더럽게 미웠나 보구만.”
허어, 오스만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내가 졌다는 듯이,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듯이 순순히.
고집스럽게 외면하고 있었던 진실을 이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할 때가 와 버렸다는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세라. 세라라…….”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란 이유였다.
문제의 그 면역자가, 굳이 나서서 이 많은 사람들을, 오스만을 구해 준 이유.
“그게, 내 은인의 이름이군.”
그건, 요즘 같은 시대에 보기 힘든, 고결하기까지 한 순수한….
선의였다.
***
500,962,781.
500,952,781.
500,942,781!
“히히! 히히히! 감형이다! 감형!”
오스만에게 감동을 안겨 준 주인공께서는 고결한 선의와는 퍽 거리가 먼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갱신된 형량을 확인한 세라는 확연히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세상의 존망과 관련이 없어도, 착한 짓을 해도 감형을 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세라는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며 선행을 질질 흘리고 다녔다.
“백만 년…! 그 잠깐 사이에 거의 백만 년이나 줄었어…!”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어 낸 세라가 형량이 새겨진 팔뚝을 쓰다듬으며 변태처럼 허억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보기 힘든 고결하고도 순수한 선의는 개뿔. 그녀는 그저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작고 소중한 죄수일 뿐이었다.
세라는 자신이 누굴 구했고, 그들이 지금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따위는 일절 관심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그 행위의 보상으로 따라올 감형뿐이었다.
우리 후하신 신께서는 생명 하나를 구해 낼 때마다 어김없이 일만 년씩 감형을 해 주셨고, 세라는 단 하나의 감형도 놓치기 싫어 최적의 동선을 짜느라 머리가 다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그 덕에 막 굴린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 왔지만, 원하던 것을 손에 넣어서일까…?
꼭 약이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고, 온몸에는 힘이 넘쳐흘렀다.
극히 흥분한 탓에 중간중간 인간을 상대로 ‘목소리’도 써 버린 것 같다. 제대로 걸렸는지 그냥 마력만 움직인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노예상 때처럼 피를 토하고 쓰러지지는 않았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나…. 우리 귀여운 나나가 어디에 있을까…?”
사소한 문제를 못 본 척 넘겨 버린 세라가 굶주린 개처럼 먹이, 아니 아이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작고 귀여운 양 갈래 소녀 나나만 구하고 나면, 별의 조각이 보여 준 죽음을 전부 처리하는 것이다.
“훌쩍, 훌쩍. 흐으…. 엄마. 아빠아….”
다행히, 조각이 보여 주는 장소를 찾아가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무너지다 만 건물의 잔해 속에서 나나를 찾아낸 세라가 입가를 쭉 찢어 웃었다.
이것으로 또 일만 년이 깎일 것을 생각하니 몹시 흥분된 탓이다.
“으아아아앙!”
그 광기 어린 미소에 놀란 나나가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개의치 않고 아이를 안아 든 세라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
쿠구궁!
한동안 잠잠하던 방벽에서 갑자기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은 폭음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땅이 진동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아, 깜짝이야.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세라가 놀란 눈으로 방벽 쪽을 바라보았다.
나나가 숨어 있던 곳이 동쪽 방벽과 가까운 곳이라 방금 전의 폭발이 얼마나 강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무슨 큰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놀라게 한 것에 비해 딱히 그 뒤로 이어지는 소란은 없었다.
“……얼른 돌아가야겠어.”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든 세라가 발길을 재촉했다.
저녁 내내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닌 덕에, 돌아가는 길을 찾는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한번을 헤매지 않고 척척 걸어간 덕에, 머지않아 임시 대피소가 보였다.
“세라…!”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레니스가 반색을 하며 높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등장에 앉아서 쉬고 있던 사람들이 비척비척 일어나 레니스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고생했어! 얼른 와서 뭐라도 좀 먹어!”
반기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레니스만이 적극적으로 세라를 반겨 주었다.
“어어, 그래…….”
이상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린 세라가 슬슬 무겁게 느껴지는 나나를 내려놓았다.
“으아앙! 레니스!”
그나마 아는 얼굴을 발견한 아이가 세라를 내팽개치고 달려 나갔다.
아무리 봐도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모양새였지만, 레니스는 그 광경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았다가.
“……!”
곧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그 급작스러운 변화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세라!!! 네 뒤에……!”
“회로가 반응한다 싶더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레니스의 외침이 묻혀 버렸다.
그에 이끌린 세라가 반사적으로 제 뒤쪽을 돌아보았다.
“컥!”
미처 반응을 할 틈도 없이, 커다란 손아귀에 목 줄기가 붙잡혔다.
숨통을 끊어 버릴 듯이 콱 틀어쥐는 힘에 세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쥐새끼가 있었군.”
세라를 낚아챈 상대는 커다란 남자였다.
남자는 금사로 수놓인 시커먼 망토를 뒤집어쓴 채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림자 아래 드러난 창백한 입술이 달싹인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남자가 숨결이 닿을 정도로 세라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너는 누구지?”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림자 너머로, 두 쌍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허-.”
그와 동시에, 세라의 입에서 탄식이 샜다.
그녀는 제 목을 조르는 손을 떼어 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요요히 빛나는 불길한 눈동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망토의 그늘 아래로 숨겨져 있는 건 그녀와 똑같은 자수정 빛 눈동자.
그토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진짜 면역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