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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32화 (32/131)

#32

5초.

그 짧은 시간 안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우 숨 한 번 깊게 쉴 수 있는 짧은 틈에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대개 이런 긴박한 위기 속에서 인간은 이성보다는 본성에 우선하여 행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세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이성은 5초가 남았다는 걸 안 시점에서 하얗게 굳어 백지가 되어 버렸다.

반면, 기민하게 깨어난 본성이 죽음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세라의 몸이 절로 움직였다.

자랑하던 마법도, 쓸 만한 도구도 없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쓸 만한 게 있다면 사지 멀쩡한 몸뚱이뿐이었다.

그리하여 세라는…….

“다들 엎드려!”

폭발하기 직전의 남자를 향해 몸을 날려-.

“……?!”

…서 에녹의 등을 있는 힘껏 밀어 버렸다.

“아.”

기우뚱 중심을 잃은 에녹이 한껏 부풀어 오른 남자의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에.

쿠궁!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꼭 거대한 천둥이 떨어지고 난 이후처럼 무시무시한 폭음이었다.

폭발이 일어난 장소로부터 시작된 진동파가 대지를 타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그 진폭이 유난히 강한 폭발 지점 근처의 일부 땅은 아래로 폭삭 내려앉기까지 했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했을 뿐, 대지가 내려앉고 하늘이 울릴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폭발은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저, 딱 폭발이 일어난 지점에서나 새카만 연기가 폴폴 올라올 뿐.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폭발이 제 위력을 다 보여 줬더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다 죽었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죽음이란 그리도 선명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알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은 지금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 일인지.

그건 참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는데…….

“…….”

“…….”

가까스로 살아난 시그너스 길드원 중 누구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이 기쁨이나 환희보다는 차라리 경악에 가까워 보였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얼어붙은 그들은 모조리 같은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 습격에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리고, 그리고 또 방금 전의 폭발로부터 한 번 더 그들을 구해 준 은인.

……세라를.

“휴-. 다행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세라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 냈다.

뀨우우우….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던 비틀린 운명이 만족스럽게 울며 사라졌다. 별의 조각이 보여 주던 미래가 사라지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김없이 형량이 새겨진 팔이 따끔거렸다.

시선을 내려 남겨진 숫자를 확인하니, 정확하게 400,000,000.

방금 전의 일로 형량이 1억 년이나 깎여 나갔다.

끝자리까지 예쁘게 0으로 맞춰 준 성의가 파격적이기까지 했으나, 세라 또한 자신이 구해 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썩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5초.

그건 세라가 제 목숨과 형량을 지켜 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난 이제 죽었다.’

그로 인해 분노할 에녹 소서로부터 살아남을 방법까지 생각하기엔 터무니없을 짧은 시간이었음을.

“와아-.”

모든 게 죽어 버린 듯 고요해진 세상에서, 낮게 탄식하는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순조롭게 하늘로 향하던 새카만 연기가 꿈틀거린다.

뚜벅, 뚜벅. 그 너머에서 급하지 않은, 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발소리가 울렸다.

세라는 부디 베일처럼 제 눈앞을 가리고 있는 연기가 영원히 피어오르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신이 그녀의 청을 거절한 듯, 바로 다음 순간 검은 연기가 검으로 싹둑, 베어 낸 것처럼 일시에 사라졌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하, 시발. 어이가 없네……?”

아무리 봐도 그녀를 죽일 생각으로 가득 찬 에녹 소서였다.

그는 조각이 보여 준 미래와는 달리 온몸에 새카만 재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만한 폭발을 제 몸으로 틀어막았으니 그럴 만했다. 몹시 험한 꼴이었기에, 세라는 그가 지금 얼마나 열받았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주인님.”

그 얼굴을 차마 마주 보기 힘들었던 세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난 진짜 죽었다. 사실 이미 죽은 사람이긴 했지만, 방금 전의 눈빛으로 한 번 더 죽음을 경험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죽을 순 없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마음을 다잡은 세라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주인님. 우리 사이엔 오해가,”

“오해?”

“지성인답게 대화로 해결,”

“대화?”

하지만 에녹은 세라의 조심스러운 시도를 모조리 잘라 먹었다.

“너 그새 잊었구나.”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낸 에녹이 히죽, 입가를 찢어 웃는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치아 때문에 세라의 마음이 더더욱 심란해졌다.

“난 대화로 안 해.”

하하! 에녹이 맑게 웃었다.

하지만 눈이 여전히 미친놈처럼 번들거려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대화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

듣는 사람 심장 내려앉게 하는 발언을 한 에녹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숨죽여 지켜보던 이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 나왔다.

“대, 대, 대장. 대장. 대장!”

세라를 보호하듯 그녀를 등지고 에녹 앞에 끼어든 이들은 성난 맹수를 진정시키는 사육사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어떻게든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한마디씩 보탰다.

“진정해. 진정! 대장이 좀 참아!”

“얘도 오죽 급했으면 그랬겠어. 응? 그리고 대장은 죽지도 않잖아. 성검의 가호 덕분에.”

“오늘 이 애가 우릴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럴 땐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 줘야지.”

“그, 그래! 세라는 우리 모두의 은인이야!”

아직 제대로 화를 내지도 않았는데, 길드원들은 에녹이 마치 세라의 목에 검이라도 겨눈 것처럼 난리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불길하다고 욕하던 면역자를 서슴없이 은인이라 칭하는 모습들이 꼭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처럼 필사적이었다.

“대장님. 언니한테 화내지 마요!”

“착한 누나란 말이에요!”

“나빠!”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쪼르르 모여든 아이들이 에녹의 무릎께에서 깡총깡총 뛰어오르며 대들었다.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세라를 감싸고 돌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주 길드 꼴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

에녹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 해코지를 당한 사람은 그 자신이었는데, 어째서 악당 취급까지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기 싸움에서 밀리는 편이 아닌데, 제 노예를 감싸는 이들에게서는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우르르 몰려든 이들은 에녹에게 진정하라고 난리였지만, 사실 에녹은 아직 제대로 화조차 내지 못했다. 그 점이 가장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뭘 또 이렇게까지…….

그는 실로 오랜만에,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세라도 지금쯤 많이 반성하고 있을 거야.”

“당연하지. 아주 미안해하고 있을 거야.”

에녹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 눈빛을 교환한 길드원들이 제멋대로 상황이 마무리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지. 세라……?”

그 분위기에 쐐기를 박은 레니스가 웃는 낯으로 세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일부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이 반으로 갈라져, 에녹과 세라 사이에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

고개를 푹 숙인 세라는 에녹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사람들의 말처럼 깊이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딴지를 걸 타이밍을 놓친 에녹은 무슨 반성을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눈으로 세라를 주시했다.

모든 사람들이 세라의 입에서 나올 첫마디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의가 산만한 아이들마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하여, 세라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주변이 완전히 고요해졌을 때-.

주인공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

오……?

어렵사리 떼어 낸 첫마디에, 사람들이 저마다 ‘오’로 시작하는 사죄의 말을 상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포기한다. 그때, 세라가 드디어 입술을 열었다.

“오로록!”

흉내 내기 어려운 소리를 내뱉은 그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자 바닥을 향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빨간 피가 물처럼 콸콸 쏟아져 내렸다.

“어어-. 나 왜 피 나지……?”

누구보다 놀란 표정으로 제가 토해 낸 피를 바라보다가.

풀썩, 연극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세라……!”

“면역자!”

비극의 한 장면 같은 그 모습에 안 그래도 그녀를 감싸고 돌던 길드원들이 세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 갑자기 피를 왜 토한 거지?”

“원래 어디가 아팠나?”

“이상하다. 외상 같은 건 없는데…….”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입술 아래로 온통 피 칠갑을 하고 있는 모습이 여간 심각해 보이는 게 아니라서, 레니스를 비롯한 길드원들은 세라에게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야.”

그중에서 유일하게, 세라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에녹뿐이었다.

사람들을 헤집고 다가간 그가 망설이지 않고 세라를 낚아챘다.

“연기하지 말고 일어나.”

살벌한 얼굴로 제 노예를 살핀 그가 가녀린 팔을 잡아 엄지로 뼈와 살을 분리해 버릴 기세로 팔 안쪽을 꽉 짓눌렀다.

그 강도가 가만히 두고 보기에는 너무 강해서, 으으으, 소리를 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린 길드원들이 아픈 사람한테 뭐 하는 짓이냐며 아우성을 쳤다.

“으, 으으으….”

하지만 그게 정답이었던 걸까.

기절해 있던 세라의 눈꺼풀이 깨어날 것처럼 들썩거렸다.

“흐으….”

겨우 실눈을 뜬 세라가 불쾌한 표정으로 자신을 붙든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아, 아파아. 이 새끼야….”

아련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힘없이 휘둘러진 작은 손이 찰싹, 하고 에녹의 뺨을 후려쳤다.

욕설과 폭력을 차례로 휘두른 그녀는 그것으로 모든 기력을 다 썼다는 듯이 또 툭, 고개를 떨구었다.

“…….”

이제는 싸대기까지 맞아 버린 에녹이 모든 감정이 휘발된 표정으로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을 쓰다듬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와 사람들 사이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 대장. 죽이면 안 돼요…….”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선 이는 레니스였다.

딱히 에녹이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안 죽여. 내가 얠 왜 죽여.”

그러자, 에녹이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며 도리어 레니스를 타박했다. 세라를 다정히 안아 올린 에녹은 갑자기 모든 분노와 번뇌를 이겨 낸 사람처럼 침착했다.

“어, 지, 진짜요?”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레니스를 비롯한 길드원들이 진의를 의심하는 눈으로 그를 살폈다.

“당연하지. 우리 길드의 은인이라며?”

에녹은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기특한 노예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지.”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에는 어쩐지 ‘이렇게 쉽게’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현명하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죽게 내버려 둘 순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으므로,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들 멍하니 서서 뭐 해?”

그런 길드원들을 돌아보며, 에녹이 어서 뛰어가지 않고 뭐 하냐는 얼굴로 명령했다.

“의사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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