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33화 (33/131)

#33

똑똑, 똑.

두 번, 한 번으로 끊어치는 노크 소리.

마커스다.

“들어와.”

상대를 알아챈 에녹이 방문을 허락했다.

그러자 달칵, 문이 열리며 예상했던 대로 마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빼꼼 집어넣은 그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형형색색의 꽃들을 품 안에 잔뜩 끌어안고 있었다.

“노예한테 뒤통수 맞았다며?”

마커스는 에녹과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그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을 인사 대신 늘어놓았다.

“어이구, 너무 세게 치셨나. 많이 아파 보이시네.”

곧장 침대로 향한 그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세라를 바라보며 과장스럽게 혀를 내둘렀다.

놀리는 게 다분한 어조였으므로, 돌아가는 에녹의 말투가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계속 그따위로 굴 거면 꺼져.”

그러나 그거야말로 마커스가 원하던 반응이었는지 그가 파하하, 하고 콧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이거 완전 삐졌구만.”

“…….”

에녹은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안 할게.”

무언의 경고를 알아들은 마커스가 충분히 놀렸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크흠, 집 앞에 레니스가 울고 있는 거 알아?”

부러 크게 헛기침을 한 그가 은근슬쩍 다른 주제로 대화를 틀었다.

병문안 선물은 아니었던 듯, 가져온 꽃을 아무 곳에나 던져 놓으면서.

“알아.”

그 주제는 마음에 든 모양으로, 에녹이 꼴좋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현재 레니스는 기습에도 멀쩡히 살아남은 에녹의 집 앞에서, 세라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세라를 제집에 숨긴 에녹이, 환자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누구도 그녀를 보러 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에 레니스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세라를 슥삭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죽이게?”

오는 길에 그 모든 사정을 전해 들은 마커스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에녹의 마음을 떠봤다.

“아니.”

오늘 하루만 해도 지겹도록 당한 살인마 취급에, 에녹이 이젠 놀랍지도 않다며 즉답했다.

“고민 중이야.”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아직도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어조로 낮게 읊조렸다.

그래서 죽이겠다는 거야. 봐주겠다는 거야.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어진 마커스가 하나만 하라는 식으로 물었다.

“안 죽인다며. 무슨 고민을 또 해?”

그에 두 손을 하나로 모은 에녹이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괴롭혀 줄까…….”

“…….”

아무리 괘씸하다곤 하지만, 아파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하기에는 몹시 속이 좁아 보이는 발언이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마커스가 ‘어, 음, 어….’ 하며 한동안 말을 절었다.

여태까지는 놀리고 싶은 마음에 농담을 섞어 이야기했지만, 이쯤 되니 에녹이 진심으로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왜 그래. 너답지 않게. 누구한테 특별히 원한을 품지도 않는 놈이.”

그건 썩 웃어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마커스가 심각한 얼굴로 에녹을 말리고 들었다.

그의 말대로, 에녹이 특정한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을 품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특히 좋은 감정은 몰라도,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더더욱.

개미에게 물렸다고 해서, 그 개미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인간은 없으니까.

에녹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그런 거였다.

딱, 개미 정도의 존재감. 위협을 해 오더라도 조금 성가실 뿐, 결코 두려워할 순 없는 하찮은 생명들…….

그러니 설령 에녹이 원하는 대로 화풀이를 한다고 해서 그다지 기분이 풀리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개미를 괴롭힌 현실에 대해 지독한 허무감만 느끼게 되겠지…….

안 그래도 우울증을 감기처럼 달고 사는 남자인데, 마커스는 자신들의 대장이 굳이 사서 고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기특한 일을 한 사람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도 싫고.

“알아. 나도. 딱히 의미 없는 짓인 거.”

다행히 에녹은 이런 길고 긴 설득의 말을 듣지 않아도 마커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주었다.

그는 분명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일어난 일은 그에게 딱히 위협이 되지도, 그러므로 화낼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평소의 에녹이었더라면 누가 이런 짓을 했더라도 오래 살고 보니 별일이 다 있다며 한 번 웃고 넘겼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 말처럼 기특하다며 칭찬까지 해 줬을지 몰랐다.

“머리로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 이해하고 있는데…….”

하지만 새카만 재를 뒤집어쓰고 몸을 일으켰을 때.

어렸을 때도 쓰지 않았던 욕설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열을 받아 버렸다.

단전에서부터 끓어 올라오는 분노는 그의 기억보다 훨씬 강렬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사통과했을 일이, 이토록이나 마음에 콕 들어와 박히는 이유란 역시 하나뿐이겠지.

사나운 시선으로 세라를 노려본 에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마음이 꼬운 이유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얼굴이-.”

“얼굴?”

“얼굴이 화가 나.”

에녹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제 노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목소리로 한 번 더 강조했다.

“정말 열받게 생긴 얼굴이야.”

“……???”

“얘는 왜 하필 이렇게 생겼지?”

마커스는 이번만큼은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듯이 흐린 눈을 했다.

침구에 푹 파묻혀 있는 에녹의 노예는 끙끙 앓고 있는 와중에도 눈앞이 환해질 정도로 예뻤다.

아무래도 너무 많은 여자와 밤을 보낸 나머지, 에녹의 미의 기준이 이상하게 뒤틀린 게 틀림없었다.

“……의사는 뭐래?”

안타까운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마커스가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말길을 돌렸다.

“…….”

그에 에녹의 시선이 세라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의 노예는 척 보기에도 위독해 보였다.

정신을 잃은 직후 얼음장처럼 차갑던 체온이 어느 순간 절절 끓기 시작했다. 그래서 해열제를 쓰면 밑도 끝도 없이 체온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또 조치를 취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그 지독한 굴레를 반복하던 의사가 갖은 노력을 다해 평열을 웃도는 정도의 체온으로 유지시키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피로와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병이 난 것 같습니다. 필요한 조치는 다 했습니다만, 문제는…. 환자의 상태가 지나치게 위독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세라의 상태는 그 이상으로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왜 이렇게까지 상태가 심각한지 모르겠습니다.’

장장 네 시간 동안 그녀를 살핀 의사는 치료하는 내내 답답한 얼굴을 했었다.

그가 진찰한 바에 따르면 그의 노예에게는 외상도, 내상도, 심지어 과거에 특별히 큰 병을 앓았던 흔적도 없단다.

어떻게 살펴도 피를 토하고 쓰러질 정도의 원인은 없다는 말이다. 문제를 일으킬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정작 환자는 죽을 기세로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뛰겠다고 말이다.

‘더 이상 제가 해드릴 일은 없는 것 같군요. 우선은 오늘 밤에 경과를 지켜보죠.’

무거운 표정으로 왕진 가방을 챙긴 의사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가 버렸다.

말로는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지만, 에녹은 단어 사이사이에 묻어난 체념을 읽었다.

그의 노예는 아마 오늘 밤이 고비일 것이다.

죽으려나.

색, 색. 가쁜 숨을 내쉬는 얼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미래는 알 수 없었다.

“모르겠대.”

상념에서 깨어난 에녹이 그 길고, 치열하고, 심란했던 치료 과정을 모조리 자른 채 짤막한 결과만을 돌려주었다.

듣기에 몹시 무책임한 진단이었으므로, 마커스가 뭐 그런 의사가 다 있냐며 미간을 팩 찌푸렸다.

“날로 먹는구만.”

“날로 먹었지.”

둘 사이에 의사가 들었더라면 몹시 억울했을 대화가 오갔다.

생각보다 심각한 세라의 상태에, 마커스가 그것참 곤란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매불망 ‘누나’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세이옌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에서였다.

“괘씸해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웬만하면 좀 봐줘. 그래도 우리 세이옌의 은인이시잖냐.”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된 마커스가 마땅한 참작 사유를 들어 세라의 안위를 당부했다.

“그놈의 은인 타령…….”

하지만 역효과였는지 에녹은 그 단어 자체가 지긋지긋하다는 반응이었다.

“이만 가.”

“간다. 가. 안 떠밀어도 갈 거야.”

냉혹한 축객령에 얼른 일어나 문을 나서다가.

“아아, 가기 전에 한 가지.”

문득 잊고 있던 볼일 하나가 떠올라 걸음을 멈춰 섰다.

“네 애인들이 ‘꽃 좀 골라’달래.”

그리고는 더없이 평범한 그 말이 은밀한 비밀 암호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

에녹은 그제야 마커스가 쏟아 놓고 간 꽃 무덤에 관심을 주었다.

그가 들고 있었을 때에는 하나의 거대한 꽃다발 같았던 것들이 바닥에 흐트러뜨려 놓자 꽃밭을 아무렇게나 뜯어 온 것처럼 통일성이 없게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많은 꽃들 중에 중복되는 건 단 한 송이도 없을 테니까.

평소에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던 일이었는데, 어쩐지 오늘은 썩 내키지 않았다.

“결정했어.”

한참을 고민하던 에녹이 마침내 대답을 돌려주었다.

마커스는 어서 말해 보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파업할 거야. 적어도 일주일은 아무도 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해.”

꽃 이름이 나올 줄 알았던 에녹은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파업이랑 애인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것도 나한테는 일이니까?”

어깨를 으쓱한 에녹이 그의 애인들이 들으면 억장이 무너질 법한 말을 담담하게 지껄였다.

그는 익히 말했던 바와 같이, 누군가를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법이 없는 남자였고, 그 범위에는 에녹의 사랑스러운 애인들도 포함이었다.

……그 사실을 다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는 게 참 희극이다.

“……일주일이나 방에 틀어박혀서 뭐 하게?”

만약 에녹이 죽는다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커스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가 일주일이나 칩거를 하게 된다면, 온 길드 사람들이 제게 이유를 물을 테니 그때 답해 줄 말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에녹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어조로 대답했다.

“병간호.”

대답은 마커스에게 하고 있지만, 자세는 그를 등진 채 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노예는 내가 돌봐야지.”

다정하기 그지없는 파업 사유를 일러준 에녹이, 사경을 헤매는 노예가 이 말을 꼭 들었으면 좋겠다는 듯 살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주, 정성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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