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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42화 (42/131)

#42

완전히 나은 줄 알았던 세라의 상태는 그날 새벽 다시 악화되었다.

전신을 저밀 것 같은 통증은 물론 뇌를 녹여 버릴 기세로 타오르는 고열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세라는 잠든 상태 그대로 자연스럽게 앓으며 깨어났다.

“으으…. 물, 무우울….”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세라가 가장 먼저 찾은 건 물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물 한 모금이 절실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지옥 불에서 불타고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간절했다.

“자, 마셔.”

그때, 누군가 세라를 일으켜 입가에 물잔을 기울여 주었다.

코끝에 스치는 물 냄새가 반가웠지만, 세라가 제대로 받아먹지 못해 전부 턱 밑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다음에는 고개가 뒤로 휙 꺾이더니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다.

“으음, 으으음-.”

한데 엉킨 입술 사이로 얼마간의 물이 넘어왔다.

세라는 어미 새에게서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꼴깍, 꼴깍, 목울대를 넘겼다.

“더, 더어…….”

그러다 더 이상 물이 넘어오지 않자, 이것으로는 부족하다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고작 몇 모금으로는 심장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뜨거운 갈증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상하네.”

그때 차가운 손이 그녀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아, 시원해. 비록 기대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손이 전해 주는 시원한 온도가 잠시나마 열을 식혀 주었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온도조차 금방 세라의 열기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왜 아직도 이 상태지?”

금세 뜨끈뜨끈해진 손이 거두어진다.

그러고는 이불이 들추어지더니, 물에 젖어 축축한 옷이 벗겨졌다.

그 얇은 천 쪼가리 하나가 뭐라고. 입고 있을 때에는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더웠는데, 막상 없어지고 나니 금방 살이 에일 듯한 추위가 밀려왔다.

추워.

추위에 반응한 본능이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다.

세라는 열이 올라 더운 것도 싫었지만, 추운 건 그것의 몇 배는 더 싫었다.

이변을 느낀 그녀가 불만스럽게 눈을 떴다.

뻑뻑한 눈이 모래를 집어넣은 것처럼 버석거린다.

힘겹게 초점을 잡은 그녀가 자신을 이 추위 속에 던져 넣은 사람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흐릿한 시야 너머에 화려한 장미를 닮은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는 얼굴. 세라는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 에녹….”

에녹 소서.

또 너냐….

세라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추우워어…….”

몸을 잔뜩 웅크린 그녀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가여운 애원이 아니라, 네가 어떻게 좀 해 보라는 투였다.

맡겨 둔 것을 찾아가듯 당당한 태도였다.

“주인님이라니까-.”

헛웃음을 지은 에녹이 또 틀리게 부른 호칭을 바로잡아 주었다.

“춥, 다고오…….”

그 말을 물 흐르듯이 무시한 세라가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식으로 에녹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힘이 하나도 없는 발이 탄탄한 허벅지를 깠다.

감히 주인을 발로 차다니, 참으로 신선한 정신머리를 가진 노예였다.

“하여튼 말은 더럽게 안 듣지.”

하지만 그게 또 너무나 그의 노예다워서 에녹이 졌다는 듯이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와. 따뜻하게 해 줄게.”

세라의 등 아래로 팔을 끼워 넣은 에녹이 제 쪽으로 굴러오라는 듯이 툭툭, 건드렸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세라가 냉큼 몸을 굴려 너른 품에 감겨들었다.

맨 가슴에 곧장 맞닿아 오는 따뜻한 체온으로 인해, 세라는 뒤늦게 에녹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라를 안아 올린 에녹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끼익, 끼익, 낡은 나무 계단이 두 사람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같이 끌고 내려온 이불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세라를 눕혔다.

그녀를 홀로 두고 일어선 그가 부스럭거리며 응접실을 돌아다녔다. 온기를 잃은 세라가 덜덜 떨며 이불로 최대한 몸을 감싸려 낑낑댔다.

그러다 겨우 이불을 다 감았을 때, 돌아온 에녹이 이불을 훌렁 벗겨서 세라를 안아 올렸다.

“아, 진짜……!”

방해를 받아 버린 세라가 까칠하게 신경질을 부렸다.

겨우 다 덮었는데. 춥다고 했잖아. 이러다 얼어 죽으면 책임질 거야?

불분명한 발음으로 꿍얼거리다 정신을 차렸을 땐.

“뭐. 왜. 춥다며. 너 이거 좋아하잖아.”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벽난로 앞이었다.

난롯가에 바짝 다가앉은 에녹은 제 위에 세라를 앉히고 두 사람의 몸을 이불을 둘둘 말아 가두었다.

앞에서는 새빨간 불이, 뒤로는 에녹의 온기가 그녀를 감싸 완벽하게 한기를 차단했다.

“…….”

불을 본 세라가 급속도로 얌전해졌다.

그녀는 에녹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일렁이는 온기를 즐겼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장작이 눈에 익었다. 회의 때 재수 없는 보라색 머리가 부순 테이블이었다.

쟤가 이렇게 쓰이네…….

저게 박살 날 때만 해도 분위기가 더럽게 험악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려고 그랬던 거였나.

역시 세상은 결과만이 전부야. 그런 생각을 하며 새빨간 불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추위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갈증이 밀려들었다.

‘아, 물 마시고 싶다.’

세라는 그것을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지금 일어나 물을 떠 올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에녹 소서에게 물을 떠 오라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녀가 막 나간다 하더라도 그에게 밉보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노예가 주인에게 뭘 시키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자, 물.”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에녹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있었던 마냥 세라의 입가에 물잔을 대령해 주었다.

“…….”

대체 언제 떠 온 거지. 난롯불을 피우던 그 짧은 사이에 물도 함께 떠 온 모양이었다.

출렁이던 수면을 바라보던 세라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 마셨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상태였기에, 이번에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전부 세라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대로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켜고 나서야, 세라는 좀 살겠다는 얼굴을 했다.

간사한 세라 로젠바움은 급한 불을 끄고 났더니 의심병이 도졌다.

힐끗, 에녹을 올려다본 세라가 다시 빈 물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왜 나한테 잘해 주지?

분명 기절하듯이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용서 따윈 없으니 그냥 견디라고 해 놓고서는.

정작 아파서 드러누우니까 살뜰히 돌봐 준다.

“괘씸한 노예한테는, 이런 거 안 해 줄 줄 알았는데요…….”

이건 호의인가, 악의인가.

세라는 적에게 받고 있는 이 보살핌이 둘 중 무엇에 속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잘 대해 주다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방법을 735가지 정도 알고 있었다.

복잡하게 굴러가는 세라의 머릿속과는 다르게 에녹은 쉽게 대답했다.

“살려 주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것만으론 속내를 읽어 내기 어려웠다.

의심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캐물었다.

“……살려 달라고 하면 다 살려 줘요?”

“왜 그런 말투지? 왜, 막상 살아나니 영 별로야?”

이 또한 늘 있는 장난 같은 시비인 줄 알았는지, 에녹이 건들거리며 되물었다.

“…….”

세라는 장난하는 거 아니고 진지하다는 의미로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그녀가 진심임을 눈치챈 에녹이 오, 하고 소리 없이 놀라고는 순순히 속내를 들춰 주었다.

“내가 뭐 미치광이 살인마도 아니고, 살려 달라고 하면 굳이 죽이진 않아.”

“아까 걔는 죽였잖아요.”

“…….”

순간적으로 세라가 말하는 ‘걔’가 누구인지 고민하다가, 그가 팔을 잘라 낸 면역자—와 단칼에 죽여 버린 그의 부하들—을 떠올리곤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걘 살려 달라고 안 했잖아.”

“…….”

“살려 달라고 했으면?”

“살려 줬겠지.”

궤변이다.

“하지만 나쁜 놈이잖아요.”

심한 욕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스스로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세라는 에녹이 살려 줬으리라 말한 그 면역자가 썩 좋은 친구는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에녹은 애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걔가 나쁜 놈인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럼 뭐죠?”

“귀찮은 놈.”

“사람들이 죽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죽어.”

“…….”

“가만히 둬도 금방 죽어 버리는 게 인간인데, 어떻게 죽는지까지는 내가 알 바 아니지.”

에녹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얼굴로 확실히 못을 박았다.

“그래 놓고 팔은 왜 잘랐어요?”

“움직이지 말랬는데 귀찮게 굴잖아.”

더럽게 단순한 논리였지만, 놀랍게도 그게 진짜 그의 진심인 것 같았다.

그래도 영웅이니까, 뭔가를 재고 따져서 살려 주고 말고를 결정할 줄 알았는데…….

“진짜로 살려 달라고 하면 다 살려 주는 거였군요…….”

알고 보니 그의 자비는 동전만 넣으면 나오는 사탕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였던 모양이다.

희대의 영웅 에녹 소서가 이토록 헤픈 인심의 소유자였다니.

세라는 그가 인간을 살아 있는 개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위기가 닥치면 구원을 주고, 걸리적거리면 치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인간의 죽음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형태라도 말이다.

이걸 무관심하다고 해야 돼. 다정하다고 해야 돼?

교차하는 모순적인 단어에 세라가 덩달아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무책임해 보이는 방식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자세인가.

사사로운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인류 그 자체를 구원한다는 점에서….

아니 근데 내가 이걸 왜 대신 포장해 주고 앉아 있지.

자꾸만 심오해지는 생각을 잘라 낸 세라는 이쯤에서 ‘그렇군.’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넘어갔어야 했는데…….

하나를 알고 나니 그것의 꼬리를 물고, 새로운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던 세라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나쁜 놈이었어도 살려 줬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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