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하루 종일 붙어지 내면서 뭐가 그리도 아쉬운지.
에녹은 유난히 깊은 밤이면 세라에게 꼭 안아 달라느니,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느니 했다.
“다 늙어서 이런 걸 좋아해…….”
그때마다 세라는 툴툴거리면서도 마지못해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에녹의 어리광을 받아 주면 다음 날은 상이라도 주듯이 섹스를 제법 부드럽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리도록 붙어먹었는데 함께하면서 둘 사이가 좀 좋아졌느냐 하면, 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소리 참지 마. 어차피 좋아 죽겠는 거 다 알겠는데.”
“으음……!”
“아-. 아니면 물소리를 좋아하나? 네가 조용하니까 물 새는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아! 흐, 진짜! 좀! 조용히 좀, 해애, 아응!”
에녹은 틈만 나면 세라의 귓가에 더러운 말들을 속삭여 그녀의 정신을 오염시켰다.
그 말이 단순히 섹스의 흥을 돋우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건, 단어 사이사이 스며든 가시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고상하신 영웅께서는 가여운 노예를 절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 나는 치료를 하는 중인데 너는 왜 혼자 느끼고 앉아 있냐며 매도했다. 그러면 세라는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에녹은 더 거칠게 허리 짓을 해서 그럼 제 성기를 조여대고 있는 건 누구냐 비난하고, 그러면 또 세라는 제 맘대로 되지 않는 몸뚱어리에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에녹은 저로 인해 몸도 마음도 더럽혀진 노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그 심술 맞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날이 갈수록 쩍쩍 들러붙는 몸의 상성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한 대 세게 치고 싶다는 감상이 울컥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이러다 정력 빨려서 죽는 거 아니야…?’
그렇게 하다가, 하다가, 어쩌면 침대 위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어느 날…….
‘살았다.’
눈을 뜬 세라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몸이 다 나았다는 걸 깨달았다.
“…….”
시험 삼아 손을 움직여 본다.
언제나 잠에서 깨어날 때면, 에녹이 곁에 있어도 몸을 지배하던 미묘한 무게감이 사라지고 없었다.
진짜로 나았잖아…?
세라는 며칠 만에 되찾은 쾌적한 몸 상태에 감격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아.”
그러다 당연하다는 듯이 곁에 누워 있는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세라를 향해 옆으로 돌아누운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당당히 내보인 에녹은 생각에 골몰한 눈으로 세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걸 죽일까, 살릴까. 고민이 깊은 얼굴이었다.
“살려 주세요.”
그러자마자 살려 달라는 말이 튀어나온 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에녹은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냐는 얼굴로 픽, 입술을 비틀었다.
“안 죽인다니까?”
“……딱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시길래.”
“…….”
혹시나 해서 해 본 말이었는데 에녹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무언 속의 긍정을 읽어 낸 세라는 더는 나대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말해 봐.”
그때, 에녹이 뜬금없이 뭔가를 말해 보라고 했다.
무엇을? 이라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세라가 계속 말하고 싶어 하고, 에녹이 계속해서 듣지 않은 이야기라고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뒤끝이 더럽게 긴 주인님께서 드디어 괘씸한 노예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세라는 이번에도 중간에 말이 끊길 것을 대비하여, 처음부터 바로 간단명료하게 핵심을 꺼내 들었다.
“저는 결코 주인님을 밀치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요!”
에녹의 눈썹이 까딱였다.
“그럼?”
“원래는 제가 뛰어들려고 했었는데….”
“……뭐? 잠깐.”
그녀가 막 본격적으로 말을 이어 나가려는데 에녹이 가로막았다.
못 들을 말을 들은 양 있는 대로 인상을 쓴 그가 험악한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너 그거 정말이야?”
“그럼요.”
세라는 결백하다는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세라는 확실하게 에녹을 노려 정확하게 원하는 곳으로 밀쳤다.
당시에는 형량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일단 쟤라도 밀어서 폭발을 덮어 보자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그 과정에 어떠한 실수도 없었다.
“습격자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게 딱 봐도 폭탄 같아서, 주인님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는데-.”
하지만 지금의 세라는 그런 불순한 생각 따위 조금도 품은 적 없는 척 충성스러운 노예를 연기했다.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
“얼마나, 놀랐는지…….”
“…….”
헌신을 넘어 희생의 의지가 철철 넘치는 해명에도, 주인님이 영 기뻐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당연한 일이다.
헌신이나 희생을 입에 담기에는 평소 행실이 썩 좋지 못했다는 건 에녹도 알고 세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너도 어이없지? 나도 어이없어.
세라는 평소에 보여 주었던 행실과 전혀 다른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끼는 게 아니라, 이렇게 허접한 거짓말을 쥐어짤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한심해서였다.
그녀는 이것보다 거짓말을 더 잘할 수 있는데, 진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너무나도 통탄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확신하고 있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반복되는 에녹 소서의 뒤끝을 완전히 끊어 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자의식이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은 놈이니, 널 위해 이 한 몸 불살라 보려다 잘못됐다 우기면 방금처럼 은연중에 죽여 버릴까 고민하는 일은 없어질 테다.
“…주인님이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모든 계산을 끝낸 세라가 힐끗,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
에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세라는 실패를 예감했지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당당히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아아-.”
에녹이 한참이나 늦은 이해의 신호를 보내 왔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러다 사르르 눈가를 접어 예쁘게도 웃었다.
“몰랐네.”
“……?”
“내 노예가 날 그렇게 좋아하는지.”
“어어…… 네?”
사람을 홀리는 그 얼굴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세라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잘못 들었나.
제 귀를 의심한 세라가 미치광이를 보는 눈빛으로 에녹의 대답을 기다렸다.
“역시, 여태까진 부끄러워서 괜히 틱틱 댄 거구나.”
“……?”
그 표정을 못 본 척 무시한 에녹이 자연스럽게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예쁜 미소를 유지하는 두 눈이 감동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반짝였다.
“날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니 너무 낭만적이다.”
“……어어.”
“정말 신선하다. 노예야. 너 같은 애는 처음이야.”
“……어어어.”
에녹은 혀에 기름이라도 발렸는지 매끄럽게 세라의 의도를 포장해 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살얼음을 걷는 듯 심각하던 분위기가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갑자기 순조롭게 흘러가는 대화에 세라가 도리어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식으로든 에녹의 마음을 달래려고 시도한 말이긴 한데, 의도했던 것보다 지나치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꼈으나, 에녹의 해석이 너무 완벽하고 예뻐서 감히 손도 대지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그리하여, 에녹이 마지막 리본까지 예쁘게 매듭을 지었을 때.
“그럼 앞으로는 내 말이라면 껌뻑 죽겠네?”
세라는 거의 에녹의 앞에 배를 까고 드러누운 충견이 되어 있었다.
“……어오.”
짐승 같은 감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세라가 쉽사리 대꾸하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그러자, 에녹이 거짓말처럼 미소를 거두었다.
“왜. 아니야?”
거짓말인가 보지?
차디찬 시선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린다.
세라는 그제야 자신이 막다른 길에 몰려 있음을 깨달았다.
“……맞아요. 저는 주인님 말씀이라면 아주 그냥 껌뻑…. 죽, 죠…….”
“느낌이 왔어.”
그녀의 대답에, 에녹이 쾌활하게 흥얼거렸다.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지 않아서 묻지 않았으나, 그는 부득불 자신의 심정을 속속들이 털어놓았다.
“난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세상에 용서 따윈 없다고 하던 양반이 서슴없이 그것을 입에 담았다.
아아, 그 따스한 미소를 마주한 순간, 세라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악수하자. 노예야.”
다정하게 목소리를 내려 깐 에녹이 세라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
바라마지 않던 종전 선언이었으나 세라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완쾌해 멀쩡해진 정신이 저 손을 잡아선 안 된다고 절규했다.
“잡아. 어서.”
하지만 해야 한다.
“하하…….”
자신을 뚫어 버릴 듯 내리쬐는 태양 같은 미소를 마주 보며, 세라가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더듬더듬 에녹의 손을 마주 잡은 그녀는 이쯤에서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상황, 이 시간에서는…….
에녹 소서가 자신보다 더 거짓말을 잘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