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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45화 (45/131)

#45

가시에 꿰뚫린 협곡.

새카맣게 죽어 버린 땅을 피해 험준한 산맥을 오르다 보면, 험준한 바위 사이 미묘하게 인공적으로 깎여 나간 평지와 작은 동굴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든 산짐승이나 얼씬대던 그곳은 잠깐 사이에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침식당한 대지 사이, 유일하게 멀쩡한 녹음을 유지하고 있던 그곳은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 찬 그곳에는 깔끔하게 베어져 나간 시신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토록 많은 인원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협곡에는 이렇다 할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공격을 주고받을 새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산짐승 하나 울지 않고, 바람조차 외면한 그곳은 명확한 죽음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허공이 녹아내리며 누군가가 그곳에 내려앉았다.

새카만 망토를 깊이 눌러쓴, 키가 큰 남자였다.

“…….”

담담하게 참상을 둘러본 남자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오렴.”

부스럭.

그에, 무너진 동굴 옆,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덤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썩였다.

“와, 와 주셨군요! 심판관님……!”

덤불을 뚫고 튀어 오른 생존자가 네발로 기어 남자의 발치에 닿았다.

그는 이곳을 담당하던 안타레스의 말단 책임자 중 하나였다.

섬뜩한 죽음에서 살아남은 이는 완벽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카만 망토는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겉으로 드러난 얼굴과 손에는 상처와 먼지로 엉망이다.

남자를 향해 고개를 조아린 책임자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덜덜 떨어댔는데, 스스로 그것을 멈추거나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목덜미에 들러붙는 소름 끼치는 죽음의 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초라한 뒷모습이 가엽지도 않은지, 심판관이라 불린 남자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얼마나 죽었지?”

“저, 전부…… 당했습니다.”

“흐음-.”

남자가 낮게 침음했다.

예상은 했지만 건질 것 없는 결과가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망토에 가려진 남자의 눈동자에 불길한 마력이 깃든다.

그 눈으로 협곡을 모조리 둘러본 그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협곡 초입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안타레스 교원들의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길을 따라 피어나는 새빨간 혈흔.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제 발아래 엎드려 있는 책임자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쪽으로는 분명 평소처럼 하라고 일러뒀을 텐데….”

시그너스 길드의 서쪽, 그곳을 틀어막고 있는 험준한 협곡 깊숙이 숨겨진 이곳은 남자가 유용하게 써먹던 요충지 중 하나였다. 눈엣가시 같은 시그너스 길드와 가까이 위치해 있어 언제든 원하는 때에 기습을 감행하여 그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비록 갈수록 방어가 탄탄해져 결정타를 날리기는 어려웠으나, 그 또한 남자가 원하던 바였고, 실제로 그는 이곳을 통해 그동안 제법 쏠쏠한 재미를 봐 왔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협곡에 숨어 있는 서쪽의 요충지에서는 소규모의 인원만 내보내 순간적으로 시그너스 길드의 방어 동선을 낭비시키는 일을 맡겼었다.

하지만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쓸데없이 열정적인 제 부하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버린 모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신관님! 하, 한 번도 이렇게까지 반응한 적은 없었는데…! 그…. 여러 번에 나눠서 보내면 더 오래 잡아 둘 수 있으니까, 그렇게, 했던 거였습니다만…. 서, 설마 여기까지 쫓아와서 전부 몰살시킬 줄은…….”

제 죄를 알고 있는 생존자가 허겁지겁 변명을 쏟아 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대체 왜,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니.”

생존자와는 달리, 남자는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멍청한 남자가 실패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 남자를 귀찮게 만들지 말라고.”

에녹 소서.

그 변덕이 심한 영웅을 성가시게 했기 때문에.

움찔, 정곡을 찔린 남자가 조아렸던 고개를 들어 필사적으로 심판관에게 매달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어떻게든, 이번 일은… 어떻게든 만회를…!”

“……정 그러면, 본 것이나 이야기해 보렴.”

애처로울 정도로 간절한 그 모습에, 심판관이 마지못해 기회 하나를 쥐여 주었다.

시선만 내려 생존자를 내려 본 남자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에녹 소서가, 성검을 사용하던?”

“……예?”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생존자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숨조차 멈춘 남자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머릿속을 다급히 헤집었다.

성검을…. 사용했던가?

에녹 소서가 이곳을 쓸어 버릴 때 무슨 검을 사용했지?

열심히 기억을 쥐어짜 보지만, 그 남자가 워낙 벼락처럼 들이닥쳤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선명히 기억나는 장면이 몇 없었다.

그나마 건진 기억 속에서도, 에녹 소서가 무엇을 가지고 사람들을 베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사람의 목숨이 잡초처럼 잘려 나갔기에, 감히 휘둘러지는 검을 제대로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냥 검인지, 아니면 심판관이 말하는 성검인지 알아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왜냐하면 남자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성검을 목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을, 휘두르기는 했는데 그게 성검인지는 잘…….”

결국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지 못한 남자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럼 사용하지 않은 거로구나.”

있으나 마나 한 대답에 심판관이 눈에 띄게 실망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자신이 마지막 기회를 놓쳤음을 감지한 생존자가 두 눈을 질끈 감았던 그때였다.

“우선은 돌아가는 게 좋겠다.”

이대로 버림받는가 싶었는데, 심판관은 의외로 선뜻 함께 돌아가자 제안을 해 주었다.

“그, 그 말이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반드시! 제 온몸을 바쳐 교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설마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남자가 이마를 연신 땅에 박아 가며 감사를 표했다.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심판관은 감격에 겨워 들썩이는 자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벌어진 망토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기다란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겉으로 드러난 손이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데도, 그는 제 발치에 조아린 남자를 어린아이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정하기도 하셔라.

이때까지도 남자의 기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올랐다.

그는 진심으로 이토록 처참한 성과를 내고도 자신을 용서해 준 안타레스에 충성을 다하리라 각오를 다졌다.

“관 속에서도 그 마음 변치 말렴.”

적어도, 심판관의 입에서 ‘관’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심판관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질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엎드려 있던 땅이 울렁거리며 살아 있는 생물인 양 기지개를 켰다.

곧이어 입을 쩍 벌린 대지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남자의 몸을 덥석 물어 삼켰다.

“아, 안 돼! 안 됩니다! 심판관님, 제발!”

하체를 먹힌 남자가 끌려가지 않으려 버텼다.

바닥을 긁는 손끝이 갈라져 피가 비치지만 개의치 않고 다급히 말을 쏟아 냈다.

“저는,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시, 시그너스 길드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콰직.

어떻게든 제 쓸모를 피력하려던 남자는 결국 말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고 완전히 땅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는 관 속에서 안타레스교를 위해 마력을 쥐어짜 낼 것이다.

교에서 친히 새겨 준 마력 회로가 완전히 망가지는 날까지…….

“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다시 침묵만이 남은 공간을 돌아보며, 심판관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보다 더 잘 아는 이를 찾았으니.”

물은 자는 듣지 못할 답을 돌려준 그가 붉은 입술을 쭉, 찢어 웃었다.

***

어지러운 방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원형의 테이블을 둘러앉은 시그너스 길드의 책임자들은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원수에 꼭 맞춰 마련한 의자는 몇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하나는 테이블 대신 구석 자리를 택한 레니스의 자리였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진 창가에 선 기드온의 것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이 자리에 없는 에녹의 몫이었다.

“으음…….”

살얼음판 같은 침묵을 깬 사람은 마커스였다.

그는 무거운 눈으로 제집에 모여든 이들의 얼굴을 빙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모인 건 아마 같은 이유 때문이겠지.”

그에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책임자들이 일시에 그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들에 담긴 것은 명백한 살기였다.

혼자서도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 뿜어내는 살벌한 기운으로 인해 공간을 가득 채운 공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마커스는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들이 이토록 민감하게 곤두선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시그너스 길드를 강타한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습격 사건 때문이리라.

“당신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네. 마커스.”

그 예상을 증명하듯, 붉은 머리의 여자, 발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쥔 작은 단검을 장난감처럼 휘둘린 그녀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습격, 그 시기부터 경로, 평소와 달랐던 서쪽의 습격 방식, 중간에 굳이 동쪽을 노린 수법까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롭지.”

“확실해.”

그녀의 발언을 시작으로,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서로 간에 긴밀히 의견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화가 매끄러웠다.

무언의 합의가 이뤄졌음을 눈치챈 마커스가 으아-. 하고 근심 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보가 새고 있어.”

아마 이다음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나서는, 이전과는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커스는 해야 했다.

좌중을 바라본 그가 진중한 낯으로 선언했다.

“누군가, 안타레스와 내통하고 있다.”

시그너스 길드에 안타레스의 첩자가 숨어 있다.

그 씁쓸한 현실을 그들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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