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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46화 (46/131)

#46

“…….”

“…….”

테이블 위에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겉으로는 안타레스의 습격도 막아 내고, 지속적으로 길드를 괴롭혔던 서쪽 협곡의 은신처도 전멸시켜 대승을 거둔 것처럼 비치고 있지만, 굳이 승패를 따지라고 한다면 시그너스 길드의 철저한 패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시그너스 길드가 입은 피해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심각했다.

하필 기습이 이루어진 시기가,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책임자들이 부하들을 이끌고 외부에 나가 있는 동안 이뤄졌던지라 평소에 비해 더더욱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길드에는 그들의 대장인 에녹이 남아 있었다지만,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는 한 명뿐이었기에 때문에 모든 사람을 지켜 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서쪽 방벽은 지켜 냈지만, 수년간 철옹성처럼 길드를 지켜 주던 동쪽 방벽이 반파되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교활한 안타레스 놈들이 동쪽 방벽의 경비가 교대하는 그 순간을 정확히 노려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아직까지도 실종자를 찾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건 아무래도 건물이었다.

안타레스 놈들은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척, 결과적으로는 당장 없으면 곤란한 건물들만 쏙쏙 골라 무너뜨렸다.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 말들을 관리하는 마구간, 정화의 돌을 저장하고 있는 창고가 망가져 당분간 가시 공략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다.

주거 지역 건물들도 적지 않게 피해를 입어 겨울이 가까워지는 날씨에 갈 곳을 잃은 길드원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내부가 온통 엉망이라, 당장 내일부터 밀려든 상인들을 안으로 들이지도 못하고 전부 돌려보내야 했다.

결국, 시그너스 길드는 당분간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안으로도 들이지 못하는 일시적인 고립 상황이 된 것이다.

“제길…!”

현 상황이 분했는지, 마커스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거칠게 테이블을 내려쳤다.

“대체 어떤 녀석이야?!”

사자 갈기 같은 곱슬머리를 아무렇게나 방치한 남자의 이름은 사이온으로, 저번 회의 때는 외부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한 이였다. 이중 가장 다혈질인 그는 제 눈앞에 그 첩자가 있기라도 한 듯 부리부리한 두 눈을 한껏 부라리고 있었다.

“누구겠나.”

그의 분노에 응답해 준 사람은 기드온이었다.

혼자 다른 일행인 양 창문 너머로 부서진 길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비로소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가장 의심스러운 자가 가까이에 있는데.”

정제된 의심은 명확하게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었다.

“기드온…….”

그 의도를 알아챈 길드원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신중한 그가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의심하는 인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대장이 들여온 면역자 노예. 마침 그녀가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습격이 발생했으니 그쪽에서 정보가 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행여나 밖에 나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지금 그 노예 잘못 건드리면 안 되는 거 몰라?”

이마를 짚은 발레리가 골치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조로 주의를 주었다.

“맞아. 걔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녀의 말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언제나 발레리의 곁을 졸졸 쫓아다니는 주근깨 소녀 베니였다.

안타레스의 습격이 있고 난 후, 길드 내에서 대장의 면역자 노예에 대한 인식이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혔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청정수 같은 시그너스 길드에 감히 면역자 따위가 기어들어 왔다며 질색하던 이들도, 지금은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들어왔느냐며 면역자를 찬양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듣기로는 그 면역자가 동쪽의 대피 지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했다.

제 몸 상하는 것도 괘념치 않고 사람들을 구해 냈다고 말이다.

그 용맹하고 헌신적인 모습이, 이제나저제나 구조대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뒤흔든 모양이었다.

상념을 끊어 낸 베니가 생각을 좀 해 보라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첩자 노릇을 하기엔 길드에 있던 시간이 너무 짧지 않아?”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그 세라라고 하는 면역자 노예는 용의선상에 오를 수조차 없었다.

적들은 시그너스 길드에 깊이 관여한 자가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정보들을 모조리 수집해 한 방을 노렸다.

그 여자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 짧은 사이에 길드의 중요한 요충지나, 주요 병력들의 일정, 동쪽 방벽의 경비 교대 시간 등을 알아내기에는 물리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동쪽의 생존자들 말에 의하면, 기습해 온 안타레스교의 면역자들이 여자를 보자마자 ‘배신자’라며 목을 졸라 죽이려 들었다고도 했다. 그 급박한 상황에 굳이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아마 이 또한 들은 그대로의 사실일 터다.

그러니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가장 첩자로부터 거리가 먼 존재는 그 여자였다.

“네가 면역자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때와 장소를 좀 가리는 게 어때?”

정리를 끝낸 베니가 기드온을 향해 빈정거렸다.

“그래. 기드온. 지금은 내부를 헤집고 다닐 때가 아니야.”

그 말에 동조한 사람은 마커스였다.

파도가 닿지 않은 깊은 바다처럼 침착하게 가라앉은 그가 좌중을 돌아보며 확실히 못 박았다.

“지금은 무너진 길드를 재건하는 게 먼저다. 배신자를 찾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에 몇몇 반발심이 인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서서 마커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선순위를 정해준 마커스는,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대장의 노예가 배신자 같지는 않군.”

그와 의견이 통한 것에 자신감이 일었는지, 베니가 아까보다 더 당당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 여자가 정말 첩자라면, 대장이 칩거까지 해 가면서 간호를 해 줄 리-.”

그러다, 목덜미를 스치는 한기를 느끼곤 말을 늦추었다.

“…….”

칼날을 목에 가져다 댄 것 같은 그 살벌한 냉기는 바로 곁에 앉은 발레리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베니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기드온이 면역자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가 에녹의 여성 편력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대장은 왜 거기 들어앉아 있는 거야? 길드에 의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자칫 어색해질 뻔한 분위기를 구원한 건 눈치 없이 화만 많은 사이온이었다.

그는 이 중요한 자리에 에녹이 빠진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다시 한번 쾅! 테이블을 내려쳤다.

“이런 상황에 먼저 나서서 복구 계획이라도 세우면 어디가 덧나나?!”

자기 노예랑 시시덕거릴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흥분을 이기지 못한 그의 말투는 점점 원색적인 비난에 가까워졌다.

“사이온.”

그때, 마커스가 냉정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지 마라.”

단 한마디로 테이블 위의 온도를 뚝 떨어뜨린 그가 시선만 움직여 사이온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대체 뭐가 불만이냐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따지고 들었다.

“대장이 언제 이런 일에 도움 주는 거 봤어? 새삼스럽게 왜 이래?”

“그, 그거는….”

그 기세에 밀린 사이온이 깨갱,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건 그렇지.”

“마커스 말이 맞아요.”

틀린 말 하나 없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잠자코 듣고 있던 발레리와 베니도 마커스를 두둔했다.

그래. 언제 에녹 소서가 길드 살림을 살뜰히 챙겨 준 적이나 있었나. 언제나 게으른 고양이처럼 집 안에 들어앉아 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작자였다.

“그리고, 그런 일로 네가 화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어차피 너도 이런 일엔 영 소질 없잖아.”

“크흑, 그으거느은…….”

묵직한 사실만을 담은 그 한 방이 연달아 사이온을 강타한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착석했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베니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

“하긴, 여기 있는 누구도 대장 욕하면 안 되죠. 행정 일은 사실상 레니스 혼자서 도맡아 하는-.”

“……훌쩍.”

너스레 섞인 베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레니스가 뜬금없이 울음을 토해 냈다.

또다시 지뢰를 밟아 버린 베니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방정맞은 주둥아리가 가만히 있던 레니스의 눈물 버튼을 눌러 버린 모양이었다.

“울지 마라. 레니스.”

서럽게 우는 레니스를 달래 준 사람은 의외로 기드온이었다.

누가 화를 내건, 으스대건 무시로 일관하던 그는 어느 틈에 자리를 옮겼는지 웅크려 우는 레니스의 등을 다정히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고작 그런 놈팡이 하나 때문에, 성실한 청년인 네가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녹을 돌려 까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레니스가 슬퍼하는 이유가 에녹 때문이 아니라, 제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이쯤 되면 레니스는 이용당한 거고 기드온은 그저 에녹을 욕하고 싶었을 뿐이 아닐까?

지극히 현실적인 의심을 겨우 억누르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주춤주춤 일어서 레니스에게로 몰려들었다.

평소였다면 누가 울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위인들이었지만, 다들 그간 레니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기에 조금쯤은 미안한 기색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길드가 워낙 심각하게 박살이 났으니,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당사자로서 얼마나 막막한 심정이겠는가.

“너무 서럽게 생각하지 마. 너만큼 똑똑한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하냐.”

가장 먼저 다가간 마커스가 투박한 손길로 바짝 마른 등을 서툴게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그의 위로가 오히려 더 심금을 울렸는지, 레니스의 울음이 한층 더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도 네가 잘 관리해 준 덕분에 지금 길드에 여유 자금이 꽤 남았잖아. 그건 모두들 고마워하고 있어.”

“맞아. 그 돈으로 부서진 건물 다 고치면 되겠다.”

“그럼 길드도 금방 정상화될 테고, 우리는 첩자를 찾는 일에 집중할 수 있잖아?”

다들 평소에는 오글거려서 굳이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고마움을 주섬주섬 건네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레니스는 인생이 끝나 버린 사람처럼 한참을 울부짖었다. 생각보다 더 격렬한 울음에 다들 어색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그동안 그가 받았던 압박감이 이다지도 컸느냐며 놀라워했다. 그 놀라움마저 사그라들어 슬슬 지겨워질 때 즈음, 히끅대는 숨을 겨우 삼켜 낸 레니스가 힘겹게 말문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어, 어, 없어요…….”

없다고.

“응?”

“뭐가?”

“그 돈….”

너희가 말하는 그 돈.

레니스가 열심히 일해서 남겨 놓은 길드의 여윳돈.

처참하게 망가진 길드를 재건할 수 있는 그 돈.

“대장이 들고 튀었단 말이에요!”

그 소중한 돈이, 이젠 사라지고 없는 돈이라고 말이다.

“…….”

“…….”

그에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굴던 사람들이 전부 말을 잃고 침묵했다.

레니스의 말을 곱씹는 그들은 첩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 까마득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마커스였다.

까드득, 콰직.

손힘만으로 테이블을 부숴 버린 그가,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

“아-. 귀 간지러워.”

누워서 빈둥거리던 에녹은 갑자기 밀려오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태평한 혼잣말을 지껄인 그가 제 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노예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명령했다.

“노예야. 이리 와서 내 귀 좀 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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