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예에? 그 정도는 스스로 하시는 게-.”
난데없이 이상한 요구를 들은 세라가 질색하며 되물었다.
완쾌되자마자 침대에서 내쫓긴 그녀는 얄짤 없이 노동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에녹이 오늘 안에 이 집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치우라 으름장을 놓은 바람에,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오늘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야 할 판이었다.
“해 줄 거지?”
“……스스로-.”
“넌 날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충성스러운 노예잖아.”
“스…….”
억지로 눈을 접은 세라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려 말문을 열자마자, 에녹이 쏜살같이 ‘그 발언’을 해 버리는 통에 도저히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가 되었다.
내가 저 말 왜 안 하나 했다!
어김없이 튀어나온 충성스러운 노예 타령에 세라가 지긋지긋한 표정으로 치를 떨었다.
이럴 거면 믿는 척이라도 하지를 말던지.
세라의 변명이 그의 쪼잔한 마음을 자극했는지, 에녹은 말끝마다 그녀의 발언을 걸고넘어지며 압박해 왔다.
“설마,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지 않겠지.”
저거 봐, 대답 없으니까 바로 정색하잖아.
세라는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녹을 짜증스럽게 흘겨보았다.
“전혀요. 사실 너무너무 하고 싶은 일이었답니다.”
말과 행동이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으나 둘 모두 그쯤은 부드럽게 넘어갔다.
거짓말은 한번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 했던가.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긴 둘은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으로 충성스러운 노예와 자애로운 주인님 역할을 억지로 억지로 유지하고 있었다.
똑똑, 똑.
그때, 지난 며칠간 찾아오는 이 없던 집에 누군가 찾아왔다.
두 번 그리고 한 번 끊어 치는 노크.
에녹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세라는 모르는 암호였다.
“앗, 주인님. 손님이 오신 모양이에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세라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후다닥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아, 진짜. 등 뒤로 에녹이 짜증스럽게 탄식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노예를 골려 줄 기회를 방해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쌤통이다.
킥킥댄 세라가 일부러 뜸을 들이며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금이라도 더 에녹을 애태우기 위해서였다.
쿵쿵, 쿵.
그때,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처음보다 더 세게 두드려댔다.
“네, 지금 열어 드…….”
급한가? 문이 다 들썩거리네.
고개를 갸웃거린 세라가 성질 급한 방문자를 위해 달칵, 문고리를 돌린 그 순간.
쾅쾅, 콰직!
“……!”
망치로 두드리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을 뚫고 팔 하나가 튀어나왔다.
“뭐, 뭐야!”
맨손으로 두꺼운 문을 부수는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란 세라가 뒤로 쪼르르 물러났다.
마지막에 그 소리는 절대 인간의 몸에서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문에 뚫린 구멍 너머로 나타난 건 도구 따위 하나도 없는 맨손이었다.
“……?”
놀란 건 에녹도 마찬가지였는지, 허리가 부러진 것처럼 내내 드러누워 있던 그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세라는 화를 면하고 싶은 마음에 부득불 그의 등 뒤로 비집고 들어가 단단히 숨었다. 에녹이 별꼴이라는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투둑, 투두둑.
그사이 문을 뚫고 들어온 손이 안쪽의 면을 더듬어 문고리를 찾아내 돌렸다.
달칵, 바깥에서 쳐들어온 팔이 스스로 문을 열어 버리는 장면은 제법 공포스러웠다. 차라리 전부 부수고 들어오는 게 덜 무서울 뻔했다.
끼이익, 낡은 나무 문이 열린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 경첩이 나가 버렸는지 반쯤 열리던 문이 너덜거리며 털썩, 안쪽으로 쓰러져 버렸다.
마침내 뻥 뚫린 시야 덕에 세라는 그 너머에 서 있는 마커스를 알아보았다.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선 그는 온통 새카맣게 칠해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세라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역광으로도 형태가 뚜렷이 보이는 특이한 수염 모양 때문이었다.
“후-.”
마커스가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입김이 옆으로 길게 흩어졌다.
“에녹 소서.”
이름을 부른다기보다는 갈기는 것에 더 가까운 호명이었다.
쿵, 마커스가 집 안으로 한 걸음 발을 들여놨다. 분명 사람의 발소리일 텐데 바위가 들어앉은 것처럼 쿵, 소리가 나며 집이 흔들렸다.
세라는 그 순간 집 안에 곰이 들어선 것 같은 섬뜩한 위협을 느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지.”
후후후, 음산한 웃음을 지은 마커스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뻥 뚫린 문틀을 꽉 채운 몸이 위아래로 들썩이는 모습이 여간 열받은 게 아닌 것 같았다.
“네가 한번은 큰 사고를 칠 날이 말이야…….”
말투만은 침착한 마커스의 두 발이 완전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세라는 알았다. 지금의 그는 결코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어뜨린 두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는 커다란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멀리서 보아도 마커스를 이루는 근육들이 팽팽히 부풀어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그게 꼭, 어디서부터 앞발을 휘두를까 고민하는 야생곰 같았다.
“…….”
흐익, 헛숨을 들이켠 세라가 에녹을 짤짤 흔들며 속사포로 속닥였다.
“주, 주인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대체 무슨 개짓거리를 하고 다녔길래 사람이 곰으로 변했나.
그녀는 얼른 가서 책임지지 못하겠느냐며 에녹의 등을 앞으로 꾸욱, 꾸욱 밀어댔다.
“…….”
못 이기는 척 일어선 에녹이 성가셔 죽겠다는 태도로 마커스를 향해 다가갔다.
“마커스. 왜 멀쩡한 남의 집 문은 부수고-. 윽.”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 마커스에 의해 그대로 멱살이 잡혔다.
날쌘 곰처럼 에녹을 낚아챈 마커스는 그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기세로 쒸익, 쒸익 거친 숨을 내쉬었다.
결코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 굴욕적인 상황에, 에녹의 이마에도 불끈 핏줄이 솟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덩달아 표정을 굳힌 에녹이 차가운 눈으로 마커스를 노려보았다가.
“에녹. 에녹. 에녹 소서.”
“……!”
곧장 마주친 시선에 헛,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에녹을 바라보는 마커스의 동공이 텅 비어 있었다.
온통 새카맣게 칠해진 구멍은 에녹의 정신을 빨아들일 듯 끝도 없이 꺼져 들었다.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심연 속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분노, 절망, 배신, 후회, 체념, 살기…….
차례대로 나타났다 한데 섞여 뭉그러지는 혼돈.
그 사이 소용돌이치는 광기와 마주한, 에녹은 본능적으로 머리털이 쭈뼛 섰다.
“너…… 진짜 열받았구나?”
아,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에녹은 실로 오랜만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커스는 웬만해서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타고난 성정이 온화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인내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진심으로 화를 내면 상대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
순식간에 공기를 찢으며 내질러지는 주먹에 에녹이 긴급히 몸을 뒤틀어 피했다.
콰직! 빗맞은 주먹이 벽을 뚫고 들어갔다. 정확히 에녹의 머리가 있던 지점이었다.
“미친.”
그 광경을 확인한 에녹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방금 전은 정말 위험했다. 마커스가 옷을 꽉 잡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저 주먹을 맞을 뻔한 것이다.
너덜거리는 앞섶을 움켜쥔 에녹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잠깐, 말로 하자. 마커스.”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에녹이 성난 곰을 달래려는 사육사처럼 대화를 청했다.
마커스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어…….”
콰직, 박혀 있던 주먹을 뽑아 든다.
손을 털어 나무 부스러기를 털어 낸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묻는다.
“내가 너에게 뭐 그리 큰 걸 바랐던가?”
부우욱,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왔다.
에녹은 뒤로 물러서며 흉기와도 같은 공격을 피해 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괜찮고.”
콰광! 세 번째 주먹이 벽을 가른다.
이제 응접실과 부엌 사이에는 커다란 창문이 하나 생겼다.
“온 세상 여자랑 뒹굴어도 괜찮고.”
그리하여 네 번째.
콰르릉. 천둥소리를 내며 바닥이 갈라졌다.
으어억, 세라가 서 있는 곳까지 진동이 전해져 두 다리가 순간적으로 후들후들 떨렸다.
“약이든 술이든 빠져 살아도 괜찮다고 했었지.”
마커스가 깊이 박힌 주먹을 빼내며 몸을 일으킨다.
후드득, 주먹에 딸려 올라온 파편들이 모래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에 세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다 큰 성인 남성에게 저렇게까지 오냐오냐해 줬단 말인가? 과연 그릇이 남다른 자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세라는 저 정도로 에녹에게 관대하게 굴었던 남자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춘 마커스가 벼락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우우웅. 공기를 가른 주먹이 에녹의 명치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뒤로 더 물러나려던 에녹의 등이 벽에 닿았다. 어느새 그의 뒤는 시계를 잔뜩 걸어 놓은 벽이었다.
막다른 길이라는 걸 느꼈는지 에녹이 힐끗 곁눈질로 벽을 확인했다.
세라는 그가 옆으로 빙글 돌아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뻐억, 가공할 만한 타격음과 함께 마커스의 주먹이 그의 명치에 정통으로 먹혀들었다.
“윽……!”
낮게 신음한 에녹이 불편한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니, 저걸 왜 처맞아…. 의외의 결과에 세라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길드 돈에 손대는 건 괜찮다고 한 적 없어.”
하지만, 마커스에게는 의외가 아니었는지 순조롭게 하던 말을 이어 나가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에녹에게 한 방 먹인 그가 드디어 방긋 웃었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수염 난 아저씨는 마음이 절로 따뜻해질 정도로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그 꼴로 저러고 있으니 더 미친놈 같았지만.
“그 많은 돈을 네 애인 용돈으로 쥐여 주는 건 더더욱.”
으득, 이를 간 마커스가 쾅! 하고 제 머리로 에녹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그 또한 똑같이 인간의 뼈를 가진 존재일 텐데, 꼭 무쇠로 인간을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아아-.”
마침내 밝혀진 기습의 이유에 세라가 비로소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국 에녹이 빼돌린 그 막대한 자금 때문에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아…. 난, 또… 뭐라고.”
그에 에녹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푹, 새어 나왔다.
맞을 만했다고 생각하는 세라와는 달리, 에녹은 뭐 이런 시시한 일로 과민 반응이냐는 얼굴이다.
마커스의 주먹을 밀어내며 몸을 바로 한 그가, 떳떳하게 턱을 치켜들었다가.
“길드 복구 비용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윽!”
“어딜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어!”
분개한 마커스에게 멱살을 붙들려 다시 쿵, 하고 벽에 처박혔다.
어머, 에녹을 쥐잡듯이 잡는 박력에 세라가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을 구경했다.
삐걱. 에녹의 뒤통수에 눌린 시계가 쇳소리를 내며 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말도 못 하게 하는 행동에 본인도 열이 받았는지, 에녹이 제 멱살을 틀어쥔 두툼한 주먹을 떼어 내며 큰소리를 떵떵 쳐댔다.
“아, 글쎄. 지금 당장 셀레네한테 가서 찾아다 준다니까!”
조금 모양이 빠지긴 하지만, 자신이 돈을 건네줬던 애인에게 찾아가 다시 받아 오겠다는 말이었다.
그 여자가 이름이 셀레네였던 모양이지. 세라는 연극을 관람하는 기분으로 그다음에 돌아올 마커스의 반응을 기다렸다.
“저기…….”
그때, 뻥 뚫린 문 너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커스와 함께 왔지만, 문을 부수며 쳐들어가는 기세가 무서워 바깥에 기다리고 있던 레니스였다.
“……?”
에녹과 세라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레니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마커스뿐이었다.
소심하게 문틀을 부여잡은 레니스가 땅을 파고 들어갈 듯 우울한 목소리로 비보를 전했다.
“그 여자, 지난밤에 야반도주했던데요…….”
에녹의 셀레네는 돈을 들고 튀었노라고.
“…….”
“…….”
“…….”
소리를 잃은 공기는 폭풍 전야의 들판처럼 고요히 고조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레니스가 가장 먼저 활을 놓아 버렸다.
“그러니까, 저희는 이제 끝장이라는 소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