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레니스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직선으로 날아가 에녹과 마커스의 심장을 동시에 꿰뚫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마커스가 무차별적으로 에녹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들었냐! 이 웬수 같은 놈아! 어디! 훔칠 게! 없어서! 길드 자금에! 손을 대! 어?! 네가! 그러고도! 대장이야!”
“아! 잠깐, 마커스!”
에녹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마커스의 공격을 모조리 허용했다.
아무래도, 제 애인이 돈을 들고 튀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우, 우리는 전부 망했어. 죽을 거야. 전부 굶어 죽을 거야……!”
대장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는 장면을 바라보는 레니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절망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세라는….
“이야, 이게 이렇게 되네.”
에녹의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이 상황을 즐겼다.
퍽, 퍽 시원하게 두들겨 맞는 에녹을 보고 있자니 아주 그냥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다시 저놈을 만난 뒤로 고생했던 일들이나, 지난 일주일간 세라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능욕했던 원한이 떠올라 절로 마커스를 응원하게 되었다.
진짜로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잖아?
고리타분한 관용어라고 생각했던 말이 진리라는 것이 눈앞에서 그대로 증명되고 있었다.
역시, 옛말은 틀린 게 없어. 그리고 자고로 전통을 잃지 않고 뿌리를 유지하는 이들일수록 오래가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그너스 길드는 아주 오래오래 잘될 길드였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길드장도 예외 없이 패 버리는 게 아주 배움이 깊고 교양이 넘치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근데, 이 길드 잘못되면 나도 잘못되는 거 아니야?’
그러다 문득, 이러다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제 형량을 확인해 보았다.
400,000,000.
다행히도 세라의 형량은 그대로였다.
눈에 박힌 별의 조각도 잠잠했고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구만.’
자신의 안위를 확인한 세라가 마음 놓고 깔깔거렸다.
“주인님!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언젠가 에녹이 제게 해 준 말을 고스란히 돌려준 그녀가 응원하는 척 주인님을 비웃었다.
귓가를 선명히 파고드는 깐족거림에 에녹이 얄밉다는 눈으로 세라를 노려보았다.
“너……!”
“네가 지금 누굴 노려봐!”
물론, 그래 봤자 괘씸죄만 더해져 마커스에게 흠씬 얻어맞았지만 말이다.
급소만 쏙쏙 골라 때린 그는 자식이 엇나가서 속상한 부모처럼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거야! 대체! 이! 웬수야!”
쫙, 쫘좍, 쫙!
커다란 손으로 등을 내려쳤을 뿐인데 채찍에 생살이 찢기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체벌에 에녹이 마커스의 팔을 뿌리쳤다.
“책임져! 어떻게든 책임지면 되잖아!”
멀찍이 거리를 벌린 그는 대책도 없으면서 냅다 자기가 책임질 수 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당연하지! 네가 아니면 누가 책임져. 이놈아!”
물론 이번에도 마커스의 심기를 건드려 또 주먹질을 당해야만 했다.
“너…! 따라 나와!”
꽤 오래도록 에녹을 두들겨 팬 마커스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저항하지 않는 에녹의 뒷덜미를 질질 끌어 바깥으로 향했다.
그에게 끌려 나가는 에녹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순순히 그 손길에 몸을 맡긴 채였다. 아마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의 마커스를 괜히 더 자극하지 말고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겠다는 작전 같았다. 뭐, 본인이 잘못한 점도 있으니 그 건에 대해서는 불만이랄 게 없었다.
“……야.”
다만, 이 꼴을 대놓고 구경하고 있는 노예가 거슬릴 뿐이었다.
뭘 쳐다봐. 눈 안 깔지?
참으로 모양 빠지는 꼴로 끌려가면서도, 그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제 노예를 단속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호호호.”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그의 노예는 한마디를 지는 법이 없었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였다.
공손한 척 주인을 배웅 나온 세라가 그를 향해 왼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어 그 옆에 가져다 댄 뒤, 낚싯대를 감아올리듯 빙글빙글 돌려댔다.
그리하여 서서히 에녹을 향해 고개를 치켜드는 가운뎃손가락.
그것을 자랑스럽게 치켜든 노예가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는다.
이거나 처먹어.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주인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과 조롱이 반짝반짝 예쁘게도 빛나고 있었다.
“…….”
에녹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그는 지금의 이 굴욕을 잊지 않겠다는 눈으로 세라를 노려보았다.
세라는 어렵지 않게 제 쪼잔한 주인님께서 또 마음이 상하셨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랑곳하지 않고 구연동화라도 하듯 오른손을 요란하게 털어댄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별 가루를 형상화한 것처럼 촤르르 허공을 훑으며 내려온 손이 굳건한 왼손 옆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또다시 올라가는 가운뎃손가락 하나.
쌍 엿을 날린 세라가 그를 놀리듯 두 손을 높이 들어 신나게 흔들어 재꼈다.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게 다시는 저놈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노라 맹세했던 기억 따윈 깡그리 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에녹 소서를 비웃을 수 있지?
눈앞의 달콤한 열매에 매혹당한 세라는 한 치 앞을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현재를 즐겼다.
만면에 웃음을 띤 세라가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여 작별 인사를 건넸다.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어 준 그녀는 마침내, 끌려간 주인님이 보이지 않게 된 순간.
“해방이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청소 때려치워!”
마침내 자유를 찾게 된 세라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응접실을 그대로 방치해 둔 그녀는 룰루랄라 계단을 올라 제게 주어진 작은 방으로 향했다.
에녹의 방에 있는 침대가 훨씬 푹신하고 좋았지만, 일련의 사건 때문에 아무리 편해도 그곳에 눕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고, 좋다.”
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에 들어온 세라가 얼른 이불 속에 몸을 묻었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어도 음란한 말을 속삭이는 사람이 없으니 이토록 쾌적할 수가 없다.
며칠 만에 편-안 해진 정신이 무장을 풀고 스르르 녹아내린다.
일단 낮잠 한번 때리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의식이 기분 좋게 풀어지는 기분에 세라의 입가에는 절로 헤죽거리는 웃음이 샜다.
마커스의 태도로 보건대 에녹이 이 사태를 수습할 때까지 곁에 두고 쥐어짤 기세였다. 그가 빼돌린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레니스가 1년 동안 열심히 길드를 굴려 마련한 목돈이었으니까…….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은 걸리겠지.’
일시적으로 주어진 자유의 기간을 가늠해 보던 세라는 그 기간이 생각보다 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어딜 가든 따라붙어 귀찮게 구는 에녹 소서만 없다면, 저번 습격 때처럼 형량을 왕창 깎는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일단 자고 일어나면, 가볍게 길드 한 바퀴를 돌면서 운명이 꼬인 자가 더 없나 찾아보고…. 내키면 착한 일도 좀 해서 소소하게 형량도 깎아 보고…. 에녹이 없는 일상을 꿈꾸는 세라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간만에 마음 놓고 잠든 세라는 비로소 제게 자유롭고 활기찬 일상이 펼쳐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는 세라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해명을 바라는 얼굴로 제 등 뒤에 붙어 앉은 에녹을 돌아보았다.
다그닥, 다그닥, 세라의 목소리 사이사이 말발굽 소리가 끼어들었다.
분명 에녹 소서가 없는 일상을 꿈꾸며 잠들었는데, 채 하루도 가지 않아 세라는 그와 함께 말을 타고 길을 떠나고 있는 중이었다.
“으음…….”
세라의 질문에 에녹이 대답을 고르는 것처럼 길게 침음했다.
우수에 젖은 눈으로 먼 석양을 바라본 영웅이 세라는 알지 못하는 지난 몇 시간을 회상했다.
마커스가 에녹을 이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집이었다.
설마 제집에 가둬 놓고 주먹질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고.
‘대장…….’
‘레니스 말이 사실이야?’
흉흉한 살기를 두른 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추궁을 당해야 했다.
‘쓰레기.’
‘왜 아직도 살아 있지?’
‘심지어 차였다며? 진짜 한심하다….’
‘언젠가 그 오만이 널 집어삼킬 줄 알고 있었지.’
경멸스러운 눈으로 에녹을 쏘아본 길드원들은 돌아가면서 욕을 한 바가지씩 쏟아부어 준 다음,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길드 자금을 빼돌린 대장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발가벗겨서 거리에 매달아 놓는 건 어때?’
‘도둑질을 했으니 손목을 잘라야지!’
‘좆을 좆대로 놀리다 이 사달이 난 거잖아. 그걸 자르자.’
‘횡령한 돈만큼 맞아야 한다.’
그동안 에녹에게 쌓인 게 많았는지, 내놓는 방법들이 하나 같이 살벌했다.
‘자자, 다들 진정해. 분풀이론 사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날뛰는 이들을 진정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마커스였다.
누구보다 가장 시원한 분풀이를 했던 주제에, 그는 다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점잖은 척 목소리를 깔았다.
에녹의 입장에서 썩 보기 좋은 전개는 아니었지만, 그는 냉큼 분위기를 환기하는 마커스의 말에 탑승했다.
‘맞아. 지금 문제는 이런 사소한 게 아니야.’
짐짓 심각한 척 표정을 굳힌 에녹이 비어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
그 이야기를 굳이 그 타이밍에 한 이유는 마침 들어야 할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서도 있지만, 은근슬쩍 물타기를 통해 자신에게 향하는 매서운 추궁을 피해 보고자 함도 있었다.
‘…….’
‘…….’
역시나 충격적인 소식이었는지, 그를 잡아먹을 듯이 굴던 길드원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녹은 이제 길드원들의 관심사가 다른 쪽으로 분산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횡령을 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 길드가 망하게 생겼는데!’
‘걔도 뭐 길드가 있어야 첩자 노릇을 하지!’
오히려 더 화가 난 길드원들에게 의자로 두들겨 맞았다.
이미 에녹 소서라는 사람에 대해 질릴 정도로 경험한 이들에게 통하기에는 그 의도가 너무나도 투명한 탓이었다.
이번만큼은 레니스도 열받았는지 그 가녀린 팔을 몇 번이나 휘적이며 에녹을 꼬집어댔다.
만족할 만큼 에녹을 손봐 준 이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쥐여 주지 않고 바깥으로 내쫓았다.
‘나가서 당장 돈 벌어 와!’
냉정한 얼굴로 에녹을 내려다본 마커스는 네 횡령 사실을 온 길드에 알리기 전에 냉큼 나가서 돈을 구해 오라 윽박을 질렀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에녹은 그 길로 터덜터덜 일어나서…….
그리하여 지금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잠든 세라를 난짝 챙겨 들고, 거리에 매어진 그나마 멀쩡한 말 하나를 골라 그대로 길드를 나섰다.
“마커스가 날 내쫓았으니까?”
긴 회상을 마친 에녹은 이번에도 구구절절한 사연을 모조리 잘라 낸 뒤 결론만을 입에 담았다.
“그건 말 안 해도 알아!”
물론, 그러겠거니 하고 있던 세라에게는 조금도 새로운 정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에녹 소서가 길드에서 쫓겨난 이유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문제는 저예요. 제가 여기 왜 있냐고요. 그 사람이 내쫓은 건 주인님뿐인데!”
세라가 궁금한 건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느냐다.
도대체. 왜. 돈을 벌러 갈 거면 혼자서 얼른 다녀올 것이지.
그녀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컥 말에 태우느냔 말이다.
“아, 너-.”
난 또 뭐라고.
세라가 한 번 더 역정을 내고 나서야, 에녹은 그녀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했다.
“……너는 뭐-.”
언제나처럼 청산유수로 개소리를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다.
“……?”
왜 다음 말이 없어?
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녹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기다렸는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
세라와 시선을 맞춘 에녹이 여기 말고 다른 쪽을 보란 듯이 어딘가를 눈짓했다.
아마도 말고삐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 쪽이었다.
대체 왜 저러나 싶은 세라는 순순히 에녹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와아-.”
정말 오랜만에 순수하게 감탄하고야 말았다.
에녹이 가리킨 건 자신의 커다란 손.
말고삐와 세라의 손을 감싸 쥔 영웅의 두 손이 그녀를 향해 힘차게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뒤끝 진짜…….”
고스란히 돌려받은 엿에 세라가 너 참 질린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응답하듯 그의 가운뎃손가락이 양옆으로 장난스럽게 까딱거렸다.
이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