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걱정 마. 다 필요해서 데리고 나온 거니까.”
자랑스럽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에녹이 뻔뻔하게 장담했다.
세라는 잘도 그러겠다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거짓말.
순전히 그녀 혼자 편히 지내는 게 아니꼬웠던 것뿐이면서…!
“농담하지 마시고 이쯤에서 전 돌려보내는 게 어떨까요?”
안 그래도 넉넉지 않은 살림에.
세라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에녹에게 자신을 돌려보내 달라 간청했다.
그토록 참혹하게 내쫓겼으니 경비나 지원 같은 것을 제대로 받았을 리 없었다.
즉, 이대로 에녹과 함께 가 봤자 세라를 기다리는 건 가시밭길뿐이라는 이야기다.
고생이라면 살아생전에 지겹도록 해 봤는데 또 고생을? 심지어 에녹 소서와 단둘이?
…억만금을 가져다준대도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제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거든요….”
게다가, 그녀에게는 길드에 남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에녹이 없는 집에서 낮잠을 자는 일이나, 길드에서 배식해 주는 맛있는 식사를 즐기는 일이나, 별의 조각이 갈라져 제 형량을 줄이는 일 같은 거 말이다.
“네 시간은 다 내 건데, 왜 시간이 없어.”
하지만 이 모든 사정은 에녹이 주장하는 소유권 아래 전부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그녀를 멋대로 노예 삼은 주제에, 참으로 뻔뻔한 남자다.
“으음…….”
난 형량을 줄여야 한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의 운명이 꼬여서 내 형량이 늘어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속마음을 가슴속에 묻은 세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네. 쉬운 게 없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비밀에 세라가 답답한 가슴을 퍽, 퍽 주먹으로 내려쳤다.
꽉 막힌 숨을 전부 몰아쉬고 나자, 남는 건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결론뿐이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에녹 소서에게 납치된 이상 자력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겠고.
최대한 빠르게 임무를 달성하고 길드로 귀환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대책은, 있으시고요?”
깐족대는 가운뎃손가락을 고이 접어 준 세라가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무턱대고 끌려 나온 바람에 목적지가 어딘지도 듣지 못했다.
“당연하지.”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품을 뒤져 잔뜩 구겨진 종이 뭉치를 세라에게 안겨 주었다.
“마커스가 의뢰 몇 개를 넘겨줬어.”
“……?”
잘 봐줘도 하얀 쓰레기처럼 보였는데, 그 종이 뭉치는 놀랍게도 시그너스 길드에 정식으로 등록된 의뢰서였다.
명성이 하늘을 찌른다더니, 손안에 잡히는 두께가 제법이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건네받은 세라가 서류를 살폈다.
모르는 지명, 모르는 이름,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냥 의뢰금을 얼마나 주나 정도만 확인했다.
“이거, 너무 많은데요. 물론 전부 다 해도 그 돈은 못 구하지만.”
대충 한 바퀴를 돈 세라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커스가 에녹에게 넘겨준 의뢰는 70여 개 정도였고, 그 의뢰금을 얼추 셈해 봐도 500골드 조금 덜 되는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이걸 전부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최소 반년은 길드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지역이 달라서, 다 못 해.”
다행히 에녹도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바깥을 떠돌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골라.”
한 지역만 가겠노라 선언한 그가 잘 가던 말을 멈춰 세운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어디로 갈까?”
“……?”
그에 반사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니, 갈림길이 보였다.
표지판 하나 없이 덜렁 갈라진 숲길만 있었기 때문에, 세라가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그녀의 강력한 직감이 지금은 왼쪽으로 가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라는 제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왼쪽?”
“그래.”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에녹이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말머리를 꺾었다.
“아-.”
세라가 속았다는 반응을 보이자 머리 위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이러려고 물어본 게 틀림없다.
그녀는 참 어린아이 같은 장난이라며 낮게 실소했다.
유치한 장난을 받아넘긴 세라가 열의가 확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여긴 어디로 가는 길인 거죠?”
“대륙의 북쪽.”
그 이외에는 말해 줘도 모를걸.
짤막하게 방향만 일러준 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세라가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인지라, 처음부터 설명해 주는 게 퍽 귀찮은 눈치였다.
“…….”
다행히 세라는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비록 300년 전의 정보이기는 하지만, 대륙의 북쪽이라면 시실리아 연합이 있던 곳이다.
녹지 않는 만년설이 낀 험준한 산맥에 둘러싸인 그곳은, 외부와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 자급자족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혹독한 곳이었다. 따라서 꽤 많은 왕국들이 한 지역에 몰려 있음에도 영토 분쟁을 벌이기보다는 연합하여 다 같이 으쌰으쌰 힘을 합쳐 사는 곳이었다.
마땅한 자원도 없는 척박한 땅이기는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온천수가 흘러 간간이 그 돈으로 먹고사는 곳이기도 했다. 유난히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그렇게 좋다던데. 세라도 소문으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온천에 몸을 담가 본 적은 없기에 진짜인진 확실치 않았다.
그런 곳에 긁어모을 돈이 있어?
잠시 시실리아 연합에 대해 생각하던 세라는 그래서 그 척박한 땅에 3750골드를 충당할 만한 돈이 흐르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에 휩싸였다.
어째 길을 영 잘못 고른 것 같은 기분에 들고 있던 의뢰서를 뒤적이니, 역시나 북쪽이라고 표시된 의뢰서는 채 열 장이 되지 못했다.
“괜찮은 거예요? 그쪽에서 할 수 있는 의뢰가 몇 개 없는데…….”
그것도 다 합쳐 봤자 겨우 80골드짜리.
물론 80골드도 큰돈이었지만, 3750골드를 전부 메꾸려면 이런 의뢰를 46번은 더 돌아야 했다.
하, 진짜 많이도 해 처먹었네.
이렇게 보니 새삼 에녹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갈취했는지 뼈 아플 정도로 실감이 되었다.
이 많은 돈을 끌어모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통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맞아. 북쪽에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거든.”
에녹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매끄럽게 대답했다.
그럼 왜 이리로 왔어.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저 지독한 남자는 그 한순간 세라를 놀려 주려는 데에 의뢰를 희생시킨 게 뻔할 테니.
“어차피, 의뢰로 돈 벌어 갈 거 아니니까 괜찮아.”
막막한 사람은 세라뿐인 걸까.
정작 당사자인 에녹은 그깟 돈쯤 별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뢰가 아니면요?”
이상한 일이지. 계획이 있다는데,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다.
열의 없이 한숨을 내쉰 세라가 어디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에녹은 자신만이 가진 비장의 수가 있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목숨값.”
의뢰비 대신 목숨값으로 그 비용을 충당하겠다고, 말이다.
“……?”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람.
딱 그렇게 생각하는 눈으로 올려 봐 주니, 에녹이 결백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예전에 북쪽 끝에 사는 부자 노인네 하날 구해 준 적 있거든.”
“그래서요?”
“그때, 살려 줘서 고맙다고 보답을 했었는데, 들고 가기 귀찮아서 두고 왔어.”
“…….”
“그때는 필요 없어서 안 받았지만, 이젠 필요해졌으니 받으러 가야지.”
영웅이라는 사람이 하기엔 좀 구차한 셈법이었지만 나쁠 거 없는 명분이었다.
목숨 빚은 매우 비싸고, 영구적인 거니까. 세라는 에녹이 구해 줬다던 그 부자에게서 최대한 긁어낼 수 있을 만큼 긁어내 하루빨리 귀환 일을 앞당기기로 마음먹었다.
“부디 그 노인네, 3750골드쯤은 거뜬한 부자였으면 좋겠, 아야!”
그토록 악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별안간 바람에 실려 온 무언가가 세라의 눈가에 찰싹, 달라붙었다.
말을 타는 데 익숙지 않았던 세라는 시야가 가려지자 급격히 중심을 잃고 버둥거렸다. 파닥거리는 그녀를 붙잡아 준 사람은 당연하게도 에녹이었다.
“낙엽 조심.”
어렵지 않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안은 그가 얼굴에 붙은 낙엽을 떼어 주며 킥킥거렸다.
그러고는 생명줄처럼 말고삐를 꽉 쥐어 당기고 있는 세라의 두 손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며 주의를 주었다.
“놀랐어도 고삐 당기지 마. 그러다 다친다.”
“……예에.”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세라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모양인지 몇 차례 뚝딱거리다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가 중심을 되찾으니 허리를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세라의 손등을 감싸 쥔 에녹이 이렇게 잡으라는 듯 느슨하게 고삐를 늘여 쥐고 말을 몰았다.
“…….”
“…….”
그렇게 또 한참을 갔다.
산 하나를 넘고, 드넓은 초원을 제법 건너갈 때까지도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세라는 원래도 에녹과 말을 섞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러했고, 에녹도 오늘만큼은 침묵을 지켰다.
다그닥. 다그닥.
조용한 숲길을 적당한 속도로 걸어가는 말발굽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새카맣게 변한 숲에서는 그 흔한 새 한 마리 지저귀지 않았다.
이토록 조용하니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바로 등 뒤에 붙어 앉은 이의 존재가 더욱 선명했다.
세라의 주변에 살아 있는 것이라곤 에녹 소서 딱 한 사람이었다.
이러고 있자니 꼭 멸망한 세상 속에 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참 소름 끼치는 상황인걸.
딱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안 되겠다. 오늘은 이쯤에서 노숙해야겠어.”
고삐를 끌어당긴 에녹이 초원 한복판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대충 하룻밤 머물 만한 자리를 발견한 에녹이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세라를 향해 두 팔을 넓게 벌린다.
“이리 와.”
세라는 사양 않고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가볍게 안아 든 에녹이 능숙하게 그녀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는데도.
“…왜 그런 표정이시죠?”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세라가 지긋지긋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너 되게 신기하다.”
그에 에녹이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라고 되묻기도 전에, 그가 입이라도 맞출 듯이 세라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뭐야. 왜 이래.”
싸우자는 건가?
미간을 팩 찌푸린 세라가 그를 피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두 눈은 시비라도 걸린 사람처럼 에녹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본 에녹이 바짝 미간을 좁히며 읊조렸다.
“보통 몸 한번 섞고 나면 다들 아닌 척하면서도 눈 마주치면 수줍어하고, 심장이 막 튀어나오려고 하던데…….”
상당히 재수 없는 혼잣말을 지껄인 그가 일생일대의 난제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너는 아무렇지도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