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어김없이 찾아온 아침에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새벽에는 뼈를 얼려 버릴 정도로 추웠는데, 그래도 해가 떠오르자 그나마 좀 푸근해졌다.
에녹과는 달리 얇은 실내복 차림이었던 세라는 밤새 추위와 불편함으로 잠을 설친 뒤였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머리 꼭대기까지 태양이 떠오르자 노곤노곤 풀린 눈앞에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오늘부터 새 출발을 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암살할 틈을 노리려 했는데, 야속한 눈꺼풀이 자꾸만 가물거렸다.
“졸리면 기대서 자든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더니, 에녹이 퉁명스럽게 제게 기대도 된다고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이 괜찮아 보였는데, 오늘은 묘하게 심경이 불편해 보였다.
하루라도 여자를 안지 않으면 우울증이 도진다더니 혹시 그래서 그런 걸까. 안락한 침낭을 혼자 독차지한 주제에 심통을 부리다니, 그것참 뻔뻔한 작자가 아닐 수 없다.
“괜찮거든요…….”
빈정이 상한 세라가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졸음에 지친 몸이 제멋대로 넘어가 에녹의 가슴을 베고 누웠다.
‘아, 안 되는데. 해치워야 할 놈에게 기대 자다니…….’
일말의 이성이 그런 모양 빠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며 그녀를 일깨웠지만, 털고 일어나기엔 등에 와 닿는 에녹의 몸이 너무 따뜻하고, 푹신하고, 편안했다.
이 정도면 침대 아니야? 땅바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락한 감촉에 세라의 몸에서 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노예야. 너는 이 상황에 지금 잠이 와?”
“…….”
“어? 잠이 오냐고.”
기대서 자라고 할 땐 언제고, 에녹이 귀찮게 시비를 걸어왔다.
시끄러움을 참다못한 세라가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쏘아붙였다.
“……좀, 닥쳐….”
확, 덮쳐 버리기 전에.
물론 덮쳐서 죽여 버리기 전에 닥치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
협박이 통한 걸까. 영원히 떠들어 댈 것 같던 에녹이 한 방에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쟁취한 침묵이 기꺼웠던 세라가 편안한 미소와 함께 드르렁 잠들어 버렸다.
커어어. 곤한 숨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지고 나서야, 허를 찔린 주인님이 제법이라는 듯 어쭈, 하고 중얼거렸다.
“……?”
그렇게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던 세라는 얼굴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에 불쾌하게 잠에서 깼다.
축축해…. 비 오나?
뻑뻑한 눈꺼풀을 밀어 올려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러자, 묵묵히 걸어 나가는 말의 뒷모습 대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첨벙이는 개울가가 보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 수면 위에 반짝이는 햇살이 잠들기 전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정적인 풍경 속에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무언가를 따라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러다 촤악-. 세라의 시선을 독차지하던 무언가가 물살을 가르며 뭍으로 올라섰다.
수중에서 올라온 살색 일색의 몸뚱이가 막 잠에서 깬 깨끗한 눈을 찔러 든 것도 그즈음이었다.
“으, 저게 뭐야.”
세라가 더러운 걸 봤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찰나였지만, 탄탄한 두 다리 사이 살아 있는 활어처럼 덜렁대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다시 슬쩍, 눈을 떠 앞을 바라봤다.
“일어났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물 밖으로 나온 에녹이 물에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며 근사하게 웃었다.
온몸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찬란한 햇살이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나신 위로 부서져 내렸다. 어느 곳도 가리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그는 갓 태어난 신처럼 무결하고 완벽해 보였다.
딱 하나 흠이 있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신앙심이 들게 하기엔 지나치게 관능적인 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영이 거칠었는지 지상으로 올라온 에녹의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방금 막 사냥을 마친 맹수처럼 위험해 보였다. 대칭을 이루는 아름다운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럼에도 어디 하나 둔탁해 보이는 곳 없이 날렵하게 벼려진 검 같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
세라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눈앞에서 반짝이는 작품을 감상했다.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 안 된다는 자각이 있었음에도, 눈에 자석이라도 달린 듯 에녹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창 열심히 길을 가야 하는 이 시간에, 하필 세라가 눈을 뜨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서, 굳이 전부 벗고 수영이나 하고 있는 고의성을 의심해 봄 직한 상황이었으나 시야를 훤히 트이게 하는 광채에 정신을 빼앗긴 세라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배경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환한 대낮에 야외에서 보는 에녹의 나신은 그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극한으로 갈고 닦은 인간의 몸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가장 완벽한 예술이 될 수 있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놀지 말고 일해.”
물에서 태어난 조각상이 터벅터벅 걸어와 무언가를 턱, 던져 주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그냥 천 뭉텅이인 것 같았다.
노예의 손에 친히 일감을 던져 준 주인님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명령했다.
“닦아.”
쉼 없이 흘러내린 물이 강대한 어깨와 가쁜 숨을 내쉬는 탄탄한 가슴, 그 끝에 위치한 모양 좋게 갈라진 복근을 지나 말의 근육처럼 갈라진 허벅지 안쪽을 타고 쭉 미끄러져 내렸다.
그 애타는 궤적이 끝에 다다랐을 때, 세라의 다리 사이에 찌릿, 하고 전류가 흘렀다.
신이시여…….
불가항력으로 신을 찾은 세라가 다시 잠들고 싶은 것처럼 두 눈을 감았다.
이건 자극이 너무 강한데.
악마를 쫓는 기도문을 읊듯이 작게 중얼댄 그녀가 손에 든 천 뭉텅이로 제 코를 스윽 닦았다.
또 코피가 흐른 것이다.
“아니. 그거 말고 내 몸을 닦으라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녹이 황당하다는 투로 노예의 일을 확실히 짚어 주었다.
그건 자극이 너무너무 강한데.
곤란한 듯 미간을 구긴 세라가 별안간 짝, 하고 제 뺨을 후려갈겼다
.
‘홀리지 마! 네가 해치울 놈이야!’
나약한 정신머리를 일깨운 세라가 주섬주섬 일어서 해야 할 일을 했다.
“이 날씨에 무슨 수영을 하고 그러세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갔다.
세라는 대화를 이어 나가는 대신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의식적으로 눈을 흐린 세라가 눈앞의 탱탱한 남체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썼다.
어제도 수없이 들이쳤던 번뇌가 다시금 그녀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나는 지금 몸을 더듬는 게 아니야. 적의 급소를 파악하는 중인 거야.’
스스로를 세뇌시킨 세라가 연신 탄탄한 견갑골과 광배근, 단단하게 척추를 받쳐주는 등 근육을 유려하게 더듬었다.
‘하지만 이런 몸이 사라지는 건 좀 아쉽군.’
그러다가도 불쑥, 치미는 상념에 은근슬쩍 흑마법으로 이 몸만 남기는 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닦으라고 옷도 줬는데 왜 손으로 닦고 있어?”
세라에게 등을 내맡기고 있던 에녹이 황당한 어조로 그녀를 타박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제 손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닦으라고 준 천은 저 멀리 던져 버리고 맨손으로 그의 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헛숨을 들이킨 세라가 얼른 천을 주워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역시 하루빨리 이 요물을 해치워 버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그래. 독살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정도로 큰 몸을 중독시키려면 제법 강렬한 독이어야 할 테다.
에녹은 눈치가 빠른 놈이니 서서히 중독시키는 건 안 된다. 굳이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사람을 한 방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독을, 세라는 72가지, 그중 자연에서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을 12가지 정도 알고 있었다.
어디 기적처럼 똑, 떨어지면 좋을 텐데.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읊조린 세라가 무심히 고개를 돌렸을 때-.
“…….”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잎도 열매도 전부 떨어져 앙상하나 나무들. 그 사이에 아직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녹빛의 열매.
대충 보면 덜 영근 사과처럼 보이는 그것은 분명 방금 전 세라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12가지 중 하나였다.
그런 게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나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 정도면 신도 그녀의 계획을 돕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세라가 와, 하고 소리 없이 감탄했다.
“다 됐어요.”
팩, 손에 든 것을 패대기친 세라가 쪼르르 달려가 나무에서 열매를 따 냈다.
두 알만 먹어도 죽게 되는 그 열매를, 세라는 넉넉잡아 네 개를 따냈다.
마침내 손에 넣은 준비물에 기분 좋게 뒤를 돌았다가.
“……?”
자신을 바라보며 기립 박수를 치는 에녹과 시선이 마주쳤다.
뭐가 그리 웃긴지 그는 옷을 갖춰 입는 것도 잊은 채 숲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그러다 ‘왜 저래?’라는 생각이 들 즈음 세라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올린다.
이유 없이 추켜세워진 세라는 영문을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어서 타. 다시 출발해야 돼.”
빠르게 옷을 주워 입은 에녹이 묶어 둔 말을 끌어오며 손짓한다.
열매를 한 번 만지작거린 세라가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쪼르르 쫓아가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다시 산을 올랐다.
에녹의 말에 따르면 이 산의 정상에서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를 꼬박 걸어가면 마을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전에는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던 세라는 목표했던 정상과 점점 가까워지자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열매를 꺼내 들었다.
“……주인님도 이거 드실래요?”
“안 먹-.”
“…….”
“먹여 줘봐.”
에녹은 즉각 안 먹겠다고 하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대뜸 먹여 달라며 아-. 하고 입술을 열었다.
세라는 기회를 놓칠세라 열매를 얼른 에녹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 어제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하지만 그 열매가 입술에 닿기도 전에, 에녹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마을에 들어가고 나서는, 몸을 좀 사려야 할 거야.”
“……왜요?”
그 마을. 가지도 않을 건데 왜 들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망자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차분히 이유를 물었다.
지금 제 입 앞에 뭐가 들이밀어진 줄도 모르고, 에녹이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사람들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건 좀 의외인 이야기였다.
시그너스 길드 사람들도 그렇고,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에녹에게 전부 광적인 신앙심 같은 걸 품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왜요. 그 사람들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으세요?”
“음, 이게 잘못인가?”
에녹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이야기를 끊은 에녹이 갑자기 등장한 비탈길을 전부 지나갈 때까지 신경 써서 말을 몰았다.
그리하여 산 정상에 섰을 때, 말을 멈춘 에녹이 먼 곳을 눈짓했다.
“어쩌다보니 저렇게 만들어버리긴 했는데-.”
“……?”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세라는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루를 꼬박 걸려 올라온 거대한 산의 정상. 그 너머에는 시실리아 연합의 상징인 얼음 산맥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가운데가 무 잘리듯 싹둑 잘린 채로.
눈을 감고 보아도 인공적인 힘에 의해 잘려 나간 모습이었다.
“아, 니…. 저게 어쩌다가.”
“실수였어.”
대체 누가 실수로 산맥을 가르지?
아연한 눈으로 갈라진 산맥을 바라보던 세라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 이 정도면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 확실히 싫어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에녹이 건너 건너 들은 남 이야기 하듯 평이한 어조로 덧붙였다.
“작당하고 내 식사에 독을 탔으니까.”
“헉.”
그때까지도 그의 입 앞에 열매를 들이밀고 있던 세라가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그녀는 슬슬 들어주는 게 귀찮아 이대로 밀어 넣을까 고민하던 차였으나, 어쩐지 결말이 궁금해져 조금만 더 들어 보기로 했다.
“……멍청한 짓이었지.”
나한텐 독이 통하지 않는데 말이야.
별거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긁적인 에녹이 이젠 다 좋은 추억이 되었다며 하하 웃었다.
차마 따라 웃지 못한 세라는 그때 독을 탔다는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다가, 눈앞에 훤히 펼쳐지는 비극에 조용히 생각을 멈췄다.
그때, 제 할 말을 모두 끝낸 에녹이 궁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난 언제 먹여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