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헤타르딘은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느낌 그대로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산맥을 본떠 위로 길게 뻗은 뾰족한 모양의 지붕들엔 솔방울과 갈대를 엮어 만든 장식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창문 밖으로 따뜻한 색의 조명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쉬지 않고 불어대는 눈보라나, 흐릿한 하늘이 우중충하긴 했지만, 적어도 세라가 느끼기에 시그너스 길드보다 훨씬 미관상으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이렇게 예쁜 마을인데…….”
“그래. 예쁘지.”
세라와 함께 걷고 있던 에녹이 그 말에 동의했다.
고개를 주억거린 세라가 정말 신기하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주인님을 보는 눈만 예쁘지 않네요.”
그녀는 흥미로운 눈으로 마을을 휘 둘러보았다. 면역자의 상징인 보라색 눈동자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도, 헤타르딘의 사람들은 세라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그녀의 옆에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만을 죽일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그 표정이 그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던 남자와 무척이나 닮아 있어서, 세라는 비로소 에녹이 이곳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처음 에녹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세라는 경비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땅바닥에 엎드리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퉷.’
에녹을 마땅찮은 표정으로 들인 경비병은 그의 발치에 침을 뱉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을 뿐이었다.
“퉷.”
그를 떠올리기가 무섭게, 에녹을 노려보던 사람 중 하나가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고 싶은 듯이 바닥에 탁, 침을 내뱉었다.
“침을 뱉다니…….”
그 모습을 지켜본 세라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희대의 악녀라 손가락질받았던 자신이나 당하던 일을 에녹이 똑같이 받고 있는 이 현실이 몹시 낯설었다.
“이 정도면 온화한 편이지.”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지, 에녹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저번에는 불화살이 날아왔거든.”
“……으음.”
그 정도면 거의 마물 취급 아니냐.
순간적으로 숙연해진 세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음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던 에녹 암살 계획에서 슬그머니 불화살을 지워 버렸다. 이미 누군가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방법을 굳이 쓸 필요는 없었다.
“…….”
조용히 목록을 정리한 세라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힐끗,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담담하게 상황을 관조하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평온함이 유독 신경이 쓰였다.
‘여기서 별일이 다 있었구만.’
독살도 당할 뻔하고, 불화살도 받아 보고, 면전에 침 뱉기에다가 시그너스에서라면 꿈도 못 꿨을 살기 어린 시선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용케 여기를 또 올 생각을 다 했네.
세라는 이런 곳인 줄 뻔히 알면서도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한 게 의문이었다.
에녹이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 말이다.
‘그 노인이 그 정도로 부자인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한 세라는 다시 시선을 돌려 마을을 구경했다. 에녹과 이 마을에 얽힌 깊은 역사를 알고 나자, 방금 전과는 다르게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무심코 그것을 말로 옮기려던 세라가 입을 헙, 다물었다.
뒤늦게 물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
에녹이 고개를 돌려서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치를 살핀 세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의외로 가만히 내버려 두시네요?”
세라는 어디 한 군데 보수한 흔적 없이 깨끗한 건물들을 눈짓했다.
여기서 독살도 당할 뻔하고, 불화살도 맞을 뻔했는데 어디 한 군데 크게 부서지거나 한 곳이 없었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니, 여기서도 경고성으로 건물 몇 채 날려 버릴 법한데 말이다.
영웅이라 보복 따윈 안 하는 건가? 아니면 이 땅의 선조들이랑 계약을 맺었다든가, 건드려선 안 되는 특별한 제약이 있다든가.
여러 가지 가설이 세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나같이 영웅의 사명 어쩌고와 관련된 거창한 것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푸대접을 그냥 눈감아 줄 수 있나 싶어서.
하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예쁘잖아. 마을이.”
에녹은 그 외에 거창한 이유는 더 필요치 않다는 듯 간단히 답했다.
“…….”
생각보다 별거 아닌 이유에 세라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멈췄다가.
“그건 그래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녹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확실히 설산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마을은 부수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의견이 완전히 합치를 이룬 순간이었다.
“…….”
그에 에녹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 집이야.”
그러다,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 앞에 멈췄다.
다른 집들에 비해서 유독 크고 웅장해 보이는 외양이 일반적인 가정집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입구에 달린 종을 두어 번 울린 에녹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다. 눈꽃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들어와.”
에녹은 그곳이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라를 초대했다.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른 세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오니 얼었던 뺨이 사르르 녹아내릴 정도로 훈기가 엄청났다.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찬 집 안에서는 온통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에녹은 현관을 넘어, 응접실을 지나, 꺾어진 복도 안쪽에 있는 방으로 곧장 들어섰다. 커다란 책상이 있고, 처음 보는 형태의 난로가 있는 그곳은 응접실보다도 더 따뜻했다.
방은 비어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듯 책상 위에는 닫지 않은 잉크 뚜껑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놓여 있었다.
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에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로 난로 근처에 놓인 소파에 가 앉았다.
세라도 얼른 따라가 난롯가에 자리를 차지했다.
“……저 사람들.”
그러다 창문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포위하듯 집을 둘러싼 사람들이 유리창 너머로 조용히 노려보는 광경은 세라가 보기에도 섬뜩한 면이 있었다.
“신경 쓰지 마.”
그 열렬한 시선을 받고 있는 에녹은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편안하게 휴식을 즐겼다. 난로 위에 올라가 있던 찻주전자를 든 그는 제 찻잔을 채워 후룹, 들이켰다.
“……예에.”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상황을 넘기는 그 모습에 세라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에녹이 이런 상황에 익숙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로우드 지역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때, 희미한 인기척과 함께 연륜 있는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방향은 에녹과 세라의 뒤쪽이었다.
“뻔뻔하게도 여길 직접 올 생각을 다 하셨구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떨떠름한 표정의 노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것도 면역자까지 데리고.”
한 차례 에녹을 바라본 노인이 못마땅한 눈으로 세라를 쳐다보았다.
“시그너스 길드는 타협하지 않는다더니 그것도 다 옛말이구만.”
세라와 에녹을 번갈아 노려봐 준 노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껏 빈정거렸다.
“내 집에서 나가 주시게.”
그러고는 용건도 묻지 않고 곧장 축객령을 내렸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용케 내 길드에 의뢰를 넣었네.”
나가라는 집주인의 말을 자연스럽게 흘려 넘긴 에녹은 조용히 노인의 뼈를 때렸다. 하지만 그 얼굴에 세라를 놀릴 때와 같은 짓궂음이나 장난기는 보이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나도 원수의 손을 빌리기 싫었어…!”
그에 노인이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세라는 그제야 이 집의 주인이 시그너스 길드에 의뢰서를 넣은 ‘게이븐’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난 대화를 싫어해.”
노인의 고성에도 흔들리지 않고, 에녹이 자기 방식대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소파에 몸을 깊이 묻은 그가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이 단호히 요구했다.
“그러니까 의뢰에 대해서나 말해.”
“……!”
게이븐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들썩이다가, 애써 화를 눌러 참으며 날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늦었소.”
고개를 내젓는다.
“그 의뢰는, 끝났소.”
눈을 동그랗게 뜬 세라가 얼른 게이븐이 보낸 의뢰서를 확인했다. 그가 작성한 견적서에는 자기 마을의 남쪽 언덕에 있는 가시를 없애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근데 그게 끝났다고?
누군가 한발 먼저 이곳을 다녀갔나?
“눈보라가 심해져서, 이제 인간의 힘으로는 언덕을 오를 수 없거든.”
그녀의 의문을 읽은 게이븐이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붉은 머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봤자.”
과장스럽기까지 한 말에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눈보라잖아요?”
너무 순진한 말이었을까.
세라의 말에 에녹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의 눈보라는 그런 게 아니야.”
그새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의미심장한 설명을 덧붙였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거든.”
“뚫린 입이라고, 이게 다 당신 때문 아닌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크게 분개한 게이븐이 달려들 기세로 에녹을 향해 걸어왔다.
“당신이 산맥을 갈라 버린 바람에, 헤타께서 노하신 거잖나!”
노성을 토해 낸 그는 쭈글쭈글해져 뼈밖에 안 남은 손으로 찻잔을 든 에녹의 손을 내쳤다. 쨍그랑, 그의 손을 떠난 예쁜 다기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알량한 영웅 놀음 하나에 죄 없는 사람들이 얼어 죽게 생겼다고!”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부서진 유리 조각이 노인의 손에 박혀 들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우리의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단 말이다!”
그는 제가 느끼는 고통보다도 더한 분노를 에녹에게 쏟아 내고 있었다. 쿵! 쿵! 게이븐의 분노에 동조하듯 창문에 들러붙은 마을 사람들이 불만스럽게 창을 두드렸다.
쿵! 쿵! 온 마을이 품고 있던 응축된 원한이 한 사람을 향해 모여들었다. 형체가 느껴질 정도로 뚜렷한 증오의 대상이 된 에녹은.
“……헤타는 드래곤이지 신이 아니야.”
에녹은 부서진 찻잔을 대신해 멀쩡한 잔을 제 앞에 끌어다 놓을 뿐이었다.
“너희가 그렇게 숭배할 만한 존재도 아니지.”
그는 주변과 완전히 단절된 사람처럼 쪼르륵, 새 잔을 따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헤타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 사람이 듣기에 충분히 모욕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이, 이, 천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게이븐이 차오르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건 창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유리창 너머로도 웅성대는 소리가 서서히 커져 갔다.
“세라 로젠바움 같은 놈이!”
겨우 이성을 되찾은 게이븐이 집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욕설을 내질렀다.
그렇게까지?
세라는 이 상황에 튀어나온 제 이름에 불편한 표정으로 눈썹을 모았다.
덜컹, 그와 동시에 미는 힘을 이기지 못한 창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뻔뻔하게!”
“악마 새끼가……!”
“헤타 님을 그 입에 올리지 마!”
열린 창을 뚫고 뻗어 나온 사람들의 손이 에녹을 해치고 싶은 것처럼 아우성을 쳤다.
“의뢰를 안 해도 된다니 잘됐네.”
안 그래도 귀찮던 참이었는데.
차에 각설탕을 통통 집어넣은 에녹이 우아하게 손목을 돌려 그것을 녹여 냈다.
그리고 마신다.
우아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그 옆모습에서는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미안한 감정도 없어 보였다.
‘이야…….’
흠잡을 데 없는 꼿꼿한 태도에 세라가 감탄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녹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경이로울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었다.
“야! 누구 연장 가져와!”
“그러게 이번에는 창에 불을 붙여서 쏘자고 했잖아!”
하지만 감탄한 사람은 세라뿐으로, 헤타르딘 사람들은 이제는 숫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어지러운 고함이 사방에서 찔러 들어온다. 온갖 저주 섞인 말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세라는 순간 여기가 지상인지, 지옥 밑바닥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들에 비하면 세라의 살의는 어린아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에녹을 향한 지독한 살의가 넘실거렸다.
그 소리를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양 흘려 넘긴 에녹은 만족스러운 풍미를 안겨 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붉다 못해 푸르게 변해 버린 게이븐을 향해 물었다.
“카르멘이라는 자를 알고 있나? 이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고 들었는데.”
에녹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
“…….”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이 들끓어 오르던 비난이 딱 멎어 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소리 없이 눈매를 좁힌 사람들이 네가 그 사람을 왜 찾느냐는 눈으로 에녹을 경계했다.
“저어…….”
날 선 공기를 뚫고,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가 방향이다.
“저희 할아버지 이름인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겨우 허리께나 올 정도로 작은 소녀였다. 창가를 가득 메운 어른들을 헤치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 아이가 알은체를 해 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그리고 세라가 그 아이를 발견했을 때.
‘어라?’
세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잔뜩 긴장한 아이의 어깨 위로, 이곳에서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새카만 덩어리와 눈이 마주쳤다.
뀨? 세라를 마주한 비틀린 운명이 그녀를 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