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에녹의 손을 바라본 세라가 재차 물었다.
“정말 이런 걸로 찾아온다고요?”
툭, 툭, 손끝에 맺힌 피가 하얀 설원 위에 꽃처럼 피어났다. 드래곤을 부르겠다는 동화 같은 발언을 한 에녹은 단검으로 손을 베어 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휘이잉. 살을 에는 바람이 상처를 헤집고 지나간다. 으, 세라는 괜히 제 손이 아픈 기분이 들어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응.”
에녹은 아픔이든 추위든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타는 날 싫어하니까. 내 피 냄새를 맡으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짐승이냐.
생각보다 훨씬 단순한 사고방식에 세라가 믿고 싶지 않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걸어온 자리마다 에녹이 흘린 핏자국이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일부러 주먹을 쥐어 피를 짜낸 에녹은 온 산에 제 흔적을 묻히려는 것처럼 정상 어귀를 한 바퀴 크게 돌고 난 참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러다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고는 털썩 눈밭 위에 주저앉았다. 절벽 아래로 빼꼼 고개를 내밀면 저 멀리 점처럼 변한 헤타르딘이 보이는 위치였다.
세라도 에녹을 따라 눈밭에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으으으, 진짜 싫어. 진저리를 친 그녀가 간절하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죠?”
“피 냄새가 헤타에게 닿을 때까지.”
기한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군요. 시무룩해진 세라가 최대한 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
세라가 입을 다물자,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시선만 옮긴 세라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옆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늘따라. 아니, 사실 마을에 들어온 이후부터 그는 조금 과묵해진 경향이 있었다.
오는 길에는 가만히 있는 세라를 툭툭 건드려 못살게 굴더니. 어제오늘은 딱히 그녀를 부려 먹거나 하지도 않았다.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한 차이였지만, 그의 약점을 찾기 위해 매의 눈으로 에녹을 관찰하고 있는 세라로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변화였다.
‘우울증이 도졌나.’
묘하게 힘이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세라는 뒤늦게 우울증이라도 터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여자를 안지 않으면 우울증이 도진다고 했는데, 벌써 5일이나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제법 오래 버틴 편이었다.
‘우울증치고는 일을 열심히 하던데.’
하지만 냉큼 우울증이 도졌다고 하기에 실행력은 또 좋았다.
‘그냥 기분이 안 좋은 것뿐인가.’
하긴 이런 환경에서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가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더라도, 감정이라는 건 결국 어떻게든 새어 나오기 마련이니까…….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 보던 세라는 결국 가장 간단하면서도 어디에나 갖다 붙일 수 있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생각하니 묵묵히 피를 흘리고 있는 옆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하필 깎아지른 절벽을 등지고 앉아서,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
위험해 보이는 영웅을 바라보며 세라는 생각했다.
이거, 기회인가?
‘여기서 밀면 죽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세라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에녹과 죽음을 연관시켰다. 암살의 가능성을 발견한 머릿속에는 어떤 방향으로 밀어야 저 큰 놈을 밑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예전에.”
그때, 침묵을 지키던 에녹이 대뜸 운을 뗐다.
“이런 날 밖으로 내쫓긴 적이 있었어.”
건너편의 눈 덮인 산자락에 시선을 둔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살벌한 상상에서 깨어난 세라가 내가 그런 걸 물어본 적 있느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갈 곳은 없고,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춥고, 그런데도 날 받아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기색을 에녹이 못 읽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야기는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딱 한 명, 날 안으로 들여보내 준 사람이 있었어.”
어, 이거….
무슨 소리를 하나 듣고 있던 세라가 큰 눈을 끔뻑거렸다.
어쩐지 제 이야기인 것 같아서.
‘조금, 나중에 밀까?’
혼자만의 은밀한 계획을 뒤로 미룬 세라는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되게 좋으신 분이었나 봐요.”
에녹이 말한 그 사람이 자기라는 걸 눈치챈 그녀는 의도가 빤한 칭찬을 했다.
“아니.”
에녹은 턱도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다지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어.”
“왜요!”
기대와는 다른 평가에 세라가 즉각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빵을 줬는데…….”
에녹은 중간쯤 말을 하다 말고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는 것처럼 즐거운 미소였다.
그래서 세라는 이번에야말로 좋은 말이 나올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걸 나한테 주기 아까워하는 게 너무 티가 났거든.”
야.
좋은 추억이라며…….
“…….”
그저 이상한 사람일 뿐인 그 감상에 세라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머쓱한 눈으로 제 발치를 바라봤다. 이 와중에 정말 그랬던 것 같은 기억이 나서.
“그래서 좋았어.”
“예?”
“아까워하면서도 마지못해 주는 게.”
“……?”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
어디로도 좋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건만, 에녹은 자신에게 빵 한 조각 아까워하던 그 사람을 두둔했다.
마지못해 받아 낸 호의가 그렇게나 기억에 남을 정도인가.
공감할 만한 구석을 찾지 못한 세라가 물끄러미 에녹을 바라봤다. 그때의 생각을 하는지, 감상에 젖은 입꼬리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 마을에 온 이후로 처음 보는 제대로 된 미소였다.
“…….”
세라는 문득, 어린 날의 너를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네가 그토록 싫어하던 세라 로젠바움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이 추운 겨울이 여전히 좋을지 궁금했다.
“혹시…….”
그래서 말문을 떼려는데.
우우우웅-.
저 먼 곳에서부터, 산이 울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지만 세라가 느끼기엔 정말로 그랬다. 울긴 우는 건데, 오열이 아니라 울부짖음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산맥을 타고 이어진 땅 울림이 세라의 발밑까지 닿았다. 우르르. 세라의 시선이 닿은 가장 먼 봉우리에서부터 눈사태가 일어났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세라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에녹은 그녀보다 한발 늦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타가 피 냄새를 맡은 거지.”
툭, 툭, 눈을 털어 낸 에녹이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출발하기 전에 뭐라고 했지?”
저택 현관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린 세라가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주인님에게서 몇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기, 붙잡고 늘어져서 방해되지 않기.”
막힘없이 손가락을 꼽아 나간다. 위험한 곳에 갈 때마다 들을 법한 말이었으므로, 기억하기에 어렵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하지만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왜 명심해야 하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지 않기?”
“좋아.”
여전히 완벽한 기억력에 에녹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명심하고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세라의 손에 망토 끝자락을 쥐여 준 에녹이 산등성이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휘이이이익-.
그와 동시에, 골짜기 사이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정체가 바람이라는 걸 깨달은 건, 그것을 두어 번 더 듣고 난 후의 일이었다.
휘이익-. 휘익-. 휘이이익-.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세라와 에녹이 선 봉우리의 바람이 거세어졌다.
휘이익-. 휘이이이-.
점점 짧은 간격으로 들려오던 바람 소리가 어느 순간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 메아리치는 잔향이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쐐애애액-!
굽이굽이 이어진 봉우리 저 끝에서부터 눈이 솟구쳤다. 가득 쌓인 만년설이 하늘 위로, 절벽 아래로 흩날렸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산맥을 길게 할퀴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쏘아진 화살보다도 더 빨리 산맥을 가로지른 눈 폭풍이 순식간에 세라를 덮쳤다.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마어마한 광풍은 인간을 산채로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읏……!”
두 팔로 황급히 얼굴을 보호한 세라가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무른 눈 속에 박힌 두 발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뒤로 밀렸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너무나도 강해 숨을 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귓가에 들리는 바람 소리가 악령의 울음소리처럼 끔찍하고 소름 끼쳤다.
세라를 지나쳐 날아간 눈 폭풍은 그녀의 뒤로 펼쳐진 설원 위를 헤엄치듯 마음껏 뒹굴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요란한 울음을 낸 광풍이 에녹의 피가 점점이 뿌려진 눈밭을 휘저을 때마다 공중에 흩날린 눈꽃이 폭풍이 되어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다.
잔뜩 헤집어진 설원 위에 원형으로 된 흔적이 거듭하여 새겨진다. 햇빛을 받는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린 폭풍이 조금씩 크기를 줄여 중심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러다 응축된 힘을 터뜨리듯 수축하던 눈보라가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높이 비산한 눈가루들이 하늘을 뒤덮는다.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 알갱이들은 절로 시선이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날개……?’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고개를 든 세라는, 투명한 눈꽃들이 거대한 날개처럼 하늘을 뒤덮는 광경을 목격했다.
양 날개를 길게 펼쳐 낸 눈보라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데 뭉쳐 형체를 이룬 폭풍이 언뜻 무언가의 목인 것 같기도, 기다란 꼬리인 것 같기도, 날카로운 발톱 같기도 했다.
세라는 살아 움직이는 폭풍을 올려다보며 경이로운 전율에 휩싸였다.
전설로만 전해 듣던 드래곤은 세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다. 홀린 듯이 헤타를 올려다보던 세라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을 때였다.
모습을 드러낸 헤타가 에녹을 향해 크게 아가리를 벌렸다. 소리를 지르듯 헤타를 이루는 눈보라가 맹렬하게 회전했지만, 소리는커녕 바람 한 점 불어닥치지 않았다.
뭘, 하는 거지?
의아해진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
한 박자 늦게 대지가 반응을 보였다.
험준한 산맥이 헤타를 대신해 크게 울음을 토해 냈다.
노한 대지에 하늘이 함께 울었다. 하늘과 땅,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천둥소리가 지상을 뒤흔들었다.
그 울음은 산에, 하늘에, 설원에, 그리고 세라에게 전해졌다. 살갗에 와 닿는 모든 공기와 땅이 헤타의 목소리가 되어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이나 넘어선 힘에, 세라는 제 몸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착각에 시달렸다. 그녀는 그 안에서 무엇으로도 꺼트릴 수 없는 활화산 같은 분노를 느꼈다.
그리하여, 헤타가 내뱉은 한 번의 울음이 전부 지나가고 난 후에.
“…….”
힘이 풀린 세라가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백한 얼굴로 헤타를 올려다본 그녀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걸,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투지가 완전히 꺾여 버린 이성이 이래서는 공동묘지밖에 가지 못한다고 속삭였다. 뇌리를 한 바퀴 돈 그 문장이 비로소 제대로 된 의미로 세라에게 와닿았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그녀가 에녹을 향해 소리쳤다.
“주인님! 이거 안 돼! 어서 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