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포기했던 일에 재도전을 하는 일은 몹시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과거의 포기에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희미해졌을 뿐. 아마 과거의 탓이 아닐 것이다.
이미 한번 실패한 일을 다시 시도해 봤자, 그 일을 왜 해내지 못했는지만 뼈저리게 깨달으며 다시 실패자가 될 뿐이다.
그 불변의 진리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잊고 있었다니.
철퍽.
물웅덩이에 발이 빠진 세라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음 깊이 반성했다.
“……앗, 차가.”
한참이나 느리게 반응을 보인 세라가 비틀대며 중심을 잡았다. 물에 젖은 감각이 불쾌할 법도 한데, 개의치 않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또 얼마 못 가 미끄러운 돌을 잘못 밟고 미끄러져 나무에 몸을 박았다.
“……아야.”
하지만 이번에도 묘하게 느린 반응을 보이고는 다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산에 올라 해가 꼭대기에 떴을 무렵 헤타를 해치운 둘은, 지는 해를 따라 하산하는 중이었다.
눈보라가 그치고 해가 떠오르자, 헤타 때문에 쌓여만 가던 만년설이 일부 녹아 길이 온통 질척했다. 미끄러운 진흙 길은 눈길보다도 더 위험했다.
질척해진 흙길 주변으로 날카로운 바위가 콕콕 박혀 있어 자칫 잘못 미끄러졌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악!”
옆길로 샌 세라가 이번에는 머리보다 낮은 높이로 드리워진 가지를 보지 못하고 이마를 세게 부딪혔다.
“……?”
앞서가던 에녹이 자꾸 실수하는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쯤 되면 제법 아프다며 엄살을 부릴 만한데도, 세라는 정신이 이곳에 없는 사람처럼 골똘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좋아.’
그리고 보이는 바와 같이, 세라는 모든 신경을 하산과 전혀 관련 없는 곳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격에 드래곤과 산맥을 반으로 갈라 버리는 걸 목격한 이후, 그녀는 에녹을 죽여 원수를 갚겠다던 원한을 깨끗하게 잘라 냈다.
‘살아 있는 에녹은 쓸모가 많잖아.’
대신 에녹이 살아 있으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대해 열심히 쥐어짜기 시작했다.
‘재수 없긴 해도 일단 쟤 옆이 가장 안전한 데다가.’
물론 갑자기 긍정의 힘이 솟구쳐서 하는 일은 아니었고, 자신이 약해서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자의 자기 합리화 같은 거였다.
‘다칠 일도 없고, 설령 다쳐도 치유가 가능하고…. 물론 치유 방법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려울 줄 알았으나, 막상 짜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에녹의 장점은 꽤 많았다.
‘보기에도 좋고….’.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잘 구슬리면 내 형량을 줄이는 데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불행은, 이 짧은 몇 문장을 생각하는 사이에 세라가 벌써 다섯 번이나 넘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랬다. 지독한 집중력을 가진 그녀는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해내지 못하는 몸이었다.
“……하아, 진짜-.”
그에 참다못한 에녹이 왔던 길을 돌아 세라에게 다가갔다. 화라도 난 것처럼 성큼성큼 걸어온 그는 넘어진 자세 그대로 생각에 빠진 세라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귀찮은 짐처럼 그녀를 옆구리에 낀 그가 다시 하산길에 올랐다.
물론 세라는 그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포기하자.’
그저 완전한 타협을 이뤄 내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이런 놈을 어떻게 죽여. 오히려 곁에 두고 더 이롭게 써야지.’
며칠간 그녀의 모든 관심을 가져갔던 살심을 미련도 없이 끊어 냈다. 세라는 더 이상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로지 목숨값으로 갚을 수 있는 채무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자유로워진 것을 느꼈다.
포기하니까 너무 편하다.
마침내 평화를 되찾은 세라가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편한 이유는 에녹이 들고 내려가 준 덕분이었지만 딱히 중요한 진실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세라가 제법 만족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사이 빠르게 산을 내려온 에녹이 비제의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발로 뻥 차고 입장한 그는 곧장 계약서를 확인했던 집무실로 향했다.
뚜벅뚜벅, 눈길에 젖은 구둣발이 깨끗한 바닥에 짙은 얼룩을 남겼다.
개의치 않고 걸어간 에녹이 이미 반쯤 열려 있는 새하얀 문을 노크 없이 밀고 들어갔다.
“……?”
예고 없이 쳐들어온 불청객의 등장에, 비제와 집사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건성으로 세라를 내려 준 에녹이 냅다 결론부터 꽂아 넣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헤타를 죽였어.”
또렷한 그 음성이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
“…….”
그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이 에녹을 발견했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쪼르르륵. 집사가 기울이고 있던 찻주전자에서 끝없이 찻물이 흘러내렸다. 멈춰야 할 때를 놓친 갈색의 액체가 찻잔에서 흘러넘쳐 값비싼 카펫을 적셨다.
“……예?”
“……므에?”
그들에게서 어떠한 반응이라도 돌아온 건 그것보다 조금 더 뒤였다. 반사적으로 서로를 마주 본 집사와 아가씨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눈보라가 그쳐 맑고 파란 하늘을 발견한 비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정말……?”
그리고 맑은 하늘의 진의를 묻듯이 집사를 올려다보았다.
“…….”
집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는 뜻이었다.
“어오…….”
헉, 소리를 내며 놀란 비제가 또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춰 버렸다.
“어, 어, 어, 어, 어떻, 어떻, 게…….”
같은 곳에서 자꾸만 더듬거리는 소녀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잊은 사람처럼 입술만 뻐끔거렸다. 경악을 숨기지 못한 얼굴이 처음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허옇게 탈색되었다가, 새파랗게 질렸다가.
급기야는 잿빛으로 죽어 들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에녹이 인정머리 없이 차갑게 명령했다.
“이제, 돈 내놔.”
“히윽!”
빼도 박도 하지 못한 그 현실에, 비제가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가엽기 짝이 없다.
번뇌가 일만 번도 더 내리치고 있는 자그마한 얼굴을 바라보며, 세라가 인자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너도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
“이, 이게 전 재산이에요…….”
집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금화, 은화, 보석 등을 긁어모은 비제가 퀭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있는 돈 없는 돈 싹싹 긁어 담은 주머니는 세라의 상체만큼 커다랗게 불어났다.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는 세라와 에녹에게는 길드로 돌아가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 돈이었다.
“시간만 더 주시면, 제가 부족한 금액은 어떻게든…….”
하지만 안타깝게도, 비제에게는 충분한 돈이 아니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녀의 수중에 있던 돈은 정확히 3750골드가 전부였다.
“이래 봬도. 돈을 불리는 능력이 좀, 괜찮거든요. 250골드 정도는 한 달만 기다려 주시면…….”
“나더러 한 달 뒤에 또 여길 오라고?”
“귀찮으시면 제가 시그너스 길드까지 사람을 보낼게요! 편안하게 앉아서 돈만 받으셔도 되고요!”
설마 돈이 부족할 줄은 몰랐던 비제가 안절부절못하며 시간을 달라 요청했다. 에녹은 딱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은 돈에 대한 열망이나 흥미 따위 조금도 비치지 않는 게,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부족한 건 됐으니 이만 가겠다며 훌쩍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지. 얘야.”
그때, 새로운 인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현실의 편안함을 받아들이고 평소처럼 돌아온 세라였다.
“오늘의 250골드와 한 달 뒤의 250골드가 다른데.”
비제와 에녹 사이에 끼어든 세라가 부드러운 어조로 타일렀다.
“오늘 받을 250골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값진 거란다.”
“……예?”
어쩐지 일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에 비제가 떨떠름한 눈으로 에녹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좀 빼고 이야기하자는 눈짓이었으나, 에녹은 무시했다.
“같은 값이라고 해서 가치가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돌아간 고개를 붙잡아 자신을 보도록 한 세라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기어이 부족한 돈을 지금, 이 순간에 받아 내야겠다는 뜻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비제가 한 번만 봐달라는 투로 웅얼거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도 돈을 구할 수 없는걸요.”
“오, 그럼 비슷한 가치의 다른 무언가로 대신 갚으면 된단다.”
세라는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며 다른 방식으로 채무를 이행할 것을 추천했다. 비제가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게, 뭔데요?”
기다렸던 물음에 세라가 히죽, 입을 벌려 웃었다.
미묘하게 시선을 빗겨 내린 그녀가 비제의 어깨 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검은 덩어리를 향해 속삭였다.
“네 미래.”
“예?!”
“네게 남은 모든 시간을, 시그너스 길드를 위해 쓰렴.”
“예에?!”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조건에 비제가 득달같이 목청을 높였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라가 허억, 허억 흥분 섞인 숨을 내쉬었다.
“괜찮죠. 주인님?”
남의 미래에 영역 표시를 한 세라가 동의를 구하는 눈으로 에녹을 돌아보았다. 에녹은 어찌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하고는 돈주머니를 챙겨 나가 버렸다.
무언의 허락을 받아 낸 세라가 크게 기뻐했다.
“어우, 눈이 왜 이래…….”
동공이 풀린 눈과 마주친 비제가 눈에 띄게 움찔 몸을 떨었다. 미친 사람 취급에도 세라는 새하얀 이를 드러낸 채 방긋방긋 웃었다.
초점을 잃은 눈 저편에, 갈라진 조각이 보여 준 미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표정의 그녀가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슬쩍 틀어 울먹이고 있는 검은 덩어리를 콕 찔렀다.
“놓치지 않을 거예요.”
할짝, 입맛을 다신 세라가 음산하게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