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대부호 카르멘의 손녀인 비제는 날 때부터 돈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 인재 중에 인재였다.
돈 냄새를 맡는 능력이 탁월한 그녀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예리한 감각은 가히 짐승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대로 세라와 에녹에게 전 재산을 빼앗기더라도, 그녀는 금방 돈을 벌어 부유하게 살다, 스무 살이 되던 날 자는 듯이 편안하게 죽을 예정이었다. 이곳, 북쪽 끝의 시골 마을인 헤타르딘에서.
‘안 되지. 안 돼.’
천재의 허무한 최후를 본 세라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언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토록 훌륭한 인재를 어린 나이에 요절시킨다는 건 크나큰 손실이었다.
‘너는 더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아이란다.’
아련한 눈을 한 그녀는 비제가 원래 닿았어야 할 미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본래라면, 비제 캐트시는 카르멘이 죽기 전에 할아버지를 따라 시그너스 길드의 일원이 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카르멘 사후, 길드의 유일한 재무 담당관인 레니스는 일찍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고작 열네 살인 그녀에게 길드의 모든 자금 관련된 업무를 일임하게 된다.
비제는 짐승 같은 감을 발휘하여 시그너스를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길드로 만들고, 재정난에서 벗어난 시그너스 길드는 내실을 탄탄하게 정비하여 길이길이 대륙을 수호하는 수호자로 거듭나게 되면서…….
“후우-.”
황금에 파묻힌 길드의 미래를 본 세라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완벽한 해피 엔딩을 보여 준 조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붙었다.
현실로 돌아온 세라가 눈을 뜨자, 저 멀리 떠날 채비를 하느라 바쁜 자그마한 뒤통수가 보였다.
“어쩔 수 없네! 계약은 계약이니 시그너스 길드에 가는 수밖에!”
말과는 달리 흥분한 티가 역력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처음 다짜고짜 미래를 달라고 할 적에는 가기 싫은 것처럼 굴더니, 막상 짐을 싸기 시작하니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내색하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내심 이 눈밖에 없는 시골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인도 저렇게 좋아하니 정말 다행이지.’
세라는 그 깜찍한 등을 흐뭇하게 쳐다봐 주었다.
‘하루만 더 있다가 떠나자고 했을 때는 도망치려는 줄 알았는데.’
시그너스 길드에 가자는 말을 들은 직후, 비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하루만 더 있다가 떠나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시간을 벌어 보려는 속셈이 보였지만, 세라도 몹시 피곤한 상태였기에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간밤, 행여나 비제가 도망칠까 걱정된 세라는 주변에 날아든 까마귀 몇 마리에게 암시를 걸어 비제의 방을 지켜보도록 명령했다.
행여나 비제가 밤중에 문밖으로 나온다면, 인정사정없이 머리털을 뽑아 버리라고.
하지만 다행히도, 아침이 되어 만난 비제의 머리는 뽑힌 곳 하나 없이 멀쩡했고, 비제를 대신해 발품을 판 집사가 작별 선물이라며 제법 튼튼한 짐 마차를 구해다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이었다.
세라는 조수석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비제는 대륙 횡단을 해도 끄떡없을 것 같은 짐을 끝도 없이 밀어 넣고 있었다.
“짐이 너무 많아…….”
가만히 앉아 있어도 짐칸이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똑똑히 느껴졌다. 이래 가지고 바퀴는 굴러가려나. 싶었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세라는 비제만큼이나 흥겨운 얼굴로 휙휙,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번엔 얼마나 줄어들려나-.”
흥얼대며 팔뚝을 내려다본 세라가 기대감을 실어 토독, 남은 숫자를 두드렸다. 이대로 비제를 데리고 시그너스 길드에 입성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비제는 대물이었다.
적어도 5백만 년은 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콧노래랑 휘파람이 절로 흘러나왔다.
내쫓겨 흘러든 곳에서 형량을 줄여 줄 아이를 만난다니 운이 좋았다. 이것이 정말로 운인지, 아니면 이 또한 신이 안배한 운명인지 모를 일이나 돈도 벌고 형량도 깎일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흔치 않게 찾아오는, 모든 게 완벽한 날이었다.
“눈보라가 그쳤다!”
“헤타 님께서 노여움을 푸신 거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헤타르딘 사람들만 빼면, 말이다.
“…….”
평화로운 감상 시간을 방해받은 세라가 시끌벅적한 마을 쪽을 노려보았다. 마을을 고립시키던 눈보라가 그치자, 광장으로 튀어나온 마을 사람들은 어제부터 축제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수호신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이제 우리는 살았어!”
“헤타 님의 은총이다!”
헤타가 불어온 눈보라의 원인은 엉뚱한 사람에게서 찾았으면서, 그 사람이 가져다준 푸른 하늘은 헤타 님의 은총이라 칭송했다.
감격에 젖은 사람들이 헤타가 살고 있는 산맥을 향해 연신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이 죽고 못 사는 헤타 님이 세상을 하직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서.
세라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면면들을 바라보며, 솔직한 감상을 읊조렸다.
“병신들.”
그때, 느지막이 저택을 나선 에녹이 마부석에 올라탔다.
세라가 옆자리에 앉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진짜 말 안 해도 돼요?”
헤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눈보라가 사라지고 나서도, 에녹에 대한 헤타르딘의 증오는 여전했다.
그를 미워해야 할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관성적으로 박혀 있는 증오는 주춤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세라는 저 멍청한 마을 놈들이 자신들을 눈보라로부터 구해 준 사람이 헤타가 아니라 에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궁금했다.
“굳이?”
하지만 에녹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모양으로, 그냥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진심으로 이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다.
“저 사람들한테 필요한 말은 그게 아닐걸.”
심드렁하게 덧붙인 에녹이 아직도 졸린 듯 길게 하품했다. 참으로 사려 깊은 발언이었다.
“귀찮아.”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본심일 테고.
녹다 만 젤리처럼 스르륵 미끄러진 에녹이 거의 눕다시피 마부석에 기대앉았다. 출발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세라가 에녹의 말을 곱씹으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행복이 흘러넘치는 게 굳이 진실은 필요치 않아 보이긴 했다.
그럼 뭐가 필요하려나.
해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처럼 즉각 튀어나왔다.
아마도 에녹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난다는 소식이겠지.
“흐음…….”
납득하는 표정을 한 세라가 아름다운 마을을 마지막으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마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뾰족한 지붕을 타고 올라간 시선이 웅장한 설산에 닿는다. 굽이치는 산맥은 그 고생을 하고 다시 보아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장엄한 멋이 있었다.
그 멋을 한층 더해 주는 것은 산맥에 깊게 새겨진 두 개의 상흔이었다. 하나는 종으로, 하나는 횡으로.
시간 차를 두고 새겨진 두 개의 검격을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문득 에녹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번에는 적당히 갈랐네.’
그러고 보니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말의 의미를 고민하던 세라가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처음부터 헤타에게 볼일이 있었던 건가요?”
돌아보자, 에녹은 이미 눈을 감은 채였다.
“…….”
세라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자는 건가?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즈음, 대답이 돌아왔다.
“이 세상 누구도-.”
잠기운이 묻은 목소리로 말문을 연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타인에게 전 재산을 주고 싶지 않을 거야.”
세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비제가 아니더라도, 사람인 이상 그런 정신 나간 계약에 순순히 따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할지라도.
“그러니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불가능한 일을 조건으로 걸겠지.”
이 마을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불가능한 일.
그건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물어봐도 똑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헤타 말이군요.”
에녹은 대답 대신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역시 그랬던 건가.
어쩐지 그럴 위인이 아닌데 계약 조건을 철석같이 지킨다 했다. 여태까지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에녹의 편의에 맞춰 착착 진행된 격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설마 길드를 나설 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세라가 황당하다는 듯이 꿍얼거렸다.
“결국 전 주인님의 손에 놀아난…….”
그러나 중간부터 슬쩍 말을 늦췄다.
중요한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넘겨 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대목이었느냐 하면. 에녹이 제게 목숨값을 갚아야 할 노인이 ‘불가능한 조건’을 달 줄 미리 알고 있었던 점이 말이다.
‘계약서에 조건이 달려 있었던 건 여기 와서 알게 된 일이잖아? 근데 왜 쟤는…….’
거기까지 생각한 세라가 뜨악한 표정으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설마?”
그에 느른하게 눈을 뜬 에녹이 저택 쪽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제가 카르멘을 닮아 다행이야.”
“…….”
“그 노인네가 죽었을 줄은 몰랐거든.”
그러니까, 에녹은 계약서에 그런 조건이 달려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것에 사인을 했던 그 순간부터.
“허어-.”
진짜 놀아났잖아…….
허탈한 한숨을 내쉰 세라가 멍하니 뒤통수를 더듬거렸다.
진짜로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얼얼한 느낌이다.
깊고 치밀한 음모에 휩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죠?”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제가 짐 마차에 올라탔다.
“전혀.”
그녀가 짐칸에 앉은 것을 확인한 에녹이 이랴, 하고 고삐를 후려쳤다.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의 말이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
그렇게 출발한 마차가 갈라진 산맥을 지날 때까지도, 세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멀어지는 설산을 바라보던 그녀가 결국에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없네.”
이상한 일이었다.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분노는커녕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에녹을 향한 케케묵은 원한을 깨끗이 잘라 낸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느낌이 좋았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는 달리 순탄한 여행길이 될 것 같았다.
***
그리고 그날 밤.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야지. 왜 오른쪽으로 꺾고 지랄이세요!”
“꼬우면 네가 몰든가.”
“그래요. 그럽시다. 내가 해도 이것보단 낫겠네!”
“까불지 마. 네가 뭐, 마차의 심오한 세계를 알아?”
“심오한 세계는 몰라도 주인님이 말을 좆같이 모는 건 알겠네요.”
“말투가 또 왜 이러지? ‘요’만 붙이면 다 존댓말인 줄 알아?!”
세라와 에녹은 바로 개같이 싸웠다.
“어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유치한 말싸움에 듣다 못한 비제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짐칸에 꼬물꼬물 잠자리를 마련한 아이가 포근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다 싸우면 깨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