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60화 (60/131)

#60

“레니스 씨.”

서류를 살피던 비제가 그를 불렀다.

덜컹,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던 레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섰다.

비제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홍차가 마시고 싶어요.”

“응, 가져올게!”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레니스가 얼른 집무실을 나섰다. 멀리서 도기가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레니스가 트레이를 끌고 돌아왔다.

주전자를 들고 다가온 레니스가 비제의 전용 잔에 홍차를 따라 주었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말끔하게 해냈다.

뜨거운 물에 닿자 찻잔 바닥에 그려진 봉오리가 피어나며 노란 꽃잎을 펼쳐 냈다. 비제가 고향을 떠나올 때 챙겨 왔던 할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였다.

뜨거운 홍차를 후후, 불어 낸 비제가 한 모금 얕게 삼켰다. 그리고 따로 챙겨 둔 서류 봉투를 들어 레니스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마커스 씨한테 가져다주세요.”

“벌써 다했어?!”

얼른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레니스가 그것을 넘겨받았다. 바로 어제 마커스가 제출한 비용 지출 내역이었다. 언제나 기한을 최대한 끌다가, 엉망진창으로 정리해서 한꺼번에 내 버리는 바람에 레니스의 야근을 책임져 주던 든든한 일감이었다.

그걸 몇 시간 만에 끝내다니. 역시 비제는 천재인 걸까? 레니스가 동경의 눈으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비제가 그게 아니라는 듯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서류는 반려예요. 시간 순으로 정리해서 다시 제출하라고 하세요.”

“……!”

단칼에 서류를 되돌리는 모습에 레니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만약 그 혼자였더라면, 마커스가 아무렇게나 정리한 서류를 울면서 정리했을 것이다.

마커스를 찾아가서 다시 해 오라고 말할 배짱 따위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비제는 그 일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해냈다. 그녀가 시그너스 길드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뜯어고친 게 바로 그것이었다.

엉망으로 서류를 제출하는 사람들의 기강을 잡는 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길드 금고를 걸어 잠그는 일.

체계 없이 진행되고 있는 재건을 절차화하는 일.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타고난 카리스마와 결단력 아래, 시그너스 길드는 점차 순한 양처럼 비제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덕분에 레니스는 더 이상 밤새워 서류를 재정렬하는 비효율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단해……. 비제는 하늘이 내려 준 천사일까?

레니스는 이젠 동경을 넘어 존경에 가까운 눈빛을 보냈다.

“으, 응! 다녀올게.”

반려 서류를 품에 꼭 안은 레니스가 후다닥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 서류까지 처리한 비제가 툭, 하고 펜을 놓았다. 길게 기지개를 켠 그녀는 레니스가 따라 두고 간 홍차를 들고 창가로 향했다.

새롭게 옮긴 재정관용 집무실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한눈에 길드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렇게 창가에 서서 길드를 감상하는 건, 비제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재건이 한창인 길드는 오늘도 활기가 넘쳐흘렀다.

무너진 방벽을 가장 우선적으로 건설하는 중이었고, 부서진 집이나 주요 시설들도 이전보다 더 튼튼하고 크게 짓기로 했다.

저번에 있던 습격을 거울삼아, 길드 내부의 구조도 슬쩍 손보기로 했다. 비제는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는 시그너스 길드를 만족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으로서는 색감은 영 삭막하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아카시아 나무를 심어야겠어.”

새로운 계획을 세운 비제가 후룩, 홍차를 들이켰다.

헤타르딘을 떠나 시그너스 길드에 온 지 2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비제는 완벽하게 길드에 적응한 상태였다. 길드원들은 막대한 자금을 들고 온 어린 소녀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함께 일하게 된 레니스는 비제의 비상한 금전 감각에 혀를 내두르며 제발 길드를 떠나지 말아 달라며 납작 엎드렸다.

대륙 최대 규모의 길드는 그렇게 순조롭게 비제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드로 만들어 주마.”

후후후.

야망을 불태운 비제가 음산하게 웃으며 어디 더 뜯어고칠 곳은 없나 샅샅이 훑어보다가.

“음…….”

뭔가 못마땅한 광경이라도 목격했는지 눈매를 좁혔다.

한창 집중하고 있는 비제의 뒤로, 커다란 인영이 불쑥 나타난 건 그 순간이었다.

“뭘 그렇게 봐?”

“푸훕!”

놀란 비제가 입 안에 있던 홍차를 가차 없이 뿜어냈다. 대체 누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나 했더니, 그녀가 방문 요청을 했던 스노우였다.

“켈록, 켈록, 스노우 씨. 깜짝 놀랐잖아요.”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스노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미안~. 문이 열려 있길래. 그냥 들어와도 되는 줄 알았어.”

비제를 따라 창가에 선 스노우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뭘 그렇게 열심히 훔쳐보고 있었어?”

“훔쳐보다뇨.”

적절치 않은 단어 선택에 비제가 그런 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길드의 중앙 광장을 차지하고 있는 두 인영을 가리켰다.

“안 보고 싶어도 저렇게 눈에 잘 띄는 걸 어떡해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멀리서도 옥신각신하는 게 보이는 두 남녀가 보였다. 시그너스 길드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에녹과 세라였다.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둘은 서로를 삿대질하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화를 주체하지 못했는지, 세라가 에녹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온 에녹이 세라의 뒷덜미를 콱 낚아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세라가 질질 끌려가며 발버둥을 치다가, 틈을 봐서 탈출했다. 전속력을 다해 도망쳤지만 에녹은 금세 그녀를 따라잡아 어깨에 짐짝처럼 짊어졌다…….

분명 멀리 있는데도 욕설을 외치는 세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오늘도 그녀는 고통받고 있었다.

‘대장은 왜 노예 언니를 못살게 굴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비제는 안타까운 눈으로 세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시그너스 길드로 데려와 준 노예 언니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대로 된 계약서도 쓰지 않고 기약 없이 대장에게 굴려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몹시 신경이 쓰였다.

내가 구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련하게 세라를 바라보던 비제가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해.”

“보기 좋네~.”

같은 장면을 본 두 사람의 입에서 전혀 다른 감상이 튀어나왔다.

“……?”

“……?”

둘은 잠시 서로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비제가 일이나 하자며 스노우에게 자리를 권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먼저 자리에 앉은 스노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로 불렀어? 난 제출한 서류가 없는데.”

“알아요. 긴히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어요.”

비제는 그 일로 부른 게 아니라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손님용으로 마련해 놓은 찻잔에 스노우 몫의 차를 따라 주었다.

비제는 그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는 걸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대장이 빼돌린 돈이요.”

의외의 주제였는지 스노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아직도 쫓고 있었냐는 표정이다.

“어디로 갔을까요?”

맹금류처럼 눈을 빛낸 비제가 그동안 알아낸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3750골드. 그 큰돈이 흘러갔으면 어디서라도 흔적이 나올 만한데, 주변 상단이나 가까운 마을, 도시, 길드까지 전부 뒤져 봤는데도 그 ‘셀레네’라는 사람의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어요.”

멀리 떠났다고 한다면 더더욱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먼 길을 가기에 한계가 있었다. 굳이 본명을 쓰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장기간 호위 의뢰를 넣은 기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답은 둘 중 하나죠. 하나는 가는 길에 죽어 버려서 돈이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거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작정하고 흔적을 지운 거예요.”

“오오-.”

논리적으로 도출된 음모론에 스노우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를 향해 상체를 숙인 비제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대장은 혹시 다른 의도가 있어서 돈을 빼돌린 걸까요?”

“하하! 그건 아닐걸.”

스노우는 우스운 농담을 들은 양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은 그냥 달라니까 줬을 거야. 그 사람한테는 돈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거든.”

“예에…….”

결코 그럴 리 없다는 대답에 비제가 김빠진 얼굴을 했다. 역시 이 가설도 틀린 모양이다.

“근데 이런 걸 왜 나한테 물어? 대장한테 직접 물으면 될걸.”

그때, 스노우가 역으로 질문을 해 왔다.

당사자를 놔두고 굳이 본인을 부른 이유가 궁금한 눈치였다.

비제는 대충 에둘러 대답했다.

“……스노우는 대장이랑 친하잖아요.”

“아아-.”

스노우가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제, 대장이 어렵구나?”

“…….”

비제가 정곡을 찔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비제는 에녹이 어려웠다. 처음 헤타르딘에서 만났을 적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하는 게 껄끄러워졌다.

대장에게 매번 지지 않고 대드는 세라가 신기할 정도로.

비제의 진심을 모른 척 흘려 넘겨 준 스노우가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정 의도가 의심되면 가서 물어봐.”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일은 없어.”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한 비제를 두고, 스노우가 호언장담했다.

“대장은 그렇게 열심히 뭔가를 숨기지 않아.”

빙긋, 웃는다.

“그런 건 필요한 놈들이나 하는 거거든.”

“…….”

그러니까, 대장은 굳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무언가를 숨길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건 뭐든 이룰 수 있는 사람이니까.

“생각해 보고요.”

스노우의 시선을 피한 비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으로 다가간 그녀가 마지막으로 검토했던 서류를 챙겨 품에 안는다.

“저, 이만 가 봐야 해요.”

“응, 잘 다녀와.”

나간다는 말에 스노우가 다정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의도를 몰라주는 반응에 비제가 에휴, 한숨을 쉬며 다시 설명했다.

“……스노우 씨가 나가야 저도 나가죠.”

보안을 지켜야 한단 말이에요.

비제가 엄한 목소리로 스노우를 타박했다.

“너 정말 철저하구나.”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린 스노우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알았어요! 알았어!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면 되잖아요!”

결국 싸움에서 졌는지, 세라가 씩씩대며 에녹이 끌고 가려던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씩씩대는 그녀와는 달리, 에녹은 뿌듯한 얼굴로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 낯짝을 샐쭉한 눈으로 쳐다봐 준 비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에녹을 불렀다.

“대장…….”

“……?”

에녹이 비제를 돌아봤다.

어느새 세라를 보며 지었던 뿌듯한 미소는 전부 지워진 채다.

비제는 준비한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결재 좀 해 주세요.”

“어디 봐.”

집에 가져가서 제대로 해 달라는 이야기였는데, 에녹은 자리를 옮기지 않고 휘릭, 휘릭, 서류를 넘겼다. 제대로 읽긴 하는지 한 장당 머무르는 시간이 채 몇 초도 되지 않았다.

열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비제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노예 언니는-.”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얼마예요?”

“……뭐?”

서류를 보던 에녹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말해 달라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다. 잘못 들었다 믿고 있는 얼굴이었다.

비제는 다시 또박또박 제 질문을 읊었다.

“얼마면 저에게 넘기실 거냐고요.”

“허-.”

자신이 제대로 들었음을 깨달은 에녹이 헛웃음을 지었다.

다시 서류로 관심을 옮긴 그가 단호하게 못 박았다.

“얼마를 줘도 안 넘겨.”

“왜요!”

비제는 탁, 발을 구르며 따져 물었다.

어차피 맨날 괴롭히기만 하면서!

비난하는 눈으로 노려봐 주자, 에녹이 건성으로 이유를 던져 주었다.

“음, 얼굴이 마음에 드니까?”

“얼굴……?”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거든.”

“……?”

그에 비제가 더더욱 미궁에 빠진 반응을 보였다.

아는 사람을 닮았으면 더 잘해 줘야 하지 않나? 딱 그렇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대체 누구를 닮았기에 저 착하고 순진한 언니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일까. 삐뚜름한 눈으로 에녹을 쳐다본 비제가 시비조로 물었다.

“닮은 사람 누구. 뭐, 원수라도 돼요?”

“…….”

에녹은 그 말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신 빈틈없이 사인한 서류를 비제의 품에 안겨 주었다.

“자, 가져가.”

그러면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축하를 건넸다.

“축하해. 앞으로 돈 쓰는 일은 나한테 가져올 필요가 없어졌네.”

“…….”

뭐야. 제대로 읽었잖아.

비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넘겨받았다.

뭔가, 더, 이전의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는데 애매하게 끊어져 버린 바람에 그럴 수가 없어졌다.

볼일도 끝났고, 남은 건 집무실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하여튼 노예 언니 괴롭히지 마세요!”

찝찝하게 퇴장하게 된 비제가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근엄하게 경고하곤 휙, 등을 돌려 가 버렸다.

“…….”

일방적인 악당 취급에도 에녹은 덤덤했다.

으쓱, 어깨를 턴 에녹이 걸음을 옮겼다. 제 노예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제집 방향이었다.

점점 인적이 적어지는 길을 걸으며, 에녹은 생각에 빠진 얼굴을 했다.

‘원수라도 돼요?’

실은, 아까부터 비제의 질문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노예의 얼굴 때문에 넘겨줄 수 없다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아이의 얼굴도 함께.

그 질문을 곱씹고 있으면 또 한 번,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과거에, 그 여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누구도 에녹에게 저런 질문 따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원수라도 돼요?’

그래서,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처음이어서.

야속한 일이다.

예전에는, 누군가 제발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던 질문인데, 아무 쓸모 없어진 그 말을 이제 와 듣게 되다니.

“…….”

집 근처에 도착한 에녹이 걸음을 멈췄다.

마커스가 새로 달아 준 문 너머로 투닥투닥 요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가 잔뜩 난 노예의 얼굴을 그려 내며 그가 한참이나 늦은 답을 조용히 읊조렸다.

“……아니.”

제 노예와 닮은 그 여자는 결코, 자신의 원수 같은 게 아니었다고.

만약 아까 이렇게 대답했더라면, 그 호기심 많은 아이는 또 묻겠지.

그게 아니면 대체 뭔데요?

그제야 비로소, 에녹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밤하늘을 닮은 군청색 머리칼.

설원보다 더 새하얀 얼굴.

차분하게 침잠하여 반짝이는 자수정 색의 눈동자.

새벽의 불길함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 여자는.

“내, 첫사랑.”

내 첫사랑이었노라고.

“…….”

혼자만의 대화를 끝낸 에녹이 문을 열었다.

“뭐야! 이렇게 빨리 올 거였으면서 왜 저한테 집 보고 있으라고 했어요! 놀러도 못 가게!”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노예가 득달같이 따지고 들었다. 에녹이 능글맞게 웃었다.

“늦게 오면 네가 질투할까 봐 일찍 왔지?”

“미쳤어요? 왜 그런 말을 하지? 싸우자는 건가?”

노예가 질색하며 그를 경멸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반짝반짝, 살아서 움직이는 얼굴, 거리감 없이 주고받는 대화에 에녹은 또다시 실감하고야 만다.

아-.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죽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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