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세라가 에녹의 집을 빠져나온 건 저녁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어휴, 겨우 빠져나왔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은 그녀는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어 낡은 돌계단을 돌아 나왔다.
“뭐 치울 것도 없구만 맨날 청소는 시키고 지랄이야.”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편 세라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지난번의 싸움으로 유일한 가구였던 테이블마저 부서진 후, 에녹의 집은 한층 더 완벽하게 썰렁해졌다.
세간살이도 없고, 둘 다 잠을 잘 때가 아니면 집에 붙어 있질 않으니 어질러질 일도 없는데 에녹은 제 노예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하려고만 하면 청소를 핑계로 그녀를 부득불 집에 묶어 두려 난리였다.
오늘만 해도, 무슨 수를 써도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곳이 있어 일찌감치 집을 나섰더니 득달같이 쫓아와 그녀의 외출을 방해했더랬다.
그래서 시킨 일을 다 끝낸 후 외출하려고 하면 또 다른 트집을 잡아 그녀를 주저앉혔다. 방금 전에도 에녹이 잠시 욕실에 들어간 틈을 타 빠져나온 것이다.
‘이번에는 또 뭐가 못마땅해서 이러는 건데요!’
참다못한 세라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쏘아붙였다. 이번엔 맹세코 그녀 쪽에서 먼저 죄를 지은 게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괴롭히나 싶어서.
에녹은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답했다.
‘그런 거 없는데?’
앙금이 있으면서 없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문제 인식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럼 무의식적으로 날 엿 먹이는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심각한 일이었다.
“저랑 나랑 얼굴 마주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겠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세라는 여전히 저 짜증 날 정도로 예쁜 면상을 보는 게 껄끄러웠다.
그건 저쪽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왜 자꾸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 한 무리의 여자들이 우르르 집 앞에 몰려들었다.
세라는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에녹의 애인들이다. 세라가 특별히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기보다는 손에 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어서 애인이겠거니. 하는 것이다.
꽃은 에녹과 그의 애인들 사이에 정해진 특이한 의사 표현 방식이었다. 오늘 밤 너와 밤을 보내고 싶으니, 나를 초대하라는…….
해 질 녘까지 애인들이 꽃을 보내면, 에녹은 그중에 누구와 밤을 보내고 싶은지 결정해야 했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그의 마음이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든, 한 명을 부르든, 여러 명을 부르든, 상대의 집으로 가든, 상대를 자신의 집으로 부르든 말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연애관을 가진 세라에게는 몹시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애인을 여러 명 두는 행위는 흔히 일어나는 일인 모양이었다.
그중에 에녹이 특히 애인이 많을 뿐이지.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가, 세라는 아무리 해도 시그너스 길드의 자유로운 연애관을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나 때는 무조건 한 명하고만 만났어야 했는데, 요즘 애들은 참 발랑 까졌다니까. 세라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세대 차이를 느꼈다.
“…….”
“…….”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딱히 하하 호호 하며 안부를 물을 만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특별한 인사는 오가지 않았다.
“흐음.”
세라의 입에서 낮은 침음이 샜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그녀는 에녹의 애인들과 마주치는 게 불편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디, 가나 봐?”
그들이 세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영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녹의 애인들은 자기들끼리 잘 웃고 있다가도 세라만 보면 눈꼬리를 뾰족하게 올리며 날을 세웠다.
언제는 남들의 따뜻한 눈빛을 받으며 살았냐 싶겠지만, 이건 그동안 세라가 받아 왔던 시선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볼일이 있어서.”
“오늘 안 들어와?”
집을 비운다는 말에, 에녹의 애인들이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건 아니고.”
“아, 그래.”
그러다 외박은 아니라고 하니 또 금방 미소를 거둔다.
세라는 에녹의 애인들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이유는 아마도 세라가 그들의 애인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유는 알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본인들끼리는 잘 지내면서 왜 날 질투하지? 어차피 애인은 자기들이고, 나는 노예인데…….
뭐가 됐든 날 좀 잊었으면 좋겠다.
“좋은 시간 보내.”
기묘한 대치 상황에 피로함을 느낀 세라가 먼저 자리를 떴다. 에녹의 애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응. 그럴게. 라고 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긴 했다.
조용히 저택을 벗어난 세라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예상치 못하게 붙들리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달리지 않으면 시간 안에 도착하기 힘들 것이다.
밤길을 열심히 달려 목적지와 가까워질수록 떠들썩한 소리가 점점 커졌다. 시야를 가리던 큰 건물을 지나치자, 길드 회관 앞에 저녁 식사가 한창인 야외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오, 세라! 왔구나!”
세라를 발견한 마커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알은체를 해 왔다.
“오-. 노예님도 오셨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안 오는 줄 알았잖아!”
“어서 이리로 와. 식사 아직이지?”
그를 따라 주르륵 뒤를 돌아본 길드원들이 반가운 얼굴로 세라를 맞이했다. 재건이 거의 끝나가는 기념으로 마련된 오늘의 연회에는 대부분의 길드원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자리를 시작한 지 꽤 되었는지, 다들 이미 얼큰하게 취한 얼굴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주인님을 따돌리고 오느라.”
딱히 웃기려고 한 말도 아니었는데, 길드원들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탓이 아니라, 요즘 시그너스 길드원들은 세라 한정으로 웃음이 헤퍼졌다.
“내가 우리 노예님한테 구조 당했을 때 얘기했었나?”
“아이고, 이 사람아 수십 번도 더 했다. 그거 말고 노예님이 우리 애들을 어떻게 구했는지나 들어!”
“그것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그만 좀 해 이것들아. 여기서 노예님 도움 안 받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왜 아니겠는가.
위기의 순간 짜잔 하고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인데. 무슨 말을 하든 흐뭇하고 재미있겠지.
“노예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내가 전부 해 줄 테니까!”
“나도! 나도 뭐든 해 줄 테니 말만 해!”
누군가 호기롭게 은혜를 갚겠다 외치자 여기저기서 나도 뭐든 해 주겠다며 공수표가 남발했다.
“우리 길드를 구해 준 노예님인데, 뭔들 못 할까!”
지난 안타레스의 습격 때 몸 바쳐 활약한 덕분에.
세라는 시그너스 길드에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노예님’으로 통했다. 레니스가 열심히 홍보한 덕에, 그녀의 이름을 모두가 알게 되긴 했지만, 정작 그것을 부르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은인의 얼굴에 대고 쌍욕을 하는 것 같다나…….
한껏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이 세라를 향해 열심히 엄지를 추켜세웠다. 누군가는 이 분위기를 진정시켜 주어야 할 텐데.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도 함께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사람들도 구해 주고, 또 우리 비제도 데리고 왔잖아! 덕분에 우리 길드 내실이 몇 배는 튼튼해졌어!”
크게 맞장구를 친 마커스가 곁에 앉은 비제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떻게 이런 복덩이를 데리고 올 생각을 다 했어? 대장보다 네가 훨씬 낫다. 우리 길드의 은인이야! 은인!”
그러자 한창 식사를 하던 비제가 엣헴, 하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제가 좀, 잘났긴 했죠.”
아이의 재롱에 또 한차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만찬장에서 흘러나왔다.
“하하, 하하하…….”
부담스러울 정도로 훈훈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라뿐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할 때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채 무도회에 온 사람처럼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길드에는 면역자라는 이유로 세라를 구박하거나 대놓고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불편해하는 사람이 몇 있기는 하지만, 분위기가 이러니 속마음이 어떻든 겉으로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뭐, 죽도록 어색하기는 해도 길드 생활이 많이 편해지기는 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러다 시간을 확인한 세라가 스리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드원들은 빨리 돌아와야 한다며 그녀를 보내 주었다.
바람을 쐰다던 세라는 그 길로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처음 가 보는 길이지만 마치 아는 것처럼 한 번을 헤매지 않았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을 여니 고기 익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꽤 많은 사람이 모인 연회에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주방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방을 슬쩍 둘러본 세라는 한쪽 구석에서 조금씩 부글거리기 시작하는 냄비를 발견했다.
“다행히 안 늦었네…….”
안도의 숨을 쉰 세라가 얼른 다가가 기름이 펄펄 끓고 있는 냄비를 불 위에서 내려 두었다.
“으잉? 노예님. 주방까진 어쩐 일이야?”
그와 동시에 부족한 재료를 가지고 돌아온 주방장이 세라를 발견했다.
“기름이 끓고 있어서요.”
세라가 아직도 부글대는 냄비를 가리켰다.
주방장을 돌아본 그녀의 시선은 그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깨에 올라간 자그마한 검은 덩어리.
시그너스 길드의 주방장인 에드워드는 로우드 근방에서 음식을 맛있게 하기로 소문난 요리사였다. 베테랑 요리사인 그는 수십 년이 넘는 주방 생활 동안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하지만, 길드의 재건을 축하하는 연회 자리에서, 깜빡하고 불에 올려 둔 기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에드워드는 손을 써 보기도 전에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에드워드가 사라지자 그의 음식에 길들여져 있던 길드원들은 하나둘 식욕을 잃어 가고, 무슨 음식을 먹어도 만족스럽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아이고, 정말 고마워. 내가 평소엔 절대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데…….”
이제는 익숙한 길드의 멸망 위로, 주방장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니, 이건 치워야겠어.”
스스로에게 경각심이 생긴 에드워드가 기름을 이용한 요리는 하지 말아야겠다며, 세라가 내려 둔 통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좋은 생각이네요.”
세라가 그 결정에 맞장구를 치자, 에드워드의 어깨에 앉아 있던 검은 덩어리가 연기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창밖으로 날아가는 궤적을 멀거니 쳐다보던 세라가 히죽,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그녀가 반드시 이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이번엔 얼마나 줄었으려나-.”
조용히 주방을 빠져나온 세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팔뚝을 확인했다. 촤르륵, 돌아가던 숫자들이 멈춘다.
387,256,100.
‘음, 3만 년이라.’
들어간 노력 대비 나쁘지 않은 숫자였다.
처음보다 제법 많이 깎여 나간 형량은 어느덧 3억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역시나 안타레스의 습격을 막아 낸 순간이지만, 두 번째는 바로 비제였다.
그녀가 길드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세라의 형량이 무려 천만 년이나 줄어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하마터면 천만 년짜리를 놓칠 뻔했다.
비제와 그녀의 만남을 이끌어 주었던 수많은 우연에 감사하며, 세라가 질끈 두 눈을 감았을 때였다.
“여기서 혼자 뭐 해?”
“……!”
아무것도 없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이 보였다.
이 길드에서 저렇게 반짝거리는 머리를 가진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아, 깜짝이야. 스노우야 말로 여기서 뭐 해요?”
타박 섞인 어조로 따지자, 스노우가 제 손에 들린 빈 병을 흔들며 대답했다.
“술이 떨어져서.”
그러고 보니 그가 나타난 방향이 입구가 아니라 회관 내부 쪽이었다. 또 연회에 어울리지 않고 홀로 술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기한 눈으로 세라를 훑어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케 왔네? 지금쯤 대장한테 붙잡혀 있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도망쳐 나왔죠.”
“아아, 그럼 곧 잡혀가겠구나?”
의기양양하게 도망쳐 나왔다고 하니 별 재수 없는 소리를 해대며 실실 웃는다. 볼일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바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세라가 곧장 정색했다.
“아니거든요? 지금쯤 애인들이랑 재미 보느라 바쁠걸요?”
“……흐으음? 네가 있는데, 왜?”
“……?”
수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질문에 세라의 미간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 스노우는 마치 세라랑 에녹이 심심하면 몸이나 섞는 그렇고 그런 사이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한번 뒹군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치료였고, 그 일 이후에 에녹과는 그런 식의 접촉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세라는 그런 문란한 남자와 엮이는 현실에 불만을 표할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하다는 뜻이다.
불쾌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스노우에게 단호하게 못 박았다.
“제가 주인님이랑 왜 재미를 봐요.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시죠.”
“……?!”
그러자 스노우가 필요 이상으로 놀란다.
“……대장이랑 안 자?”
“안 자!”
“ㅇ-.”
“왜냐고 묻지 마! 그냥 안 자는 거니까!”
선수를 친 세라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검지를 치켜세우며 경고했다.
“재수 없게 주인님 이야기 자꾸 꺼내지 말고 술이나 찾아서 가세요.”
그리고 휙, 몸을 돌려서 가 버렸다.
거침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노우가 여전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직도 참고 있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한동안 그럴 리 없다고 중얼대던 그는 곧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좀, 도와줘야 하나?”
그러면서도 달빛에 비치는 두 눈은 못된 장난을 생각해 낸 아이처럼 반짝거렸다. 역시 자기만 한 친구가 없다고 자화자찬을 한 스노우가 키득거렸다.
세라가 들었다면 분명 제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는 거라 의심할 정도로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