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62화 (62/131)

#62

습한 안개가 발밑까지 밀려들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공간은 신을 모시는 공간처럼 순결했다.

그곳이 일반적인 신전과 다른 점은 신상을 모셔 두어야 하는 자리에 살아 있는 인간이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남자는 8개의 기둥과 8개의 계단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가 편히 몸을 기대앉은 의자는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황금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경건하고 정제된 외양의 신전에서 언뜻 왕좌를 연상케 하는 화려함이 홀로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황금의 번쩍이는 휘광도 그 위에 올라앉은 남자에 비하면 그다지 찬란한 것이 아니었다. 상석의 양옆에 위치한 향로에서 검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불길한 힘을 담은 빛이 그의 옆얼굴을 간지럽혔다. 매 순간 바뀌는 음영이 남자의 눈을 가린 안대 위로 휘청거렸다.

안대로 가리고 있어도, 그 아래에 숨겨진 얼굴이 아름다우리라는 것은 곧게 뻗은 콧날이나 날렵한 턱선, 그리고 모양 좋게 그려진 입술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는 달리, 남자는 제법 투박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강대한 어깨와 커다란 손, 옷깃 아래로 드러나는 팔뚝에는 검에 찔리고 긁힌 흉터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강대한 몸을 크게 감싸며 결 좋은 군청색 머리카락이 발끝까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검은 불꽃에 반사된 머리칼이 꼭 일렁이는 밤의 바다와 같았다.

밤바다를 두르고 있는 남자는 신비롭고 고요했다.

턱을 괸 채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그는 아무렇게나 제 몸을 방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변의 모든 공기와 바람, 하늘과 땅, 누군가의 영광이 서렸을 황금과 불길한 불꽃이 남자의 짙은 존재감에 눌려 숨을 죽였다.

그가 그곳에 앉음으로써 과할 정도로 찬란한 황금은 왕좌가 되고, 그가 이곳에 있음으로써 주인 잃은 신전은 위풍당당한 어전이 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던 어전에 인기척이 들렸다. 차분하지만 다급함이 느껴지기에 충분한 걸음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남자가 속으로 발소리를 샜다. 스물다섯 걸음을 걸어온 상대가 멈춰 섰다.

“현자님.”

그를 부르는 목소리.

미안하게도 남자는 상대가 오기 훨씬 전부터 그가 할 말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다.

현자는 이미 다 아는 말을 굳이 하는 수고를 덜어 주기로 했다.

“그래.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나……?”

“……!”

눈이 보이지 않아도 엎드린 자의 등이 굳는 게 느껴졌다.

공기 중에 두려움의 냄새가 섞였다. 상대가 이미 땅에 닿은 이마를 쿵, 소리 내어 바닥에 찧었다.

“며, 면목, 없습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현자는 그딴 건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이유는?”

중요한 건 일이 어쩌다 그런 결과에 봉착했느냐는 거였다. 현자의 물음에 남자가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계획대로 목표물에 저주를 걸려 했습니다만. 예상치 못하게 에녹 소서가 나타나는 바람에…….”

에녹 소서.

시기와 맞지 않게 끼어든 이름에 현자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 남자가 헤타르딘에?”

그가 흥미를 내비치니, 발치에 엎드린 남자가 다급한 어조로 소상히 일러바쳤다. 하지만 말하면서도 영 자신이 없는 말투였다.

“예. 웬 노예 하나를 데리고 헤타르딘까지 왔다고 합니다. 마을에 파견된 자들에 따르면, 받을 돈이 있어서 그걸, 받으러 왔다고…….”

허-.

터무니없을 정도로 구질구질한 이유에 현자의 입에서 기가 막힌 한숨이 샜다.

“지난 200년간 꼼짝도 하지 않던 자가-.”

하얗고 곧은 손가락이 톡, 톡, 손끝으로 팔걸이를 내려친다.

“고작 돈 때문에 움직였다……?”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다소 황당한 소식이었다.

톡, 톡. 현자가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석연찮은 의중을 읽은 남자가 얼른 의욕을 내비쳤다.

“시그너스 길드를 좀 더 들쑤셔 볼까요?”

현자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두어라.”

손가락을 멈춘 남자가 허공을 향해 팔을 내뻗었다.

마치 날려 보낸 매에게 내려설 장소를 만들어 주는 듯한 동작이었다.

“……?”

그에 고개를 들어 현자를 올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시는 분이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바람을 타고 날아온 검은 연기가 살랑살랑 춤을 추며 현자의 팔 위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더 많은 양의 연기가 흘러들어 왔다.

모든 방향에서 날아온 그것은 새하얀 신전을 가로질러 곧장 현자가 뻗은 팔 위로 모여들었다.

한 점을 향해 모여든 그것들은 동그란 구의 형상으로 뭉쳐 들었다가.

어느 순간 새의 형상으로 변해 날개를 펼쳤다.

현자의 팔에 내려앉은 그것은 팔뚝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제게로 돌아온 새에게 상을 주듯이, 현자가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마치 안대를 쓰고도 새의 형상이 보이는 사람처럼 그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시그너스 길드로 보낸 것들은 다 돌아온 모양이군.”

“……예?”

제게 한 말인 줄 착각한 남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는 현자의 팔에 내려앉은 검은 새가 보이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러가라.”

현자가 눈을 뜨고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를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시그너스는, 그대로 둡니까?”

이렇게 끝나는 게 의아했는지, 남자가 재차 시그너스 길드를 걸고넘어졌다. 손안의 새를 쓰다듬던 현자의 손길이 멈칫했다.

“…….”

그가 멈추자 어전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보이지 않는 바늘이 살을 찌르는 감각에 남자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희게 질렸다.

“……! 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쿵! 쿵! 쿵!

바닥에 크게 머리를 찧은 남자가 기어코 피를 비춤으로써 용서를 구했다.

“모든 건, 안타레스의 가시 아래……!”

숨 막히는 표정으로 일어서 예를 갖추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불쾌해진 현자가 귀찮은 벌레 내쫓듯 손을 내저었다.

남자는 행여나 현자님의 마음이 변하실까 얼른 어전을 달려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현자가 잠시 방치해 두었던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귓가에 푸드덕대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그 기척이 기꺼워 현자의 입에 따스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왕좌에 앉은 그의 주위로, 온통 새카맣게 칠해진 새 수십 마리가 내려앉았다. 방금 창을 타고 들어온 작은 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사나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현자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 새들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함께였다. 다만, 믿음이 부족한 자의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남자의 어깨를 차지한 새들이 제 의견을 피력하듯 열심히 울어댔다.

“괜찮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단다.”

현자는 새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자상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어차피 운명은, 내 것이니까.”

현자의 왕좌에 내려앉은 검은 새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듯 불길한 날개를 한껏 펼쳤다. 그들을 따라 날개를 편 작은 새가 따라 울었다.

뀨우, 하고.

***

“대장.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이른 아침. 해가 뜨자마자 쳐들어온 스노우는 에녹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저렇게 물어 왔다.

“……?”

아직 잠기운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에녹이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할 말이 없냐니.

마치 자기 몰래 머리끝만 살짝 자른 애인이 ‘에녹,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시비 거는 거야?”

그러니까, 썩 좋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심한 듯 살벌한 질문을 던진 에녹이 흥미를 잃은 듯 멍하니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볼만한 건 모조리 나무판자로 틀어막고, 하늘만 뚫어 놓은 유리창에는 흐릿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세라.”

그때, 스노우가 노예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심드렁하게 창밖을 헤매던 연둣빛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스노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걔랑 안 잔다더라?”

“……?”

그제야 에녹이 스노우를 돌아봤다.

대관절 그것이 너와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다. 스노우는 제 순수한 호기심을 피력하기 위해 한껏 무구한 표정을 꾸며 냈다.

“꼬시고 있던 거 아니었어? 어제 보니까 아주 애교가 철철 넘치던데.”

“애교는 무슨-.”

자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에녹이 팩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만 해도 속이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헛소리할 거면 이만 나가.”

아침부터 사내새끼 얼굴 볼 기분이 아니야.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에녹이 짜증 섞인 손짓을 휘휘 내저었다.

스노우는 집주인의 축객령 따윈 듣지 못한 사람처럼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왜 기분이 아니야? 지금쯤 날아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어제도 애인들이랑 질펀하게 뒹굴었잖아~.”

그의 말대로, 대부분의 길드원이 회관에 모여 단단하고 건전한 저녁을 보내고 있을 때. 에녹은 제집으로 애인들을 불러 모아 난잡하고 화끈한 밤을 보냈었다.

평소 그런 자리에 들락거리던 사람 중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스노우뿐이었다. 에녹의 애인들은 스노우와 자는 것도 좋아했는데 말이다.

“여럿이서 놀 거였으면서 나도 안 부르고.”

그 덕에 외로운 밤을 보내야 했던 그가 짐짓 서운한 어조로 칭얼거렸다.

다 큰 사내놈이 낑낑대는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부리부리한 눈으로 스노우를 노려본 에녹이 진저리를 쳤다.

“그것 때문에 해 뜨자마자 달려왔어? 어제 안 부른 거 때문에? 왜? 같이 못 뒹군 게 서운해? 너 혹시 나 좋아해?!”

듣기로는 어제 잘만 놀았다고 하던데, 어째 돌아오는 목소리에 예민한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그 꼴이 꼭 밥을 잔뜩 먹어 놓고도 심통을 내는 맹수 같았다.

욕구가 쌓일 틈도 없이 해소하는 주제에, 이토록 성질이 괴팍해진 이유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욕구불만.

자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랑 뒹구니 쌓이기만 하는 욕구가 풀릴 리가 있나.

“…….”

스노우는 그 간단한 진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에녹을 향해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딴 표정 짓지 마. 구역질 나게.”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에녹은 스노우의 의도와는 영 다른 방향으로 그 미소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상기하던 스노우는 곧 본인도 비위가 상한 표정으로 황급히 말길을 돌렸다.

“이제 와서 풋사랑 흉내 내는 것도 아닐 테고. 왜 답지 않게 손도 못 대는 중인데?”

그렇게 돌아간 주제가 결국 에녹과 세라의 잠자리에 관한 것이었다.

에녹은 되도 않는 단어를 제 앞에 갖다 붙이는 스노우를 대놓고 비웃었다.

“……풋사랑은 무슨.”

“그럼?”

“…….”

기다렸다는 듯이 되묻자 에녹이 짐짓 심각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에 한해서 꼭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는 듯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에녹이 어렵사리 입을 연 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

“여기서 괜히 몸이라도 더 섞었다가-.”

“섞었다가?”

그 애가 진짜로 좋아지면 어떻게 해?

아마 스노우가 예상한 말은 이 정도일 것이다. 이런 상황, 이런 타이밍에서 저런 서두로 튀어나올 대사라고는 뻔했으니까.

“걔가 날 더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해.”

하지만 에녹은 그것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깨우치게 해 주었다.

“……?”

“몸 정든 걸 착각해서 자기만 봐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면.”

“……??”

“애인들 다 내쫓고 자기하고만 살자고 드러눕기라도 하면, 상황이 귀찮아지지 않겠어……?”

이어지는 말들이 죄다 이상한 고대 언어처럼 들렸다.

설마 여기서 말하는 ‘걔’가 내가 아는 ‘걔’일까?

바로 어젯밤에 만난 ‘걔’는 좋아하기는 개뿔 에녹에 대한 감정이 귀찮음과 짜증 말고는 없다는 걸 온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여자 깨나 만나 본 스노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내숭이나 연기로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닌 진짜 배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짜증이었다.

그러니까, 에녹이 이딴 말이나 하고 앉아 있을 주제가 못 된다는 뜻이었다.

“…….”

덩달아 표정을 굳힌 스노우가 착잡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흐음-. 어쩌다, 그딴 생각을, 하게 됐을까~?”

최대한 언어를 순화하여 에녹의 의중을 캐물었다.

그러자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에녹이 자랑하듯 으스댔다.

“걔가, 날 죽이려고 했거든.”

“어……?!”

스노우는 이번에 진짜로 놀랐다.

세라가 에녹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익히 알았지만, 설마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건 질투하는 사람이나 하는 행동이잖아.”

반면, 당사자인 에녹은 침착하게 헛소리를 해댔다. 꼭 어디서 이상한 세뇌라도 받고 온 것 같았다.

“……누가 그래?”

“네가.”

“……???”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정신 나간 말로 에녹의 정신을 오염시킨 장본인이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게 밝혀졌다.

내가 저런 개소리를 했던가, 기억을 뒤져 보니 몇 년 전 애인과 칼부림이 났을 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음, 그걸, 그렇게 받아들였구나. 대장”

망했네.

기억을 떠올린 스노우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절망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때야 당연히 칼부림한 쪽이 적어도 애인이었으니까, 질투니 어쩌니 했던 거고. 그런 사이도 아닌데 죽이려 든 거면 그냥 살인 충동에 시달렸을 뿐 아닌가…….

어쩜 이렇게 찰떡같이 말했는데 개떡같이 알아들을 수가 있어. 스노우의 호소력 짙은 푸른 눈동자가 맹렬하게 에녹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적당히 거리를 지키면서 사는 거지.”

“……으음. 그렇구나.”

“어차피 날 좋아하는 건 쟤니까. 아쉬운 건 저쪽이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은 바로잡을 수도 없이 깊은 착각의 구렁텅이 깊숙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정 아쉬워서 침대에 기어 올라오면, 같이 뒹굴어 줄 의향은 있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여전히 오만했다.

그러니까 결국 정리하자면 에녹은 세라랑 몸만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이었다.

“……으음.”

스노우는 한결같은 에녹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와 애인을 공유하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새삼 대장이 여자를 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쓰레기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하루 종일 둘이서만 붙어 다니길래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아도 드디어 마음 붙일 사람을 찾은 줄 알았더니. 실상은 엉망진창이었다.

이래서야 평소랑 똑같잖아.

실망한 표정의 스노우가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은 아이처럼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대장은 걔랑 잠만 자고 싶다는 거지?”

“물론.”

“하지만 세라가 대장을 더 좋아하게 될까 봐, 때를 기다리는 거고.”

“그렇지.”

“흐음…….”

말끔하게 정리된 파국 앞에 스노우가 낮게 침음했다.

아, 이게 뭐야. 재미있는 이야기나 들으려고 왔는데 김이 팍 새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에녹과 세라 사이를 밀어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러다 문득, 그래도 자신으로 인해 시작된 오해의 실타래는 풀어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길 생각을 하니 너무 귀찮았다.

어차피 마음 따윈 필요 없는 관계라는데 그게 중요할까?

지극히 논리적인 의문이 득달같이 고개를 든다.

“그럼…….”

그래서, 스노우는-.

“내가 중간에 끼어도 상관이 없겠네?”

눈앞의 문제를 기꺼이 못 본 척 지나치기로 했다.

원인 제공 뭐 어쩌라고. 자신은 호기심을 채웠으니 되었다.

말끔하게 부채감을 털어 낸 스노우가 양심 대신 실리를 챙기기로 마음먹었을 때였다.

“아, 뭐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때마침, 대화 소리에 깨어난 세라가 눈을 비비며 2층에서 내려왔다. 스노우는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세라~. 마침 잘 왔어.”

“……?”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거든.”

부탁이 있다는 말에 에녹이 흘끔, 궁금한 눈으로 스노우를 쳐다보았다.

“안 들을게요-.”

세라는 귀찮은 낯으로 곧장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스노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보수를 제시했다.

“100골드 줄게.”

“들어나 볼까요?”

파격적인 보수에 세라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호의가 가득 실린 눈으로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세라, 너-.”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은 그가 아까부터 뺨에 와 닿는 강렬한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마쳤다.

“내 애인이 되어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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