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비록 객식구일지라도 스노우는 시그너스 길드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비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세워 둔 계획을 이행하는 사람처럼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데이트 코스로 세라를 이끌었다.
가볍고 한량 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스노우는 의외로 매너가 좋고, 신사처럼 그녀를 대했다.
첫 시범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공연장을 빠져나온 둘은 복원이 끝난 시가지 한복판의 디저트 가게에서 차를 한잔 마신 후, 또 한참을 걸어 다녔다.
사람이 많은 곳만 골라서 돌아다녔기에, 중간중간 아는 얼굴들과도 꽤 자주 마주쳤다. 그들은 스노우와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세라를 발견하고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스노우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가와 장난과 호기심이 절반씩 섞인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세라, 스노우랑 진짜 뭐 있어?”
“왜 하필 쟤랑……. 아니, 넌 남자 얼굴만 봐?”
“쟤도 대장 만만찮게 여자 많은 거 알지? 네가 뭐가 아쉬워서!”
“오히려 쟤가 더 나빠. 쟤는 잠만 자지 애인도 안 사귄다고!”
세라를 붙잡은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인데, 스노우는 에녹처럼 애인을 두지 않고 그저 바람 따라 몸 따라 그때그때 여자들과 놀아났던 모양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세라를 걱정하면서, 반반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엄하게 타일렀다.
웬만하면 다른 이의 연애에 이런 식으로 참견하지 않을 텐데. 누가 에녹 친구 아니랄까 봐 스노우도 참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걱정은 고맙지만, 나는……. 스노우가……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해.”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대해 이야기를 너무 들어서일까. 거짓말을 할 때 말을 절어 본 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영 입에 착 들러붙는 맛이 없었다.
이끌면 이끄는 대로 오냐오냐 거리를 거닐다, 가을이라 아무도 타지 않는 뱃놀이를 하려고 하기에 온 힘을 다해 거절했다.
세라가 감당하기에는 강바람이 몹시 추웠기 때문이다.
“우리 자기. 옷을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그제야 세라의 옷차림을 유심히 본 스노우가 차라리 잘되었다며 눈을 빛냈다.
세라의 손목을 붙잡은 스노우는 그길로 부티크가 모여 있는 거리로 향했다. 계절이 바뀌어 하늘하늘한 원피스 대신 두꺼운 코트와 투피스로 바꿔 입은 마네킹들이 가게 밖에 주르륵 이어져 있었다.
스노우는 그 거리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부티크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멜리아’라는 이름의 가게는 시그너스 길드에서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원단을 사용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딸랑.
가게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카운터가 보였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주인은 몸의 곡선을 아름답게 강조해 주는 보라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멜리아입니…… 스노우?”
반갑게 손님을 맞아 주던 주인이 예상치 못한 조합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스노우가 한층 친근한 어조로 주문을 했다.
“내 애인이 입을 옷을 좀 사려고 하는데.”
“애인이라고……?!”
자연스러운 애인 소개에 주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루 종일 뜬구름처럼 떠돌아다니던 소문에 당사자가 종지부를 찍어 준 것이다.
잠시 허둥지둥하던 주인은 곧 특유의 사교성을 발휘해 능숙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마침 예쁜 신상들이 많이 나왔답니다.”
주인은 처음에는 소문의 면역자를 실제로 보아 조심스러워했으나, 세라에게 몇 번 옷을 입혀 보더니 눈빛이 곧 맹수처럼 돌변했다.
“오우! 뭘 입어도 태가 사시네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주인이 연신 호들갑을 떨어댔다. 억양에 외국어 악센트가 묻어나서 그런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 훨씬 유난스러운 느낌이었다.
“조금만 꾸며도 이렇게 예쁜데, 왜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쁘지만!”
아예 세라의 뒤에 자리를 잡은 주인은 그녀가 입은 옷에 맞춰 머리를 손봐 주었다. 평소 관리를 하지 않아 아무렇게나 풀어 헤친 군청색 곱슬머리가 하얗고 고운 손 아래에서 조금씩 차분히 정리가 되었다.
“아, 그냥. 귀찮아서요…….”
거의 폭격 수준으로 쏟아져 내리는 칭찬에도, 세라는 시종일관 시큰둥하기만 했다.
옷이 그냥 따뜻하고 편하면 되지, 투피스를 입을 건지, 셔츠를 입을 건지, 원피스를 입을 건지가 왜 중요한지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호호호. 스노우. 고민되겠어. 이렇게 다 잘 어울려서.”
결국 세라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내길 포기한 주인이 타깃을 스노우로 바꾸어 호들갑을 떨어댔다.
“우리 자기야 뭘 입어도 잘 어울리지~.”
예쁘게 눈을 접은 스노우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며 맞장구를 쳤다. 어쩔 수 없다며 과장스럽게 고개를 내저은 스노우가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입었던 거 전부 줘.”
“저, 전부……?!”
파격적인 구매 의사에 주인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스노우……. 너 정말 임자 만났구나!”
잠시 감격을 삼키던 여인이 스노우의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계산대로 달려갔다.
“전부 산다고요?”
그의 결정에 놀란 사람은 비단 주인뿐만이 아니었다.
세라가 아무리 옷을 몰라도 자신이 입고 벗은 것들을 다 합치면 한두 푼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왜? 마음에 드는 옷이 없어?”
세라의 옆자리에 주저앉은 스노우가 다른 옷을 고르고 싶으면 마음껏 요청하라며 책자를 안겨 주었다. 흘끗, 책자를 내려다본 세라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가격을 애써 외면하며 낮게 속닥거렸다.
“이거 혹시 제 보수에서 까는 건 아니죠?”
“……대체 그동안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야?”
그에, 스노우가 더없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대체 그동안 얼마나 가혹한 삶을 살아왔으면 옷 몇 벌을 그냥 못 받느냐면서.
“…….”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세라가 침묵했다.
막연히 에녹이라면 이랬을 것 같고, 그 또한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으로 같이 다닐 일도 많은데, 마땅한 옷이 없어 보여서 사 주는 거야. 그리고…….”
에녹과는 달리 통이 큰 스노우가 힘내라는 듯이 세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분명 위로를 받는 상황일 텐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우리 자기, 따뜻한 옷 하나도 없잖아~.”
하지만 그렇지? 하고 되묻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공짜 옷임을 확인한 세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우의 말대로 그녀는 따뜻한 옷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에녹이 입으라고 가져다주는 것들은 하나같이 계절감이 애매해서 요즘에 입기엔 추웠고, 제 돈으로 옷을 사 입자니 그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슬슬 못 견딜 정도로 추워져서 뭐라도 사 볼까 생각은 하고는 있었는데, 스노우가 이번에도 세라의 수요를 찰떡같이 채워 준 것이다.
“잘 입을게요.”
그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 관심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입고 있는 옷은 주름이 반듯하게 잡힌 채 발목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플리츠스커트와 드레스 셔츠, 허리를 잘록하게 잡아 주는 갈색의 쇼트 코트였다.
그저 사이즈만 맞춰 입었을 뿐인 옷들은 맞춤처럼 세라의 몸에 촥 감겨들었다. 적당한 두께의 코트는 온종일 추위에 떨던 가녀린 어깨를 따뜻이 품어 주었다.
편한 옷은 아니었지만, 따뜻하니 그걸로 되었다.
그사이 스노우가 구석에 잘 개켜 있던 것을 끌어와 흔들어댔다. 세라가 원래 입고 있던 원피스였다.
“대장도 참 무심하지~. 날도 추운데 이런 거적때기 하나만 던져 주고 말이야.”
그치~?
그가 손목을 흔들 때마다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처럼 펄럭였다. 이렇게 보니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춥게 입고 다녔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세라는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네.”
그때, 계산대로 떠났던 주인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돌아왔다. 화사하게 피어난 두 뺨을 보아하니 오늘 스노우가 올린 매상이 어마어마하긴 했나 보다.
“계산 다 됐어. 스노우. 구입한 것들은 대장 집으로 보내면 돼?”
스노우의 손에 영수증과 보증서를 쥐여 준 주인이 친절한 어조로 그리 물었다.
“아니. 길드 회관으로 보내 줘.”
단호히 고개를 저은 스노우가 일부러 다정한 척, 세라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오늘부터 같이 지내기로 했거든.”
“어머머!”
“네. 저희 오늘부터 같이 살아요.”
“어머머머!”
따라서 싱긋 눈웃음을 지어 준 세라가 동조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같이 다녔다고, 이제 제법 손발이 맞았다. 사이좋게 머리를 맞댄 두 사람은 영락없이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려!”
연달아 감탄사를 토해 낸 여인이 상기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잘 어울린다니. 이 거래를 받아들이고 처음 들어 보는 칭찬의 말이었다.
역시 돈의 힘은 위대하구나.
세라는 어디에든 이 놀라운 매출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주인의 눈빛을 읽었다. 다행히 스노우의 소비가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안겨 줄 모양이었다.
***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사다 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부티크 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펍에서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이 돌아온 건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에녹의 집 앞에 멈춰 선 스노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오라며 그녀를 배웅했다.
원래는 곧장 길드 회관으로 가서 잠이나 자려고 했지만,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을 하니 두고 온 물건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비제가 언젠가 도망갈 때 쓰라며 슬쩍 찔러 넣어 준 보석들이라든가…….
그렇게 대단한 재산은 아니었지만, 지난번의 그 3750골드 사건 이후로 에녹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뚫고 하강했기에 어떻게든 안전한 곳에 두고 싶었다.
탁, 탁, 탁. 경쾌하게 계단을 올라간 세라가 문고리를 돌려 당겼다.
“……엥?”
그러자 헐거운 느낌과 함께 문고리가 그대로 쑤욱, 뽑혀 나왔다.
이게 언제 고장이 났지?
황망한 눈으로 손에 들린 금속 덩어리를 바라보던 세라가 그것을 대충 옆으로 치워 두고 안쪽으로 빼꼼 고개를 밀어 넣었다.
“주인님……?”
안으로 한 발 내디딘 세라가 조심스럽게 안쪽의 동태를 살폈다.
평소라면 아직 애인들과 뒹굴고 있을 시간인데,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은 집 안에는 이렇다 할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날이 흐려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내부는 완전히 칠흑이었다.
집에 없나?
고개를 갸웃거린 세라가 밤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혹시나 있을 귀찮은 상황을 고려하여 발 뒤꿈치를 들고 걸음을 옮기는데, 응접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무언가가 툭, 하고 걸려들었다.
에녹이 또 뭘 어질러 놓았나 보다고 생각한 세라는 그것을 발끝으로 대충 밀어 놓고 다시 한 걸음 옮겼다.
그와 동시에 발밑에서 와그작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부서져 나갔다. 제법 큰 소리였는데도 집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로 반응이 없으면 에녹은 집에 없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안심하고 크게 한 발짝 옮기는데 이번에는 더 큰 게 발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불을 켜든가 해야지.”
겨우 중심을 잡은 세라가 계획을 변경하여 조명을 켜기로 마음을 바꿨다. 가까운 곳에 지난번, 밤 심부름을 나갔다 와서 놓아둔 이동식 조명이 있을 터였다.
기억에 의존해 조명을 찾아 방향을 틀었다. 그때마다 발끝에는 뭔가가 툭, 툭, 차였다.
“대체 뭘 어떻게 어질러 놓은 거야…….”
투덜대는 사이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더듬어 보니 세라가 찾는 물건이 맞았다. 얼른 조명을 끌어온 세라가 조임쇠를 풀어 불을 켰다.
서서히 조도를 높인 빛이 세라와 그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마침내 색을 되찾은 그녀의 바로 오른쪽에.
“…….”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거대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다는 듯이 세라의 곁에 나타난 유령이 서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늦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