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65화 (65/131)

#65

“……!”

살기를 느낀 세라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탁, 중간에 잡힌 팔이 그대로 끌려간다. 반항하려던 세라가 무언가를 잘못 밟고 중심을 잃었다. 질질 끌려가는 것만은 막으려 주저앉아 버티니, 예고도 없이 당기던 힘을 놓아 버린다.

“엇!”

등 뒤로 넘어가게 된 세라가 다급히 손을 휘적여 상대를 잡아챘다. 어디라도 잡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잡힌 몸이 순순히 끌려와 함께 뒤로 넘어가 버렸다.

땡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조명이 바닥을 굴렀다. 도르륵 구른 조명이 세라의 어깨 근처에 와서 멈췄다. 가까워지는 빛이 그녀를 위에서 찍어 누르고 있는 상대를 조형했다.

“…….”

혼란스러운 시선이 장막이 걷히듯 드러나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굳이 얼굴까지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붉은 머리가 가장 먼저 시야를 찔렀다.

에녹이다.

“아, 뭐야. 있었으면 기척을 좀 내던가. 놀랐잖아요!”

상대를 알아본 세라가 십년감수한 목소리로 버럭 짜증을 냈다. 긴장이 탁 풀린 그녀는 온몸에 빳빳하게 주고 있던 힘을 풀고 편안히 바닥에 몸을 뉘었다.

“넌?”

그런데 어째, 돌아오는 에녹의 반응이 영 싸늘했다.

지금쯤 신바람 나게 놀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새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는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얼굴로 세라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넌 뭘 했길래, 이제야 기어들어 와?”

기어들어 오다니. 자상하기도 하지.

하루 내내 우리 자기 어쩌고저쩌고하며 좋은 소리만 들었던 귀에 유독 거슬리는 말본새였다.

또 어디서 기분이 상해 가지고는 나에게 심술인가.

피곤한 제 현실을 마주한 세라가 상대하기 귀찮은 태도로 대충 대꾸해 주었다.

“할 일이 많으니까 이제 들어왔겠죠. 대체 집에서 뭔 짓을 했길래 이렇게 엉망이에요?”

자연스럽게 말길을 돌린 그녀는 뭔가가 잔뜩 굴러다니는 바닥을 눈짓했다. 대충 손에 걸리는 걸 잡아 조명에 비춰 보니, 부서진 서랍 손잡이였다.

에녹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침묵하다 어물쩍 중얼거렸다.

“……도둑 들었어.”

“뭐라고?!”

소스라치게 놀란 세라가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를 따라 반응하지 않은 에녹 탓에 두 사람의 몸이 순간적으로 맞닿았다. 세라의 부드러운 가슴이 에녹의 탄탄한 몸에 닿아 뭉개졌다.

“……!”

예상치 못했던 접촉에 에녹의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숨을 채 들이켜기도 전에 작은 손이 그를 뒤로 밀어 버렸다.

“좀 비켜요!”

있는 힘껏 에녹을 밀어낸 세라가 조명을 들고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자신이 머무르는 골방에 숨겨 둔 보석이 털리지는 않았을까. 그 걱정뿐이었다.

골방 문을 열어젖힌 세라가 곧장 방 조명을 켰다. 그대로 달려가 허겁지겁 베개 밑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손안에 착 감기는 가죽의 느낌에 냉큼 꺼내 주머니 안을 확인해 보니, 어느 것 하나 망가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아……. 다행이다.”

한시름 놓은 세라가 그것을 얼른 코트 주머니 안으로 찔러 넣었다. 다시 나가려고 몸을 일으키니, 뒤늦게 쫓아 올라온 에녹이 제 몸으로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다시 나오는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 또 나와? 잠이나 자.”

세라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곧장 대답했다.

“다시 나가 봐야 해요.”

“……?”

“당분간 스노우와 함께 길드 회관에서 지내기로 했거든요.”

“하-.”

역시나, 순순히 보내 줄 의사는 없는지 에녹이 기가 찬다는 반응을 보였다.

“누구 마음대로.”

어림도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뀐 그가 삐딱하게 문틀에 기대섰다.

“어차피 진짜 연인 사이도 아니면서. 별…….”

그러면서 애인 행세나 하라고 했지, 진짜 애인처럼 굴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빈정거렸다.

“그러니까요. 이렇게만 하면 누가 믿어요? 제대로 해야 믿지.”

“…….”

“원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거든요. 뭐, 알긴 아세요?”

그래서, 세라도 에녹을 따라 빈정거렸다.

본인이 스노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똑같이 읊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으로 다가간 세라가 그러니 이만 나와 달라는 뜻으로 에녹을 툭, 쳤다.

“그러니까 협조 좀 해요. 도와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주겠다면서요?”

“너…….”

당당한 세라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에녹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중요한 발언이라도 할 것처럼 말끝을 길게 끌다가.

“옷이 바뀌었네.”

고작 한다는 말이 옷에 관한 거였다.

“…….”

어마어마한 화제 전환에 세라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저기요. 여기서 그 얘기가 왜,”

푹, 한숨을 내쉰 세라가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냐며 한마디 하려던 그때였다.

“……!”

커다란 손이 갈퀴처럼 세라를 잡아챘다. 각각 허리와 어깨에 팔을 휘감은 에녹이 두 사람의 상체가 완전히 맞붙을 정도로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어깨를 감싸던 손을 올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우악스럽게 세라의 고개를 꺾은 그가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깊숙이 코를 묻었다.

그러고는 제 영역을 확인하는 개새끼처럼 정신없이 살결의 냄새를 확인했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지점부터 귀, 그리고 머리칼 안쪽까지 꼼꼼하게도 확인했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뜨거운 호흡이 목덜미에 낙인처럼 내려앉았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입술의 감촉에 어깨를 타고 간지러운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읏, 또 왜 지랄이야……!”

진저리를 친 세라가 뿌리치듯 그를 밀어냈다.

그사이 볼일이 끝난 걸까.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던 힘이 무색하게도 에녹은 쉽사리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목욕은 안 했네.”

혼잣말을 지껄인 에녹이 세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죽 훑어 올리며 물었다.

“걔랑 잤어?”

“뭐요?”

“잘 거야?”

“……미친 건가?”

에녹의 입에서 튀어나온 ‘잤어?’가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는 건 지나가는 개도 알 일이었다. 갈수록 가관인 질문에 세라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왜 또 시비지?

딱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에녹은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근데 뭐 하러 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 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돌아가나 했더니. 결국 세라의 분가를 허락지 않겠다는 뜻이었나 보다. 심지어 허락의 기준이 무려 섹스였다.

열심히 설명한 보람도 없이 안 할 거면 가질 말라니 대체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남이야 누구랑 자든 말든 본인이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세라가 너 말 잘했다는 투로 반문했다.

“잘 예정이면 가도 되는 거예요?”

“……뭐?”

“좋아. 까짓것 한번 뒹굴어 보죠. 뭐.”

호기롭게 주인의 뜻을 받아들인 노예가 이제 됐냐는 눈으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보내 주세요.”

“…….”

안 잘 거면 가지 말라고 하던 에녹은 막상 세라가 잘 테니까 보내 달라고 하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연둣빛 눈동자가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늠하려는 것처럼 뚫어져라 세라를 바라봤다.

“세라~. 챙길 게 많아?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그때, 저택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세라가 바로 나오지 않아 직접 데리러 온 스노우였다.

“아, 스노우! 금방 내려가요.”

티 나게 반가운 얼굴을 한 세라가 에녹의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에녹은 순식간에 화색을 띠는 그 얼굴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가 할 말이 없어졌음을 눈치챈 세라가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빈정거렸다.

“도와주시겠다면서요. 주인님. 뭐 대단한 도움은 못 줘도 방해는 하지 마셔야죠? 더 이상 절 막을 이유 없지 않아요? 아니, 애초에 왜 막아?”

“너-.”

“누가 보면 오해라도 하겠네.”

주인님이 저 좋아한다고.

마지막 말은 일부러 기분 더러워지라고 덧붙인 말이었다.

한껏 비아냥거린 세라가 어디 주둥이가 있으면 더 지껄여 보라는 식으로 싱긋 웃었다.

“아아-.”

그 순간, 혼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에녹의 두 눈에 날카로운 이채가 서렸다. 꽁꽁 숨겨 둔 의도를 알아낸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비식, 웃는다.

“이런 식으로 유도를 해 보시겠다?”

그 미소가 좀 재수 없지 않나. 생각하던 와중에 에녹이 뜻 모를 소리를 해댔다.

“……?”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렇지.”

혼자서 무언가를 납득한 에녹은 빠르게 여유를 되찾았다. 연신 ‘시도는 좋았다’느니,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느니 하며 피식거렸다.

“정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 좋은 시간 보내고.”

그러고는 기꺼이 세라의 화끈한 밤을 응원해 주었다.

옆으로 비켜선 에녹이 어디 갈 수 있으면 가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세라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빠져나왔다,

“스노우. 이제 가요!”

계단을 달려 내려간 세라가 곧장 스노우의 곁에 섰다.

그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스노우가 힐끗, 2층 난간에 선 에녹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협조 고마워. 대장. 우리 자기랑 좋은 시간 보낼게~.”

얄밉게 히죽, 웃었다.

아마도 에녹과 세라 사이에 오간 말이 저기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나와요.”

짓궂은 장난을 나무라듯 그의 어깨를 친 세라가 스노우를 이끌고 미련 없이 집을 떠났다.

쿵, 문이 닫힌다.

집을 나선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 희미한 소음마저 멎어 버리자, 다시 고요해진 집 안에는 에녹 혼자만 남았다.

“이런 얕은수도 다 부리고, 귀엽네.”

실소를 한 그가 느릿하게 움직여 주인을 잃은 초라한 방의 조명을 껐다. 뚝 끊어지듯 내려앉은 칠흑 속에서도, 그는 눈앞이 훤히 보이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문을 닫았다.

콰지직.

그와 동시에 에녹의 손에 붙잡힌 문고리가 험악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갔다.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약해빠져서는.”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댄 에녹이 무용지물이 된 문고리를 휙, 어깨 너머로 던져 버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금속 덩어리가 요란하게 바닥을 굴러 제 동지들 곁에 안착했다.

이제 응접실 바닥에는 또 하나의 희생양이 늘어 굴러다녔다.

“나가 봐야 저만 고생이지.”

작게 꿍얼댄 그가 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에녹은 스스로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되뇌었다.

기분이 썩,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돈 벌 생각에 주인을 내팽개치고 간 노예에 대한 괘씸함 때문이지 다른 무엇 때문도 아니라고.

간단히 제 상태를 정의한 에녹은 나중에 다시 돌아올 노예를 어떻게 괴롭혀 줄까 궁리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 에녹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차피 쟤는 날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니까.

그 강력한 전제가 끝끝내 풀리지 않던 마음속 응어리를 단숨에 녹아내리게 했다.

평화를 되찾은 에녹이 더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쿵, 그의 등 뒤로 닫힌 침실 문이 걸레짝처럼 너덜거렸다. 이미 떨어져 나간 지 오래인 문고리 부분에는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채다.

문짝이 망가졌어도 에녹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에녹은 끝까지 자신이 괜찮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는 꽤 오랫동안 그날 밤의 평정심을 유지해나갔다.

괘씸한 노예가 한번을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그 뒤로 무슨 수를 썼는지 한번을 마주친 적이 없었을 때도, 두 사람이 길드 회관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도, 스노우가 더는 다른 여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때도, 그리하여 두 사람이 제법 깊은 사이인 것 같다는 인정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괜찮았다.

어느 날, 우연히 외출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서, 우연히 시가지를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두 사람이 환락가에 있다는 걸 듣게 되었다.

뭐? 환락가를 가?

집 나가서 한다는 게 발랑 까진 일이라 기가 차던 와중에, 생각해보니 오늘은 거기서 놀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로 가는 거야. 나도 놀고 싶으니까.

그렇게 되뇐 에녹은 누군가에게 과시라도 하듯 양팔에 애인들을 끼운 채 환락가로 향했다.

그가 등장하자 밤놀이를 하러 나온 길드원들이 너도나도 스노우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 소식 들었느냐면서. 에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럼 나도 거기서 놀면 되겠다며 능청스럽게 두 사람이 있는 가게에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뭐, 기분이 괜찮았다.

어쩌면 내심 즐겁기까지 했다. 여유롭게 애인들과 놀고 있는 자신을 보고, 노예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으니까.

그래, 분명 그러했다.

“뭐야. 주인님도 여기 있었어요?”

“…….”

겨우 마주친 제 노예의 목덜미에 찍혀 있는 순흔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 적나라한 열락의 흔적에, 에녹이 더는 참지 못하고 와락,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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