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뭐라고요?”
난데없이 욕설을 들어 버린 세라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잘못 들었을 리 없는 분명한 발음이었지만, 주변이 워낙 시끄러웠기에 혹시나 해서 되물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그러나 에녹은 욕설에 대한 해명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난 애인들이랑 왔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그가 딱히 궁금하지 않은 정보를 들먹이고는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세라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네.”
“애인들이랑 왔다고.”
그러자 한 번 더, 자신이 애인들과 함께 왔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층 더 강렬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꼭 원하는 답이 있는 사람처럼.
세라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뭘까, 고민하는 대신 조금 더 길게 대답하는 것으로 성의를 다했다.
“네. 축하드려요.”
“…….”
역시나 정답이 아닌지 세라를 바라보는 에녹의 시선이 곧장 스산해졌다.
허,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은 에녹이 꽤나 한참 동안 세라를 노려보기만 했다. 할 말이 정말 그게 다냐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충분한 시간이 지났을 때, 커다란 몸이 스르륵 한쪽을 향해 기울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대변하듯 삐딱하게 기울어진 자세를 한 에녹이 마찬가지로 삐딱한 목소리를 하고 물었다.
“옷을 왜 그따위로 입었어?”
“……옷?”
뜬금없는 옷 지적에 세라가 의아한 눈으로 제 행색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세라가 입은 옷은 하얀색의 평범한 원피스였다. 비록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몸에 들러붙는 데다가, 기장도 짧은 편이고, 가슴과 등이 평소에 입던 옷에 비하면 조금 많이 파여 있지만, 일단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적어도 이 가게 안에서 세라가 가장 정숙한 옷을 입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이게 뭐 어때서요?”
스스로도 익숙지 않은 디자인이기는 했지만, 세라가 능청스럽게 당당한 낯을 꾸며 냈다.
“주인님보다 훨씬 낫구만.”
너나 잘하라는 시선이 에녹에게로 향했다.
짧게나마 제대로 갖춰 입은 세라와는 달리, 에녹은 셔츠를 거의 다 풀어 헤친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그쳤으면 그럴 만한 곳이다 감안할 수 있었으나,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셔츠는 온통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덕분에 분홍빛이 섞인 조명이 들이칠 때마다 젖은 천 너머의 살결이 그대로 비쳤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꿈틀대는 근육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잘 보여서, 차라리 옷을 벗고 있는 게 덜 야할 것 같았다.
“…….”
보고 있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어서, 호기롭게 쏘아붙인 세라조차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 무심코 돌린 시선 끝에 봉을 사이에 두고 야릇하게 몸을 비비는 남녀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땅으로 처박았다.
으음, 낮게 침음한 세라는 자신이 어쩌다 여기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나 한탄했다.
‘괜히 여기저기 발품 팔 필요 없이 여기 한 번 갔다 오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까지 화끈한 사이다. 남들에게 딱 보여 준 다음, 며칠 동안 길드 회관 밖으로 안 나오는 거죠.’
이쯤 되면 길드원들에게 밑밥은 잘 깔았으니, 알타이르가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는 계산에 의해서였다.
물론, 결정적인 동기는 극기 훈련처럼 꽉 차 있는 데이트 일정이 피곤해진 거였지만.
‘으음~. 나는 그런 곳 많이 가 봤으니까 괜찮은데.’
꽤나 파격적인 제안에 스노우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건전한 생활을 하느라 좀이 쑤시던 차에 세라가 먼저 그런 제안을 해 오니 내심 반가운 얼굴이었다.
‘괜찮……겠어?’
그럼에도 스노우는 그 제안을 덥석 받지 않고 한 번 더 잘 생각해 보라 일렀다.
‘어차피 가서 자리만 채우다 오는 건데요. 뭐. 못 할 게 있을까요?’
그때는 몰랐지.
여기가 이렇게까지 동물의 왕국인 줄…….
처음으로 발을 들여 본 환락가는 세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문란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이었다.
2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건물에는 테두리를 따라 테라스처럼 생긴 개인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앙 무대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커다란 물침대를 좌석 대신 가져다 놓은 가게의 공연이라야 뻔했다.
무대 위에서는 새카만 가죽 가면을 쓴 남녀 댄서들이 중요 부위만 가린 채 요염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혹시라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짠 것처럼, 하나같이 적나라하게 성행위를 암시하는 동작들이었다.
이곳을 찾은 길드원들은 심심찮게 마약과 술을 섞어 먹고, 거리낌 없이 이 사람, 저 사람과 붙어먹었다. 꼭 내일 죽을 것처럼 열심히, 짐승처럼…….
그런 문란한 짓은 에녹만 하는 줄 알았던 세라에게는 제법 커다란 문화 충격인 셈이었다.
여태껏 알아 왔던 시그너스 길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난잡한 밤 문화였다.
‘대체……. 왜 다들 이렇게까지 진심인 거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잖아.’
스노우는 기겁하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키득대며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을 때 즐겨야지~.’
결과적으로, 내일 죽을 것처럼 뒹군다는 그녀의 감상이 썩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주, 혼자서 재미가 좋으신가 봐.”
“……!”
세라의 상념을 깨운 건 에녹의 손길이었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세라의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에녹과 닿은 곳의 솜털이 쭈뼛 섰다.
어깨를 움츠린 세라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대체 무슨 재미를 본다고 저러나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제 목덜미에 남아 있을 흔적이 떠올라 황급히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가렸다.
그것이 남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이건…….”
시선을 내린 세라가 그 사연을 해명하려 입을 열었다가.
‘내가 왜 굳이?’
문득,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당장 그만두고 집으로 들어와.”
그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에녹이 딱 잘라 명령했다.
아주,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 못해 불을 지르는 발언이었다.
“싫은데요.”
미간을 찌푸린 세라가 단칼에 거절했다.
끌려가지 않으려 몸에 힘을 주고 버틴 그녀는 자신을 붙잡는 에녹의 손을 떨쳐 내려 애쓰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밑 작업 다 해 놨는데, 이제 와서 발을 왜 빼요? 아깝게.”
세라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에녹을 노려보았다.
귀찮고 힘든 일은 전부 끝났고, 알타이르가 스노우를 포기하도록 잘 넘기면 100골드가 들어오는데 누구 좋으라고 일을 그만두느냔 말이다.
“돈 때문이라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다른 이유? 다른 이유 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이렇게,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기가 막혀야 할 사람이 누군데, 에녹은 도리어 세라의 발언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발랑 까져 가지고.”
세라를 바짝 끌어당긴 에녹이 세라의 목덜미에 찍힌 순흔을 다시금 지적했다.
“자란다고 정말 잤나 봐?”
목덜미를 따라 미끄러진 손이 가슴골 사이로 들어가 옷자락을 아래로 쭉 늘렸다. 세라의 옷은 너무나도 쉽게 늘어나 그녀의 새하얀 가슴골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이딴 옷이나 입고 다니려고 내 집을 나갔어?”
한껏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마치 남자에 맛 들여 바람난 아내를 대하듯 비난 일색이었다. 단언하건대, 이 세상에서 저 말을 해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에녹이었다.
여기서 제일 까진 사람이 누군데.
“…….”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모양이지.
참으로 에녹다운 문란한 오해에, 세라가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태도로 제 앞섶을 끌어 내리는 손을 내쳤다.
잠깐 알은체만 하고 지나가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었다. 한숨을 내쉰 세라가 누가 보기 전에 에녹을 보내야겠다 생각하던 찰나였다.
“어? 저거 노예님이랑 대장 아니야?”
“그러게, 왜 둘이 저러고 있지? 싸우나?”
“……굳이 여기서? 스노우도 없이?”
“이러면 분위기 묘해지는데…….”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나가던 무리에게 두 사람의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내용이야 어찌 됐든 이런 곳에서 에녹의 품에 바짝 끌어안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는 뻔했다.
“혹시, 삼각……?”
아니나 다를까, 흥미롭게 사태를 관망하던 무리가 가장 곤란한 결론에 도달해 버렸다.
“어우,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이건……!”
진짜로 다 된 밥에 재를 빠트리게 된 세라가 얼른 에녹을 밀어내어 해명을 위해 목격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디 가.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하지만 그 시도는 눈치 없는 에녹이 세라의 팔을 낚아챔으로써 끝이 났다. 힘에서 진 세라가 빙글, 반 바퀴를 돌아 다시 에녹의 품에 안착하게 되었다.
“진짜로 뭐가 있긴 한가 봐!”
그에 충분히 재미있는 장면을 본 목격자들이 호들갑을 떨며 지나가 버렸다.
세라의 해명도 듣지 못하고, 의혹뿐이었던 오해를 진실이라 확신하면서.
“……이렇게 간다고?”
그 순간, 여태까지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세라를 덮쳐 왔다.
그와 함께 제게 그것을 안겨 준 자에 대한 분노도.
에녹의 개 같은 시비와 비아냥거림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성질머리에 기어코 불이 붙었다. 아담하고 반듯한 이마 위로 불룩, 핏줄이 솟았다.
“씨발, 너 때문에 괜히 이상한 오해받았잖아!”
제대로 빡친 세라의 주먹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에녹을 밀쳤다. 눈앞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의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존댓말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거칠게 밀려난 에녹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너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그래! 욕했다!”
세라는 당당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얌전히 있어 놓고, 이제 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초를 치는 에녹의 행태에 진심으로 분노가 일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그냥 좀 대충 아는 척 인사하고 지나갈 순 없어?!”
눈이 완전히 돌아 버린 그녀가 사람들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목청껏 소리쳤다.
“괜히 저 사람들이 이상한 소문 퍼뜨려서 스노우가 알게 되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커다랗게 뜨여진 자수정 빛 눈동자에는 흡사 적군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적개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에녹이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노우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당연히 스노우가 중요하지!”
세라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단언했다.
오로지 100골드 생각뿐인 그녀는 자신의 발언을 들은 에녹이 얼마나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협조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협조해! 못 하겠으면 주변에 얼쩡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알았어?!
제대로 으름장을 놓은 세라가 대답도 듣지 않고 휙 몸을 돌려 가 버렸다.
“…….”
미련 없이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에녹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았다.
‘당연히 스노우가 중요하지!’
그때까지도 망설임 없이 쏘아져 나온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적대감이 가득 담긴 눈초리가 뇌리에 박힌 듯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와 함께 선이 예쁜 목덜미에 찍혀 있던 새빨간 순흔까지도.
‘네. 축하드려요.’
그런 몸을 하고서는 애인과 함께 왔다는 그의 말에도 담담하게 축하를 입에 담았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지? 왜 이번엔 질투를 안 해? 이 또한 앙큼한 노예의 연기일 뿐인가? 100골드에 저렇게까지 진심이던가? 그것도 아니면.
……이젠, 날 안 좋아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의문이 덜컥, 마지막 문장에 걸려 멈췄다. 그저, 하나의 가설일 뿐이었는데도 그 문장이 뇌리에 탁 들어와 박히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에녹의 모든 이성과 직감이 그게 정답이라 외치고 있었다.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노예가 더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현저하게 가라앉았다.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는 심장이 술렁거리고,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고 싶은 조바심이 무릎을 간지럽혔다.
이제 노예는 그를 포기했으니, 더는 눈앞에서 알짱대며 유혹해 대지도 않을 것이고, 애인과 함께 있어도 질투하지 않을 것이고, 그를 죽이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자, 귀찮은 걸 떨쳐 내서 시원하다는 감정보다는 잃은 걸 되찾아와야 한다는 충동이 먼저였다. 찾아와서 어디에 쓸지 정하지도 않아 놓고선.
숨을 들이켠 에녹이 고개를 꺾어 천장을 올려다본다.
노예의 이탈을 인정하자마자 근원 모를 위기감이 그를 닥쳐왔다. 마치 기척도 살기도 없는 암살자의 그림자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위로 꺾여 있던 고개가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방금 전까지 희번덕거리던 안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 타 버린 잿더미 같은 눈을 하고서, 에녹이 쾅! 벽에 주먹을 갈겼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에녹이 속삭였다.
넌 날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좋아했잖아.
울컥, 원망하는 마음이 쏟아져 나온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괜찮았는데.
지금은 몹시, 기분이.
더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