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그렇게 헤어졌으니, 두 사람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세라와 에녹 중에 좀 더 기분이 저조한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역시나 에녹이었다.
“에녹. 기분이 안 좋아?”
“어.”
“왜 안 좋은데?”
“글쎄.”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의 애인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의욕 없이 건성으로 대꾸만 해 줄 뿐이었다.
“무릎베개해 줄까?”
“아니.”
“그럼 머리 쓰다듬어 줄까?”
“아니.”
원래라면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을 물침대 위에 미역처럼 축 늘어진 그는 내내 저기압이었다.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애인들이 무릎베개를 해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겠다고 하면 금방 헤실거렸는데, 오늘만은 예외였다.
“오늘은 영…… 의욕이 안 나.”
목소리도 축축 처지는 게, 꼭 우울증이 도졌을 때와 상태가 비슷했다.
우연히 에녹과 마주친 덕에 데이트를 하게 된 애인들은, 자꾸만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 같은 에녹을 두고 애가 타는 눈치였다.
“그럼 좋아지면 되지.”
옹기종기 모여든 낯선 얼굴들을 헤집고,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이 중에서 그나마 에녹의 애인이 된 지 오래된 에밀리였다.
“기분이 안 좋으면 술이라도 마셔 봐. 응?”
아까는 옷에 다 쏟아서 먹지도 못했잖아.
살갑게 속살거린 애인이 에녹의 코앞에 달콤한 내음이 나는 술잔을 들이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에녹이 부드럽게 술잔을 물리며 말했다.
“그만 가. 오늘은 그럴 기분 아니야.”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애인들이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여인들이 무언가를 제지하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에밀리는 그 신호를 무시하고 다시 살갑게 술을 권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딱 한 잔만. 응?”
“…….”
부득불 마셔야만 끝날 것 같은 분위기에, 에녹이 귀찮다는 듯이 벌떡 몸을 일으켜, 술잔을 쭉 들이켰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도수 높은 술이 고여 든 배 속이 뜨거워지면서,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육체에 잘 붙어 있던 정신이 한순간에 붕 떠올라 저 멀리 날아갔다.
꽉 조여져 있던 신경이 단숨에 느슨히 풀어졌다. 동공이 벌어지고, 척추 사이사이 오싹한 쾌감이 들러붙었다.
하아-.
반사적으로 신음을 쏟은 에녹의 손에서 뎅그랑, 잔이 미끄러져 굴렀다.
고작 한 잔 마셨다고, 그가 이토록 지독하게 취할 리가 없었다. 에녹에게 권한 술잔에, 약이라도 타지 않고서는 결코.
나른한 미소를 지은 영웅의 몸이 스르륵 쓰러진다.
감각이 멀어진 몸 위로 기다렸다는 듯이 가녀린 무게감이 올라앉는다.
아-. 주변에서 부러움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에녹은 제 허리 위로 올라탄 여인의 뺨을 사랑스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에밀리.”
“응, 에녹.”
그의 손에 뺨을 비비던 에밀리가 수줍게 웃었다.
에녹의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지나 목으로 미끄러졌다.
“넌 정말 목이 가늘구나.”
“으응.”
감탄 섞인 말과 함께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가녀린 목을 에로틱하게 쓰다듬는다. 그 손길을 느끼듯 에밀리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샜다.
그녀가 눈짓하자,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다른 애인들이 쭈뼛쭈뼛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렇게, 파장이 날 뻔한 분위기가 언뜻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였다.
“한 손으로 부러뜨리기 편하게.”
에녹의 입에서, 살벌한 농담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
힉, 헛숨을 들이켠 에밀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치대던 몸을 반쯤 물린 그녀가 한껏 당황한 눈으로 에녹을 바라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에녹이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언제까지 모른 척해 줘야 돼?”
분명 다정한 말투였는데, 그 한마디에 주변 기온이 뚝뚝 떨어졌다.
“난 분명, 충분한 기회를 준 것 같은데.”
완전히 풀어진 눈 아래로, 진실을 꿰뚫어 보는 명징함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 어어…….”
에밀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기실 그녀가 에녹에게 약을 쓴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황홀한 밤을 보내 왔기에, 에밀리는 그가 이 술기운과 약 기운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강한 약을 쓰고……. 강한 약을 쓰고…….
“그, 그럼 그동안 다, 알고…….”
제 수작이 들켰음을 깨달은 에밀리가 후다닥 침대로 내려앉으며 황급히 더듬거렸다.
“매, 매번, 그냥 지나가길래. 난 부, 부작용도 없고, 에녹도, 좋아, 하는 줄 알고…….”
“…….”
에녹은 그 간절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에밀리는 살아 있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보통 정말로 좋아하면 이런 반응이겠지.
어떻게든 좋게 보이려고, 자그마한 오해나 미움도 받기 싫어서 전전긍긍. 뭐,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뒤로는 당사자 몰래 약을 탄 술잔을 건네는 사랑이 정말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노예는 그러지 않았지.
이렇게 두고 보니, 아까 전 제 노예는 자신의 목덜미에 찍힌 순흔에 대해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에녹이 오해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생각하니까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에녹의 표정이 갈수록 차갑게 식는다.
“에녹은 매일 우울해, 하니까. 도, 도와주려고, 정말 나는 널 도와, 주려고……!”
“그만.”
에녹은 점점 횡설수설하는 에밀리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 냈다.
“보내 줄 때, 가.”
애정이라곤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은 연둣빛 눈동자가 그녀를 건조하게 노려보았다.
흐윽, 울음을 삼킨 에밀리가 얼른 일어나 도망쳤다.
그녀만 믿고 있던 다른 애인들이 낭패라는 얼굴로 뒤따라 도망쳤다.
“축하해. 또 한 무리의 애인이 대장을 떠나갔네.”
에녹의 애인들이 뛰쳐나간 커튼 너머에서, 누군가가 짝짝, 신명 나게 박수를 쳐 댔다.
“애인이 많으면 뭘 해. 오래 못 가서 전부 대장을 차 버리는데. 그치?”
에녹의 개인 공간으로 들어선 여인이 질린다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제 가게 벽에 구멍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고, 곧장 에녹에게 따지러 온 가게 주인이었다.
“내가 찬 거거든.”
귀찮은 듯 중얼댄 에녹이 제 팔로 눈을 가렸다. 대체 얼마나 강한 약을 썼는지 눈앞이 빙빙 돌았다.
“어떻게, 다른 손님들이라도 불러 줄까? 아직 여자 취향 안 변했지?”
영 맛이 가 버린 상태에, 주인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살결이 하얗거나, 손이 예쁘거나, 가슴이 크거나, 체구가 작거나, 곱슬머리 거나…….”
다섯 손가락을 쫙 핀 여인은 오래도록 변치 않은 에녹의 취향을 막힘없이 술술 읊었다.
굳이 이런 것들을 일일이 읊는 이유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하나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다섯 손가락을 다 꼽아 원하는 순간을 맞이한 주인이 지긋지긋하다는 어조로 마지막 하나를 덧붙였다.
“등에 점 있는 여자.”
등에 점 있는 여자? 웃기지도 않아서.
제가 말하고도 웃긴지 주인이 하! 기가 찬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티 나게 한 사람만 그리워하는데, 신기하게 애인하겠다는 사람은 계속 밀려든다?”
정확히 아픈 곳만 건드리는 신랄한 비판에 에녹이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다 알면서 애인하는 거야. 쟤네도.”
“그래. 다 알면서도 달려드는 거지. 나는 다르겠지. 이번엔 다르겠지, 하면서.”
주인은 그마저도 예상한 듯 막힘없이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 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에녹이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워 제 발치에 선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약 기운에 취해서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우울을 마주하며, 주인이 쯧쯧 혀를 찼다.
“밑 빠진 통에 물만 계속 부어 봐야 뭐 하겠어.”
결국 빈 통인 건 똑같은데.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듯 비웃어 준 주인이 에녹을 향해 무언가를 던져 주었다.
젖어서 엉망이 되어 버린 셔츠를 대신할 만한 옷이었다.
“어차피 만족도 못 하면서, 대체품은 왜 그렇게 긁어모아?”
“…….”
“애먼 사람들 희망 고문 그만하고, 그 약해빠진 밑동이나 고쳐.”
이어지는 잔소리에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에녹이 느릿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투덜거렸다.
“……왜 또 시비야.”
“내 가게 벽에 구멍 뚫어 놓은 게 괘씸해서 그런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봐 준 주인이, 그제야 에녹을 찾아온 목적을 입에 담았다.
“수리비 같은 거 없지? 앞으로 대장은 영원히 우리 가게 출입 금지야.”
쌀쌀맞은 축객령을 내린 여인이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돌아 나갔다.
늘씬하게 빠진 뒷모습이 서서히 멀어진다. 환락가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가게를 운영하는 여주인은 등이 푹 파인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주인의 등에는 점이 찍혀 있었다.
“…….”
옷을 전부 갈아입은 에녹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다리로 서자 약 기운이 핑 돌아 하마터면 다시 쓰러질 뻔했다.
독한 걸로도 먹였네.
픽, 입꼬리를 당겨 웃은 에녹이 걸음을 옮겼다.
휘청대는 정신과는 달리 어둠 속을 걸어 나가는 발걸음만큼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우아했다.
에녹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거리를 벗어났다.
제게 약을 먹인 애인들에게도, 밑 빠진 통 같다고 비난한 여자의 말에도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양 걷고, 또 걸었다.
전부 아무래도 좋은 일들뿐이었다.
열기가 한창 피어오르는 밤거리를 거니는데,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노예의 관심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
에녹은 이 와중에도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구제 불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라는 소리를 들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는 걸 보면 말이다.
밑 빠진 통? 깨진 밑동을 고쳐?
전부 개소리에 궤변이었다.
고칠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이미 오래전에 그의 손으로 부쉈으니까.
……비슷한 것들로 틀어막는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그것 말고는.
***
“아까 대장이랑 마주쳤다며?”
길드 회관으로 돌아왔을 때, 스노우가 지나가는 어투로 그렇게 물었다. 안 그래도 어느 타이밍에 그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세라가 마침 잘되었다는 얼굴로 와다다 준비했던 말들을 쏟아부었다.
간만에 마주쳤기에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가려고 했는데, 에녹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니 붙들고 늘어져서 실랑이를 좀 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쓸데없는 오해를 한 것 같다. 어쩌고저쩌고…….
숨 한번 쉬지 않고 튀어나오는 변명에 스노우가 진정하라며 처음부터 차근차근 물어봤다.
“대장이 왜 시비를 걸었는데?”
“아, 그게…….”
멋쩍게 얼굴을 긁적인 세라가 입고 있던 외투를 끌어 내리며 대답했다.
“목에 있는 자국 때문인 것 같긴 했는데.”
“오~.”
새하얀 목덜미에 선명히 찍힌 흔적을 바라보며, 스노우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여태 같이 다녀 놓고서는, 이제야 세라의 목에 그런 게 있는 줄 눈치챈 반응이었다.
“자국, 잘 남았네.”
“그렇죠?”
엄지를 척 들어 올리는 스노우를 향해, 세라가 반색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주머니를 뒤적거린 그녀가 자그마한 물건을 자랑스럽게 꺼내 들었다.
“이거 성능이 되게 괜찮은 것 같아요.”
팽이처럼 생긴 그 물건은 가운데가 뻥 뚫려 있어 피부에 압착해서 밀면 키스 마크처럼 멍이 들게 만들어 주는 성인 용품이었다.
대체 왜 이딴 걸 파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수요가 있는 입장에서는 존재 자체가 고마운 물건이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어제 손에 넣은 따끈따끈한 신상이었다.
세라의 손에서 물건을 넘겨받은 스노우가 그것을 앞뒤로 돌려 보며 흥미롭게 관찰했다.
“언제 썼어?”
“아까 가게에 들어가고 얼마 안 지나서요.”
“오오~.”
타이밍까지 완벽하게 계산한 철두철미함에 스노우가 이번에는 쌍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스노우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치기로 한 이후 세라는 스노우 본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대장도 속을 정도면 누구라도 속겠는데~?”
물건을 돌려준 스노우가 실제랑 똑같아 보이는 순흔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저걸 보고 부글부글 끓었을 대장을 떠올리니 절로 광대가 상승했다.
“그럼, 오늘부터 사흘은 쉬는 거 맞죠?”
물건을 잘 챙겨 둔 세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스노우를 바라봤다. 오늘 환락가 데이트를 끝으로, 두 사람은 알타이르 길드가 도착하는 날까지 길드 회관에서 칩거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환락가에 다녀오더니 더 뜨겁게 불타올라 사랑을 나누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마음껏 쉬기 위해서였다.
“그래. 나오는 날에 그거 사용하는 거 잊지 말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준 스노우가 세라의 손에 들린 물건을 가리키며 당부했다. 깔끔한 휴가 승인이었다. 아싸! 기분이 좋아진 세라가 벙긋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응. 쉬어~.”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 준 두 사람이 미련 없이 갈라져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상주하는 사람이 없는 길드 회관은 사실상 스노우의 집이나 다름이 없어서, 이렇게 따로 방을 써도 들킬 일이 없었다.
세라가 사용하는 방은 스노우의 바로 옆방이었다.
들킬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행여나 들킬 때를 대비하여 가장 가까운 방에서 머물기로 했다. 핑계는 스노우가 키우는 고양이가 예민해서 손님이 오면 괴로워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3일은 쉰다!
방에 들어온 세라는 조명도 켜지 않은 채 룰루랄라 외투를 벗어 던졌다.
갈아입을 옷을 찾기 위해 옷장을 향해 다가가는데, 등 뒤에서 바람이 불었다.
“……?”
내가 창문을 열어 뒀던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때마침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커튼이 흩날렸다.
화려한 거리의 불빛이 스며든 창가에, 커다란 그림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빛의 테두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세라가,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발견하고는 무심코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에녹……?”
그에 반응하듯, 커다란 몸이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에녹이 당연하게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방 안이 어둡고, 역광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세라는 에녹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뚜렷하게 느꼈다.
수풀에 숨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섬뜩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남들이었으면, 몸을 사렸을 테지만. 세라는 그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뾰로통하게 표정을 굳힌 그녀가 함부로 다가섰다.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왔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은 그녀의 무지에 의해서 발생한 사건인 셈이다.
타인에게 무심한 세라는 그가 자신을 두고 어떤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고, 자신이 이 계약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몰랐고, 지난 며칠 동안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집에서 내심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으며, 방금 전 환락가에서 제 목에 찍힌 순흔을 보고 어떤 상상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그를 혼란스럽게 뒤흔들었는지.
그게 얼마나 그를 미치게 만들었는지.
“왜 이렇게 조용해? 찾아왔으면 말을-.”
아무것도 몰랐다.
“……!”
참을 수 없다는 듯 덮쳐 온 에녹이, 제 입술을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