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단번에 깊어지는 입맞춤은 에녹답지 않게 조급하고 서툴렀다.
반면 세라를 감싼 두 손은 느릿하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하나는 등을 역으로 쓸어 올려 목덜미를 쥐고, 다른 하나는 얇은 치마 아래로 파고들어 허벅지 안쪽을 살살 쓸어내렸다.
성적인 기호가 명확한 손길에 세라의 척추를 타고 찌릿한 전율이 일었다.
“……!”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세라가 반사적으로 에녹을 밀쳐 냈다. 저돌적인 입맞춤과는 별개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은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입술이 민망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간다. 그사이 얼마나 질척하게 빨아댔는지 세라와 에녹 사이에 투명한 실이 길게 늘어졌다. 두어 걸음 더 멀어진 세라가 얼른 입술을 닦아 냈다.
그녀는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입술부터 들이미는 에녹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뭐야, 갑자기 왜-.”
“네 말이 맞아.”
아무리 봐도 세라가 따져야 할 타이밍이었던 것 같은데, 에녹은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빼앗아 가 버렸다. 멀어진 거리만큼 가까워진 그가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속삭였다.
“이제 와서 딴말하면 안 되지.”
“……?”
“내가 뭘 도와줄까.”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더니 환락가에서 하던 말의 연장선이었다. 또 그 이야기냐. 되풀이되는 대화에 세라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셔츠는 멀쩡하게 갈아입었다는 것과 술 냄새가 더 진동한다는 점이었다.
“말해. 뭘 도와줘야 하냐고.”
취했네. 취했어.
미간을 찌푸린 세라가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필요 없으니까 집에 가서 잠이나 자요.”
주정뱅이 취급하며 집에나 가라고 했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싫어.”
“싫긴 뭐가 싫어. 당장 안 나가?”
“없어졌네?”
이어지는가 싶던 대화는 별안간 맥락이 뚝 끊겼다.
재차 거리를 좁힌 에녹이 세라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세라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흔적이 찍혀 있던 자리였다.
환락가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뚜렷하던 순흔은 방금 전의 입맞춤으로 거의 연해지고, 에녹이 몇 번 더 문지르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깝게.”
본인이 지워 버린 주제에 에녹은 흔적이 사라져 아깝다는 감상을 읊조렸다. 그러면서도 말끔해진 세라의 목덜미를 훑어 내리는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
그 나사 하나는 빠진 것 같은 웃음에 기이함을 감지한 세라가 찬찬히 에녹을 살폈다.
그러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묘하게 헐떡이는 숨이라든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 완전히 풀어져 어딜 보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 같은 것.
단순히 술에 취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느슨해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에녹?”
그에 세라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상에 올라온 이후, 제정신으로는 결코 하지 않았던 실수였다.
에녹은 세라가 제 실수를 인지하기도 전에 대답했다.
“응.”
득달같이 주인님이라고 부르랄 땐 언제고,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제 이름이 듣기 좋은 것처럼. ‘응.’하고.
너무나도 순순한 대답에 세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에녹에게서 진동하는 게 비단 술 냄새뿐만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딘가 달짝지근하고 끈적한 향기가 그의 숨 사이사이 함께 배어 나왔다.
낯이 익다 했더니, 방금 전까지 가게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했다. 공기 중에 떠돌던, 메케하면서도 달짝지근해서 사람의 마음을 요상하게 만들던 그 향기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세라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약, 했어요?”
“응.”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에녹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들이 먹였어.”
약 때문일까. 에녹의 말투가 한층 친근해졌다.
묻지도 않은 말을 일러바치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
술에 취한 줄 알았더니 약에 취한 거였네.
독은 안 통하는 주제에 약은 통하는 모양이지.
세라는 가지가지 한다는 얼굴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같이 약을 ‘먹었다’가 아니라 굳이 ‘먹였다’라고 표현한 것도 깊이 재고하지 않고 흘려 넘겼다.
삐딱하게 자세를 잡은 세라가 문란의 끝을 달리는 주인님을 한껏 비웃으며 빈정거렸다.
“그럼 애인들이랑 광란의 밤이나 보내지. 왜 여기까지 쫓아왔어요?”
언제나처럼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대화의 방향이 바뀐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도망쳐 온 건데.”
난 안 먹고 싶었거든.
답지 않게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댄 에녹이 낮게 킬킬거렸다.
“……뭐라고?”
그와 반대로 비스듬한 미소나마 머금고 있던 세라의 입가가 스르륵 내려앉았다.
그제야 제게 했던 말이, 약 때문에 헛나온 게 아니라 제대로 고른 표현이었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먹었다고?”
“응.”
“당신은 먹기 싫었는데?”
“응.”
단번에 믿기에는 다소 어려운 말이라, 재차 캐물어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묻는 대로 재깍재깍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커다란 몸이 조금씩 휘청거리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건, 에녹은 제 몸이 흔들리고 있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창문을 타고 넘어올 때까지만 해도 겉모습만큼은 멀쩡했는데 지금은 툭 치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위태로워 보였다.
“…….”
그건 에녹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연약함이었다. 세라의 미간에 슬며시 금이 갔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의 약한 부분을 목격하는 건 결코 그녀가 선호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걸 보게 되면 필요할 때 원하는 만큼 매정해질 수 없으니까. 세라는 언젠가 제 발목을 잡게 될 후환을 결코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그녀가 부러 쌀쌀맞게 대꾸했다.
“먹기 싫다고 했으면 됐잖아.”
“계속 먹으라길래.”
“……그런다고 순순히 받아먹었어?”
“응.”
그런데도 여전히 순순한 그 태도가 거슬렸다. 싫은데도 거절하지 못하고 약을 냉큼 받아먹었다는 대답은 더더욱 거슬렸다.
“왜?”
“그래야 끝이 나거든.”
어쩔 수 없었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양새가 꼭 비 맞은 개새끼 같았다. 그것마저 거슬렸다. 그냥 전부 다 꼴 보기 싫었다.
궁상맞게 웅크린 커다란 어깨도, 약 때문에 붉어진 눈가도, 약해빠진 에녹 소서도, 그에게 억지로 약을 먹인 이름 모를 애인들도.
그냥 전부 구질구질하고 처량 맞아서 짜증이 났다.
세라는 겨우 이딴 걸로 제 발목을 잡으려는 에녹에게 화가 났다.
“주인님 혹시 호구 새끼세요?”
그 삐딱한 마음은 금세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에녹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세라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 기운을 영 이겨 내기 어려운지 욕을 들어 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비식비식 웃는다. 에녹이 환히 미소 지을수록, 세라의 얼굴은 점점 싸늘하게 식었다.
“남들 말은 절대 안 듣고 하기 싫은 건 곧 죽어도 안 하면서. 그 지랄맞은 성격 다 어디다 갖다 버리고 먹으란다고 그걸 순순히 받아 처먹어?”
동정심이나 안쓰러워하는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깃들어 있지 않은 차가운 말들이 비수처럼 내리꽂힌다.
신랄하게 비아냥거린 그녀가 시비라도 걸듯이 손끝으로 툭, 툭, 그를 밀어냈다. 커다란 몸이 작은 손짓 한 번에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난다. 그때까지도 에녹은 두 눈을 예쁘게 끔뻑이며 웃고만 있었다.
“남들이 영웅이랍시고 떠받들어 주면 뭐 해. 정작 지 몸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병신인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던 옛말과는 달리, 세라는 그 어려운 일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해냈다. 이렇게 욕을 쏟아 내고 나면 속이 시원해야 했는데, 시원하기는커녕 기분만 더 더러웠다.
기분이 왜 더럽지?
이유는 명확했다. 저 원수 같은 놈이 이상한 데서 뺨 맞은 주제에 제 앞에 와서 청승을 떨고 있으니까!
하지만 당장의 나약함에 흔들려서는 안 됐다.
나는 저놈이 불쌍하지 않다. 오히려 여자에 미쳐 살더니 꼬숩고 잘되었다. 언젠가 이렇게 뒤통수 맞을 일이 있을 줄 알았다.
스스로를 세뇌한 세라가 멈추지 않고 매정한 말을 쏟아 냈다.
“제대로 거절도 못 하고 먹기 싫은 거 먹었으면 얌전히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 상관도 없는 사람 쫓아와서 징징대지-.”
그때, 비척비척 다가온 에녹이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세라의 입술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화내지 마…….”
에녹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이마를 비벼댄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세라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
어린아이나 할 법한 수작질에 세라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이없게도 그 하찮은 어리광 한 번에 드글드글 끓어오르던 분노가 처음으로 주춤했다.
한풀 꺾인 기세를 눈치챈 것처럼 에녹이 이가 드러나도록 환히 웃었다.
“나 좀 여기 숨겨 줘.”
애교스럽게 속삭인 그가 부러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장난스럽게 살갗을 스친다. 에녹은 약에 절더니 뇌가 퇴화해 버린 것인지 정말로 어린애처럼 귀엽게 놀고 있었다.
그 하찮은 모습에 주춤하던 분노가 다시 타오르지 못하고 푸슈슈 식어 버렸다. 머릿속을 지배하던 가장 강력한 감정 하나가 휘발되고 나자, 남는 것은 ‘내가 왜 이러고 있지?’와 같은 자괴감이 전부였다.
“……뭐가 예쁘다고.”
그런데도 끝끝내 자괴감이나 안겨 주는 멍청한 약쟁이를 밀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응? 숨겨 줘.”
재차 숨겨 달라고 칭얼대는 목소리가 제법 간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망했어.
깊은 한숨을 내쉰 세라는 에녹이 불쌍해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지 내가.
이를 부득부득 간 세라가 짜증스럽게 어깨를 퉁겨 에녹을 떼어 냈다.
“……저-기, 구석에서 자든가요.”
그리고 제 몫인 넓은 침대, 그 옆에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틈을 가리키곤 휙 돌아섰다.
“노예야.”
에녹이 돌아서는 세라를 불러 세웠다. 즉각 몸을 돌린 그녀가 토 달지 말라는 식으로 혹시라도 튀어나올 불만을 원천 봉쇄했다.
“불만이면 그대로 나가든가.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너 진짜 스노우랑 했어?”
“-고맙다고 해야지.”
두 사람의 말이 중간에 겹치는 바람에, 세라는 처음엔 에녹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요?”
시간 차를 두고 알아들은 세라가 의문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주제가 그쪽으로 튄다고? 방심하고 있던 그녀는 대체 그게 이 상황에서 왜 중요한지 조금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딴 거 궁금해할 시간에 네 몸이나 잘 간수하세요.”
“안 했지?”
“야.”
“안 했지?”
“신경 끄라고.”
“안 했지?”
하지만 완전히 하나에 꽂혀 버린 에녹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앵무새처럼 안 했지? 안 했지? 거리며 깐족거렸다.
“내가 그걸 너한테 왜 알려 줘야-.”
“안 했지?”
“-하냐고 네가 뭐 보태 준 거-.”
“안 했지?”
“-있어?”
“안 했,”
“아, 좀 닥쳐!”
차분하게 대화로 해결해 보려던 세라도 그 패턴이 열 번을 넘어가려고 하자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퍽! 감정을 실어 후려갈긴 주먹이 에녹의 배에 제대로 명중했다.
“……!”
흡, 숨을 들이켠 에녹이 그대로 중심을 잃고 세라를 덮쳤다.
“어어어……!”
육중한 무게를 버티지 못한 세라가 그대로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당탕탕! 중간에 괜히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바람에 한층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오, 씨, 아파라……. 야! 똑바로 안 일어나?!”
겨우 일어나 앉은 세라가 제 무릎 위로 엎어진 커다란 등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
하지만 이 원수 같은 놈이 기절이라도 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낑낑대며 밀어내 겨우겨우 숨통을 틀어막는 몸을 뒤집는 데 성공하던 찰나였다.
“세라. 무슨 일이야~?”
똑또독똑-.
경쾌한 노크와 함께 문밖에서 스노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마 방에서 쉬던 와중에 요란한 소리를 듣고 나와 본 모양이었다.
“아, 스노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세라가 반색했다.
안 그래도 이 무거운 놈을 저 혼자 어떻게 처리하나 걱정이었는데, 이참에 스노우의 도움을 받아 바깥으로 내쫓아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지금 여기에-.”
그래서, 스노우에게 에녹의 존재를 알리려던 그 순간.
“으음…….”
낮게 신음한 에녹이 세라의 손을 잡아 왔다.
말하지 말라는 듯이. 꾸욱 힘을 주어서.
“…….”
그 힘에 이끌린 세라가 제 손에 매달리는 혼몽한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녀가 말이 없자, 문밖의 스노우가 재차 똑똑 문을 두드렸다. 에녹은 그 말에 반응하듯 한 번 더 세라의 손을 힘주어 꾸욱 잡아 왔다.
그때까지도 에녹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세라가 마침내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요.”
처음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온 건 어디까지나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왠지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면 됐어. 우리 고양이가 좀 민감해서, 소음은 좀 주의해 줘~.”
“예에.”
싱거운 대답에 스노우가 고양이를 배려해 달라는 잔소리를 남긴 채 돌아갔다.
그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세라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착잡한 눈으로 에녹에게 붙잡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진 커다란 손은 세라의 약지와 소지만을 소심하게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따위로 잡고 지랄이야.”
짜증스럽게 투덜댄 세라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기에 찬 시선이 다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에녹의 손을 바라보았다.
제 손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자란 커다란 손 위로, 그것의 절반도 안 되던 작은 손이 겹쳐 보였다.
설원에서 헤매던 맨발의 황자는 그 후에도 종종 세라를 찾아오곤 했다. 대부분 조용히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 가 버렸지만, 어느 날은 말이라도 걸고 싶은 것처럼 그녀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며 성가시게 굴었더랬다.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 따위 조금도 달갑지 않았던 세라는 그 애가 말을 걸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얼른 따라 일어선 아이가 세라의 손을 붙잡아 왔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둘이서 뭐 얼마나 친하다고, 아이는 제발 가지 말라며 매달려 왔다. 지난겨울에 보았던 말라비틀어진 얼굴보다는 조금 더 생기가 깃든 눈을 하고서.
‘오늘, 제 생일이란 말이에요.’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덧붙이는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세라가 자신을 붙잡은 아이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를 붙잡은 작은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토록 간절한 주제에 차마 다 잡지도 못하고 약지와 소지만을 찔끔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세라가 원하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게.
짜증 날 정도로 구질구질한 모습에 세라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너 진짜 성가시다.’
귀찮은 기색을 결코 숨기지 않으면서도, 세라는 끝끝내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이가 이만하면 됐다며 제 손을 놓아줄 때까지.
꽤, 오랫동안.
“……아오, 진짜.”
곧장 되살아나는 먼 옛날의 기억 앞에 세라가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깊이 후회했다.
들러붙는다고 봐주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그때의 일이 생각나 버리는 바람에 도저히 매정하게 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나이를 먹고도 어릴 적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있나. 머리를 쥐어뜯은 세라가 원통하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 웬수 같은 새끼.”
원망을 담은 눈빛이 이제는 징그럽게 커 버린 소년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에녹은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은 해초처럼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달아오르다 못해 붉게 피어난 열꽃들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대단하신 성검의 가호는 약물에는 별 효력이 없는지, 이대로 두다간 송장 하나 치우게 생긴 몰골이었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맘 편하게 의사를 부를 텐데.
안타깝게도 세라의 눈에는 에녹의 문제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너무나도 잘 보였다.
“…….”
에녹의 몸을 타고 내려간 시선이 아까부터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고간에 가 닿았다. 무서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 앞섶은 그가 무슨 약을 주워 먹고 이 난리가 났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만들었다.
미약을 저렇게나 많이 주워 먹었으니. 어떻게든 해소를 해야 약 기운이 빠지기는 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세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떫어졌다.
“……설마 저거.”
내가, 도와줘야 하나?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그녀는 아주아주 오랫동안 고심을 거듭하다가.
“으윽…….”
“하아, 진짜 어쩌다가 내가…….”
에녹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오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쭈뼛쭈뼛 터질 것 같은 바지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