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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75화 (75/131)

#75

자꾸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에녹 때문에, 세라는 가만히 있는데도 위험한 스릴을 즐기는 막장 불륜녀가 된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평생 느낄 필요 없는 이상한 기분을 경험한 세라가 에녹의 손을 매섭게 탁 쳐 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이에요. 남이야 뭘 입든 신경 끄시죠.”

그와 눈을 마주친 세라가 열심히 눈을 부라리며 눈치를 주었다.

왜 이래. 가만히 있어.

자신을 맹렬히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에녹이 얄밉게 쌔액, 웃음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신경을 끄겠어. 넌 내 노예인데.”

‘내 노예’를 힘주어 강조한 에녹이 세라의 목덜미 쪽으로 다시금 손을 움직였을 때였다.

“에이, 왜 그래. 신경 끄라잖아~.”

이번에 그의 손을 쳐 낸 사람은 스노우였다.

세라를 보호하듯 에녹의 손길을 걷어 낸 그가 은근히 뼈가 숨겨진 어조로 한마디 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옷이라도 한 벌 사 주든가. 우리 자기 내가 사 주기 전까지 겨울옷이 한 벌도 없더라~.”

“쓸데없는 데 돈을 썼네.”

장난스럽게 말했어도 결코 떳떳한 입장이 아닐 텐데, 에녹은 그 말을 똑같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올겨울엔 두꺼운 옷이 필요가 없을 텐데.”

멋있는 척 목소리를 내리깐 에녹이 또 세라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언뜻 매정하게 노예를 굴리는 주인님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세라는 왠지 저 안에 숨은 속뜻이 더 있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슨 소리야? 세라가 얼마나 추위를 많이 타는데.”

덧붙은 말에 숨겨진 의미심장함을 알아채지 못한 스노우가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느냐며 에녹을 나무랐다. 에녹은 그 말에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여유롭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차피 집 안에 있으면 벗게 되잖아.”

“……?”

“추위를 탈 일도 없을걸.”

끈덕지게 세라만을 바라보는 연둣빛 눈동자가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하고 물어 오는 것 같았다.

“어휴…….”

에녹과 눈을 마주친 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자신하는 대로, 그녀는 에녹이 하는 말 저편에 숨어 있는 질척한 진실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에녹은 지금 무슨 옷을 입든 자신이 다 벗길 텐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였다.

설마 저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내연남 역할에 몰입한 나머지 생각 없이 튀어나온 말인가. 뭐가 됐든 확실한 건 에녹은 어제의 비밀을 스노우에게 들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아 보인다는 거였다.

일단 아직까지는 그 욕망을 잘 숨겨 내고 있는 것 같았으나, 수틀리면 어떻게 나올지 감도 오지 않았다.

“우리 자기는 집 안에 있어도 추위를 많이 탄단 말이야. 대장. 너무 무심하네~.”

에녹이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스노우만 어떠한 숨겨진 의도 따위 없이 대화에 임했다.

“스노우-.”

그의 말 중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던 걸까.

여유로운 척 싱글거리던 에녹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스노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에녹이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릴 정도로 은밀히 속삭인 것도 그즈음이었다.

“굳이 내 앞에서까지 열심히 할 필욘 없어.”

어차피 진짜로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세라는 어쩐지 생략된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에녹은 그런 말 따위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는 얼굴로 스노우를 위하는 척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 말끝마다 자기, 자기 거리지 마. 더 작위적이잖아.”

“……?”

“내 노예는 그런 닭살스러운 말 안 좋아해.”

“……??”

스노우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쯤 되니 에녹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오늘따라 에녹이 티가 나게 영역표시를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표시 당하는 영역은 물론 세라다.

에녹은 어서 대답하지 않고 뭐 하느냐는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었다.

“…….”

“…….”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 영문 모를 눈싸움이 벌어졌다.

말없이 눈만 끔뻑이는 두 남자를 옆에 둔 세라는 심지가 타들어 가는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불안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마커스가 아슬아슬한 침묵을 깨뜨려 주었다.

“대장! 왜 여기에 끼어 있어?”

에녹을 찾아온 마커스가 눈치 없이 뭐 하는 짓이냐며 에녹을 세라와 스노우 사이에서 빼냈다.

그리하여 세라와 스노우, 에녹과 마커스가 마주 보며 서게 되었다. 누가 봐도 공적인 거리와 구도였다. 세라의 마음이 조금쯤은 편해졌다.

반면 세라의 옆자리를 양보하게 된 에녹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는 정성스럽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심하고 차가운 태도로 마커스를 대했다.

“뭐야. 왜 왔어.”

“할 얘기 있어. 자리 좀 옮기자.”

마커스는 긴히 할 말이 있다며 에녹을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세라와 스노우를 슬쩍 곁눈질하는 게, 아무래도 알타이르 길드 건으로 그와 중요하게 나눌 말이 있는 눈치였다.

“싫어. 안 갈 거야. 여기서 이야기해.”

정작 길드장인 에녹은 결코 자리를 옮길 수 없다며 마커스의 손을 빼놓았다.

“그래. 그럼 여기서 말할게.”

성가실만한데도 이미 에녹의 변덕에 이골이 난 마커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냥 제 마음을 바꾸어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알타이르 길드장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거 알지?”

“새삼스럽게.”

“저 꼴을 보아하니 아주 작정을 하고 긁으러 오는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귀찮게 해도 성질 좀 죽여.”

“어떻게?”

“그냥 오냐오냐하라고.”

“…….”

에녹이 거짓말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싫어도 해!”

마커스는 영 비협조적인 에녹에게 싫으면 외우기라도 하라며 엄하게 타일렀다.

“저쪽 길드장은 대장하고만 이야기하려고 할 테니까. 적당히 숙여 주고 빨리 할 일이나 하고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지금은 우리가 더 불리한 상황인 거 알지?

끈기 있게 에녹을 설득한 마커스가 너만 믿는다는 눈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서 얼굴 보면, 잘 왔다고 한마디 해 주고. 바로 회의부터 하자고 해.”

“…….”

“알았지? 고분고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당부를 하는 마커스는 에녹에게 최면이라도 걸 기세로 계속해서 ‘고분고분’이라는 말을 주입했다.

그러다 대상을 바꿔 세라와 스노우를 향해서도 당부했다.

“너희도 똑같아. 알타이르가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예의 바르게 행동해. 알았지?”

그는 상대는 아직도 신분제가 있다고 믿는 꼰대들이니까. 시비를 걸어오면 자리를 피하고, 개소리를 해도 대충 웃으며 흘려 넘기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저건 예의 있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는 게 아닐까. 세라와 스노우는 딱 그런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지만, 굳이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썩 물러나라!”

“길을 터라. 잡종. 데니다스 님이 지나실 자리다.”

그사이, 시그너스의 진영으로 파고든 알타이르 무리가 사람들을 휘저으며 멋대로 길을 텄다. 길드원들을 한없이 낮잡아 부르는 말에 다들 표정이 좋지 못했지만, 사전에 마커스에게 단단히 주의를 들은 터라 맞서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물러나면 그 위로 다시 붉은 융단이 깔렸다.

세라와 스노우도 얼결에 밀려 에녹과 멀어졌다. 그렇게 갈라진 틈 사이로 붉은 길은 빠르게 굴러와 에녹의 앞까지 도달했다.

데니다스는 그 위를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는 오른손으로 함께 가마에 타고 있던 소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세상의 주인공처럼 함께 행진하는 두 사람의 뒤로 번쩍번쩍하게 차려입은 알타이르 길드원들이 따라붙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걸어온 데니다스가 에녹을 향해 첫마디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반역자.”

인사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세라는 사람들이 왜 그다지도 알타이르 길드를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허어.”

세라는 순수하게 놀란 눈으로 알타이르의 길드장을 쳐다보았다.

반역자라니. 에녹을 저런 식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순간, 순한 양처럼 굴어 주던 시그너스 길드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무례하다 못해 파괴적인 첫인사에 길드원들의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폭출되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기운에 알타이르 길드원들 중 상당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알타이르의 길드장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얼굴빛이 한층 창백해졌다.

그 분위기엔 세라도 일조한 바가 있었다. 남들처럼 살기까지는 아니었으나, 에녹이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짓을 당하자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이 중에서 에녹에게 가장 많은 욕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본인이었는데도 말이다.

저 무례한 아저씨에게 진정한 반역이 뭔지 알려 줘 볼까.

다들 그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위기였지만,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

정작 당사자인 에녹이 진정하라며 손을 내저었기 때문이다.

대장의 손짓 한 번에, 차갑게 응어리진 분노가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공기를 원래대로 돌린 에녹이 점잖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오랜만이군. 데니다스.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나?”

미소마저 지은 그는 누가 보아도 알타이르를 환영하는 사람 같았다.

경박하지 않고, 가볍게 날리지도 않는 정중한 화법은 평소의 에녹답지 않게 잘 교육 받은 도련님 같았다.

“우리는 조약에 따라 알타이르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시그너스는 책임을 이행할 준비가 되었나?”

“물론. 여독이 쌓였을 테니 우선은 쉴 곳으로 안내하지.”

마커스의 걱정과는 달리 에녹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알타이르를 맞이했다.

순순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데니다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더욱 빳빳이 들었다.

가슴을 한껏 부풀린 그가 여태 에스코트한 소녀를 향해 다정히 속삭였다.

“가자꾸나. 아퀼라.”

“네. 폐하.”

정중히 무릎을 굽힌 소녀가 데니다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연신 미련이 남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세라는 아퀼라가 누구를 바라보는지 눈치챘다.

헤매지 않는 시선이 곧장 스노우에게로 향한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눈빛에 어찌나 그리움이 뚝뚝 묻어 나던지.

세라는 이야기를 나눠 보지 않고도, 아퀼라가 스노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스노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퀼라의 시선이 그의 목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누군가와 깍지를 끼고 있는 스노우의 손을 발견한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아퀼라의 시선이 제 약혼자와 맞닿은 손을 거꾸로 타고 오른다.

“…….”

그리하여 세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발견한 아퀼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충격받은 소녀의 얼굴이 가여울 정도로 창백하게 탈색되었다.

“아퀼라.”

데니다스가 걸음을 멈춘 딸을 조용히 불렀다.

아퀼라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휙, 고개를 돌려 쫓기듯이 자리를 떠났다.

척 보기에도 상처받은 뒷모습에 영 입 안이 씁쓸했다.

“……제가 꼭 악역 같네요.”

“적어도 저 애한테는 그렇지~.”

산뜻하게 대꾸한 스노우가 그러니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으라며 세라를 응원했다.

세라는 너도 참 너라는 눈으로 그를 쳐다봐 주었다. 그래도 명색이 약혼자인데, 아퀼라가 상처받는 일에 대해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뀨우우우…….

이동하는 알타이르 길드를 따라 거대한 먹구름이 함께 움직였다.

저것도 처리를 해야 할 텐데.

세라가 복잡한 눈으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에녹이 알타이르를 이끌고 나자, 마커스가 다시 한번 더 시그너스 길드를 단속하고 나섰다.

그는 특히나 알타이르와 접점이 많을 예정인 스노우와 세라를 향해 한 번 더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알았지? 좋게 좋게. 응? 조용조용.”

“…….”

세라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번 건에 100골드도 걸려 있고, 저쪽에 검은 덩어리가 달려 있는 이상 굳이 마찰을 일으킬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웬만한 해코지는 다 당해 본 경력자였기 때문에, 저쪽에서 먼저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뺨 몇 대 후려 맞거나 욕설 몇 번 듣더라도 당장은 참고 넘어가 보겠다고 생각했다.

좋게 좋게. 조용조용.

굳게 다짐한 세라가 마커스의 말을 가슴에 새겨 보았다.

그래도 제법 강력한 명분이 있으니, 이번에는 제법 잘 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분명 그런 다짐을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리고 그날 밤.

아무도 없는 으슥한 복도에 선 세라는 심란한 표정으로 제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곳에는 웬 남자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엎어진 자세로 쓰러진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바닥에 흐트러진 그의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참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반성을 하는 그녀의 손에는 웬 벽돌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것의 모서리에는 새빨간 혈흔이 얼룩처럼 묻어 있었다.

쓰러진 남자. 벽돌을 든 여자.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앞뒤 상황이 딱 들어맞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쟤가 먼저 잘못하지 않았나…….”

잠시 반성하는 듯하던 세라는 금세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밀어 넣었다. 벽돌에 맞아 기절한 남자는 말없이 떠밀려 온 책임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제가 친 사고가 저절로 해결되거나 하지 않았다.

아, 마커스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좆됐다.

한숨을 내쉰 세라가 낭패감이 짙은 표정으로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사건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한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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