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이질적일 정도로 상큼한 고백에 장내에 한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건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시그너스 길드 쪽이었다.
“그래! 사랑하는 사이다!”
길드원들은 본인들이 세라라도 된 양 당당하게 스노우의 말을 따라서 복창했다.
“……애인?”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어떻게 면역자 따위랑.”
그에 금시초문이었던 알타이르에서는 그러면 안 되지 않냐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스노우랑 세라가 그토록 딱 붙어 다녔는데도, 대놓고 알려 주기 전까지 설마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일 줄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어쩜 저렇게까지 눈치가 없을 수 있을까. 감탄스러웠는데, 그 이유는 제일 마지막에 이어진 데니다스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었다.
“사, 사랑~?”
그는 스노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비비 꼬았다.
“어떻, 어떻게, 면역자처럼 천한 것과 사, 사, 사……!”
데니다스는 숫제 인간과 짐승의 사랑을 목격한 사람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노우와 세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데니다스의 얼굴이 카멜레온처럼 새파래졌다가, 빨개졌다가 오락가락했다. 그러다 경악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불같이 화를 냈다.
“네, 네, 네, 네, 네가 내 딸을 두고, 감히 이딴, 저딴, 이딴……!”
어어억!
이성을 앞지르는 감정 때문에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버벅거리던 데니다스가 곧 뒷목을 잡고 쓰러져 버렸다.
“아바마마!”
“폐, 폐하!”
그에 알타이르 길드가 우르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팽팽히 맞서고 있던 전선이 무너지자 시그너스에서도 하나둘 검을 거뒀다.
“시그너스는 무엇 하고 있나! 어서, 어서 어의를 불러와!”
“어의 같은 소리 하네. 어이가 없어서.”
기겁을 하는 알타이르와는 달리 시그너스에서는 중요한 손님이 쓰러졌는데도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쓰러진 이유 그 자체가 불만인 눈치였다.
우리 애가 어디가 어때서.
지 아들내미보단 훨씬 인물도 좋고 착한데.
딱 그런 표정으로 의사건 나발이건 불러 주고 싶지도 않다는 반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 의사 좀 불러와라.”
“네.”
누군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의사를 부르러 갔고, 데니다스는 붉은 융단에 싸여 들것에 실려 나갔다. 알타이르 길드는 과자에 모여든 개미 떼처럼 그를 따라 우르르 자리를 옮겼다.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이 되는 것 같았다.
상대가 흩어지자 똘똘 뭉쳤던 시그너스도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에녹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데니다스가 쓰러졌으니, 안 그래도 파투 날 분위기였던 회의는 오늘 안에 재개하기 어려워 보였다. 마커스는 길드원들에게 이렇게 된 거 맘 놓고 푹 쉬라고 일러 준 뒤 자리를 파했다.
“어이구, 이거 점점 파래진다.”
얼추 정리를 끝낸 마커스는 그사이 더 시퍼렇게 변해 버린 세라의 뺨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러게. 의사는 이쪽이 불러야겠는데?”
많이 심했는지, 스노우조차 진지하게 치료를 권했다.
어차피 시간이 남는 김에 함께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아니요. 그냥 두세요.”
하지만 세라는 그 모든 권유를 거절했다.
말을 할 때마다 맞은 뺨이 아프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거 최대한 퍼렇게 물들어야 되거든요.”
치료를 거부한 그녀는 여기서 더 퍼렇게 물들어야 한다며 제 상처를 방치했다.
“왜?”
마커스와 스노우는 도대체 왜 그래야 하냐며 이유를 물었다. 세라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야 우리가 유리해지죠.”
데니다스의 성격상 이 일은 반드시 커진다. 아무리 시그너스에서 보호를 해 주려 해도 목격자가 존재하는 이상 세라는 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럼 코락스와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해 가며 싸우게 되겠지. 그때 세라가 누가 봐도 피해 사실이 명확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세라. 그렇게 안 해도-.”
마커스가 못 말리겠다며 세라를 설득하려는데, 데니다스를 따라갔던 한 무리의 기사들이 세라를 향해 다가왔다.
“왜 이쪽으로 오는 걸까~?”
그들을 막아선 건 스노우였다.
스노우와 마주한 남자는 그와 말을 섞는 게 불쾌하다는 반응이었다.
“저 면역자는 코락스 님을 해하려 했다. 폐하께서 깨어나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도망치지 못하게 죄인의 신병을 구속해야 한다.”
그는 자초지종도 잘 모르면서 이 모든 상황의 과실이 세라에게 있다고 단정 지었다.
“뭐야?”
“너희들이 뭔데 구속을 한다 만다야?”
그에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길드원들이 돌아와 스노우와 함께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죄인이라니…….”
이번만큼은 세라도 억울했다.
지옥에서도 죄인인데 여기서도 죄인?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세라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벽돌로 내려치기는 했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 조금밖에 없었고, 어쨌든 안 죽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쪽에서 먼저 선빵을 갈겼다.
“그러게. 단어 선택이 너무 경솔하네~.”
스노우가 그녀의 편을 들어주며 남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본인도 아직 알타이르 소속인 주제에, 덮어놓고 죄인 취급하는 게 알타이르의 방식이냐며 당사자들이 듣기 불편해할 만한 소리를 잘도 했다.
“설마 순순히 넘겨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스노우가 개소리하지 말라는 말을 우아하게 돌려 말했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하겠다.”
예상했던 일인지,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검에 손을 올렸다. 서로 검을 거둔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면 곤란하지.”
“응. 많이 곤란해.”
그에 시그너스 길드원들도 다시 무기에 손을 올렸다.
겨우 느슨해졌던 공기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들은 언제 적을 공격할지 가늠하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서로를 주시했다.
“시리안.”
그 팽팽히 당겨진 실을 끊어 낸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아퀼라?”
“고, 공주님!”
스노우와 남자는 목소리만 듣고도 단번에 주인을 알아맞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시녀들을 이끌고 나타난 아퀼라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예쁜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시그너스의 사람입니다. 이 이상 다른 길드에 무례를 범하지 마세요.”
“……하지만.”
“명령입니다. 물러나세요.”
겉보기에 유약해 보이는 아퀼라는 의외로 강단이 있었다. 제 상사가 확실하게 시그너스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에 시리안이라 불린 남자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분한 표정으로 명령을 받아들인 남자가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아퀼라는 스노우에게 알은체를 해 왔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네요. 오라버니.”
“오랜만이야. 아퀼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퀼라와는 달리 대꾸하는 스노우의 태도는 바람에 날아갈 듯 가벼웠다.
“…….”
세라에게 시선을 옮긴 아퀼라가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네 왔다. 아직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세라도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녀의 귓가에 언뜻 길드원 중 누군가가 ‘오오, 삼자대면이다.’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용건이라도 있어?”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흘려 넘긴 스노우가 무심한 질문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5년 만에 만나는 약혼녀인데, 남들 다하는 잘 지냈니. 예뻐졌다. 인사치레 없이 냅다 본론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조금 시무룩해진 아퀼라가 차분하게 대화를 청했다.
그래. 할 이야기 많겠지.
세라와 스노우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언젠가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진짜 연인이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합을 짜 놓았기 때문이다.
“스노우…….”
신호를 받은 세라가 맞았던 뺨이 아픈 것처럼 엄살을 피웠다. 그리고 애인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서 물었다.
“갈 거야……?”
그러면 스노우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고, 두 사람은 아퀼라 앞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증명-.
“아, 어떡하지~. 내 애인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가-.”
“아뇨.”
증명해야 했는데…….
“오라버니께 하는 말이 아니에요.”
담담하게 말을 자르고 들어온 아퀼라가 스노우를 지나쳐 세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당신께 청하는 겁니다.”
“예……?”
갑자기 지명을 받은 세라가 황당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혼자가 있는데 왜 나를?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
‘어떻게 해요?’
‘쟤가 왜 저러지?’
의견을 묻듯이 스노우를 바라봤지만, 그 또한 아퀼라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세라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아퀼라가 레이디를 모시는 기사처럼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눠 주시겠어요?”
***
홀린 듯이 손을 맞잡으니 정신을 차렸을 땐 아퀼라에게 배정된 방이었다.
데니다스의 바로 옆방인 그곳은 건물에서 두 번째로 좋은 방이었다. 너른 객실 한편에 위치한 손님용 테이블에는 이미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세라는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찻잔을 보며 생각했다.
‘독살……!’
무서운 생각에 제자리에 멈춰 선 그녀를 향해, 아퀼라가 친절히 자리를 권했다. 세라는 자리에 앉자마자 찻잔을 멀찍이 밀어 두었다.
“저는 왜, 보자고 하셨죠?”
그리고 최대한 새침하게 물었다.
지금 자신은 애인의 약혼녀를 눈앞에 둔 질투심 많은 여자였다. 그러니 아퀼라가 무슨 짓을 해도 고깝게 눈을 흘겨야 했다. 상대가 아직 어린 소녀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흘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돈을 받았으니까.
돈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제 오라버니의 무례를 사죄드려요.”
하지만 세라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아퀼라는 그녀가 도저히 눈을 흘길 수 없는 아이였다.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앞으로 나설 타이밍을 놓쳤어요.”
세라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소녀의 머리꼭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작 잘못을 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녀는 진심으로 세라가 모욕을 당한 게 제 불찰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여기서 아퀼라가 말하는 ‘오라버니’는 스노우가 아닌 코락스였다. 그 빻은 감자는 무슨 행운으로 자신의 죄를 대신 사죄하는 여동생을 갖게 되었나.
세라는 진심으로 코락스의 전생이 궁금해졌다.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고개를 든 아퀼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세라의 상처를 살폈다. 그냥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저도 벽돌로 쳤는데요.”
고깝게 굴어 주겠다는 다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세라는 그렇게 순할 수가 없는 말투로 나도 한 방 갈겼으니 괜찮다 전했다.
아퀼라는 웃었다.
어떻게 나를 보고 웃을 수가 있지.
세라는 처음으로 눈앞의 소녀가 궁금해졌다.
“이거, 받아 주시겠어요?”
아퀼라가 테이블 한쪽에 놓인 작은 상자를 세라에게 건네주었다. 아마도 시녀에게 미리 준비해 두라고 일러둔 모양이었다.
열어 보니 시원한 약초 냄새가 물씬 올라왔다.
아퀼라가 건네준 것은 상처에 바르는 연고였다.
“…….”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라가 뚜껑을 덮었다.
“……내가, 밉지 않나요?”
세라는 아퀼라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퀼라라면 설령 그래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절대 세라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의사에게 보이기만 하면 되는 상처를 걱정하며 손수 약을 챙겨 주지도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이 마음에 둔 약혼자의 애인에게는 절대로.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아퀼라는 했다.
도대체 왜?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만났다. 아퀼라는 세라가 말한 미움이 단순히 제 혈육을 벽돌로 내려친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세라도 알았다.
그녀가 아퀼라를 신기해하는 것처럼, 아퀼라도 세라를 신기해했다. 아이는 상대의 근원까지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세라의 눈동자 깊은 곳까지 꼼꼼히 바라보다가.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또 웃었다.
“……예?”
황당했다.
세라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칭찬에 절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금시초문이었다.
“스노우 오라버니가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아퀼라는 이상한 칭찬을 계속 해댔다.
“…….”
세라는 이번에야말로 말을 잃었다.
아니, 친구야. 네가 여기서 그걸 인정해 버리면 안 되지.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발라 드려도 될까요?”
아주 오냐오냐해 주니까 아퀼라는 정도를 모르고 착해졌다.
최소한 머리채는 잡히겠다 생각하던 세라만 갈 곳 잃은 각오를 허탈하게 삭여야 했다.
‘아니, 스노우.’
자꾸만 꺾여 나가는 전의에 세라가 마음속으로 스노우를 원망했다.
‘이렇게 좋은 애라고 왜 말해 주지 않았어.’
놀랍게도 아퀼라는 정말 좋은 애였다.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속이 깊고, 제 아비와는 달리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약혼자의 애인을 눈앞에 두고도 눈동자에는 질투보다는 총명함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 흘러넘치고 있으니 말 다했다.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아퀼라에게 연고를 건네준 세라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상처를 이용해 재판을 유리하게 만들어 보겠다던 과거의 계획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퀼라가 기쁘다는 듯이 웃으며 세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고를 덜어 낸 손가락이 세라의 뺨 위로 내려앉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길이 또 너무 조심스러워서, 세라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이야. 그렇게 해서는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수가 없어.
답답하긴 했어도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어떻게 데니다스를 심은 곳에 아퀼라가 나올 수 있지.
어쩌다 이런 기적이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퀼라가 세라를 따로 불러내 준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그녀의 시선이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뀨우우우…….
눈이 마주친 검은 덩어리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늘을 검게 물들였던 먹구름은 알타이르 길드가 아닌 아퀼라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배 속의 아이는 아들입니다.’
‘안 돼! 나는 딸이 필요하오!’
‘그렇다면 아이의 성별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이…….’
시작부터 뒤틀려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가 없는 상태였다.
빠르게 지나간 대화를 복기하던 세라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 이건 또 어떻게 해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