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릴 정도로 외친 세라가 낑낑대며 창문을 타고 회의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단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버벅대는 그녀를 덥석 들어서 회의장에 내려 준 사람은 에녹이었다.
세라는 에녹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시선을 준 후 그대로 지나쳐 스노우에게 달려갔다.
“우리 자기를 그렇게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낼 순 없어요! 저도 함께 갈래요!”
그러고는 스노우에게 팔짱을 끼고 매달려 애처로운 연인인 척 연기를 시작했다.
“여태 밖에서 엿듣고 있었나. 본데없이 자란 티를 내는군!”
그녀가 회의장으로 난입하자 데니다스가 못마땅한 티를 팍팍 냈다.
“뭐야? 무슨 생각인데?”
갑작스럽기는 마찬가지인 스노우가 슬쩍 고개를 내려 세라의 생각을 물었다.
“그냥 대충 맞장구쳐 줘요. 같이 가겠다고.”
설명할 시간이 없었던 세라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찔러 눈치를 주었다.
“내가 맞장구를 어떻게 쳐. 애인이 사지로 들어가겠다는데, 널 말려야 설정이 맞지.”
“아, 대충 제 고집에 못 이겼다는 식으로 연출하면 되잖아요. 하루 이틀 해 봐요?”
“그럼 좀 더 어리광 피워 봐. 데려가 줄 테니까.”
서로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연인 사이에는 복화술로 이루어진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어리광?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곤란하게 미간을 좁힌 세라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어리광을 흉내 냈다.
“나, 나도 데려가.”
스노우의 곁에 바짝 붙어 선 세라가 그의 어깨에 제 머리를 어설프게 비벼댔다. 꼭 고양이가 신뢰하는 인간에게 하듯이.
“허어?”
에녹이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보군. 세라는 민망함에 질끈 눈을 감았다.
“……너 정말 진심이구나.”
하지만 적어도 스노우에게 세라가 얼마나 간절한지는 전달이 된 것 같았다. 픽,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스노우가 마침내 세라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애인이 너무 귀여워서 두고 갈 수가 없네요. 어차피 면역자가 함께 가면 수월할 테니까. 함께 가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샐샐 대는 스노우가 데니다스를 향해 물었다.
“이, 이익, 이것들이!”
제 앞에서 대놓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에 데니다스가 다시 혈압이 오르는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오냐. 그렇게 소원이면 둘이서 함께 들어가거라!”
괘씸하다는 어조로 쏘아붙인 그가 동의한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조약과 관련한 보상은 가시에 다녀온 뒤에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그 외에 다른 중요한 사안들은 모조리 가시에 다녀온 뒤로 미뤘다. 다시 말해, 데니다스는 세라를 가시에 들여보내는 일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하는지에 따라 시그너스에 얼마나 뜯어먹을지를 결정하겠다고 한 것이다.
“쟤 왜 저래?”
“저 정도로, 였던가. 둘이?”
갑자기 위험한 가시에 서로 가겠다고 나서는 연인 때문에, 시그너스 길드원들이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쑥덕거렸다.
“들었느냐. 아퀼라. 스노우가 가시 토벌에 면역자를 함께 데려가겠다는구나.”
“……아바마마.”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겠느냐? 반드시 필요한 인재니 저러지 않겠니.”
데니다스는 자신을 따라 냉큼 손을 들지 않는 딸을 웬일로 부드럽게 설득했다. 그는 백 마디 설득의 말보다 스노우의 행동 하나가 더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들먹거렸다.
“으음…….”
그에 아퀼라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곤란한 듯 미간을 좁히다가, 아버지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손을 들었다.
됐다! 세라가 쾌재를 불렀다.
“난 동의 못 하겠는데.”
그때, 다 된 밥에 초를 치는 사람이 등장했다.
성큼 다가온 에녹이 스노우의 품에서 세라를 떼어 냈다. 그리고 몹시 불만이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누구 마음대로 가시에 들어가?”
지켜 달라며.
부릅뜬 두 눈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단다. 얘야.
뭐라도 설명을 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다. 벌써부터 알타이르의 몇몇이 에녹과 세라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저 사람들, 뭐 있는 거 아니야? 하면서.
“죄송한데-.”
그래서 세라는 일단 상황을 끝내고 나중에 설명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연인 사이의 일이니 제삼자는 빠져 주시겠어요?”
전혀 친하지 않은 남을 대하듯 에녹을 밀어낸 세라가 연신 한쪽 눈을 깜빡였다. 사정이 있어 이러는 거니까 너도 장단을 맞추라는 신호였다.
완벽하게 선을 긋는 태도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하며 의심을 거뒀다.
“…….”
꿈틀, 에녹의 눈썹이 움직였다.
딱딱하게 입매를 굳힌 그가 조용히 등을 돌려 제자리에 착석했다.
“동의하지.”
그리고 얌전히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라가 휴, 하고 안도했다.
“결정되었습니다.”
세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대변인이 땅. 땅. 땅. 의사봉을 휘둘렀다.
휴, 다행이다.
원하는 것을 이뤄 낸 세라가 에녹을 바라봤다.
느릿하게 손을 떨구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세라가 잘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칭찬을 받은 에녹은.
“……?!”
팩, 고개를 돌려 버렸다.
***
가시에 들어가는 날은 바로 다음 날 정오로 결정되었다. 알타이르가 차일피일 미루면 어쩌냐고 노심초사하던 것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빠른 결단이었다.
로우드와 알타이르 관할 지역의 경계선에 있는 가시 앞에는 아침부터 두 진영의 인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시그너스 측에서 새벽부터 자리를 마련해 준 덕분에 가시 토벌 현장을 방문한 이들이 편하게 앉아서 대기할 수 있게 되었다.
곧 가시에 들어가야 할 시간인데도, 데니다스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채였다. 알타이르 길드원들과 아퀼라는 일찌감치 와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가시 앞에서 대기 중인 세라는, 스노우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 그늘에서 편히 쉬는 중이었다.
“흐음…….”
세라는 심란한 눈으로 사람들에 둘러싸인 아퀼라를 바라보았다. 새카맣게 칠해져 보이지 않던 아퀼라의 운명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째 주어지는 정보가 몹시 제한적이었다.
‘오늘 저 가시에서 죽는다는 결말만 있고, 어떻게 죽는다는 과정이 안 보여.’
어제부터 열심히 아퀼라의 어둠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아퀼라의 운명을 들여다보았지만, 죽는다는 결과만 계속해서 되풀이될 뿐, 정확히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죽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이랬던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여러모로 예외 사항이 많았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가시는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개체는 아니야~.”
그녀의 곁에 앉은 스노우가 들어가기 전에 미리 숙지하라며 벼락치기로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예전에 누구누구는 다짜고짜 들어가라고 하던데, 스노우는 참 친절하기도 하지.
위협적인 개체는 아니다라…….
스노우의 말을 곱씹은 세라가 미간을 모았다.
눈앞의 가시를 면밀히 관찰했다. 가시는 예전에 세라가 세이옌을 구하러 들어갔던 가시보다 2배 정도 커 보였다. 그럼 위험도 딱 2배이려나.
2배만큼의 위협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하던 세라가 영 가늠이 되지 않아 얌전히 질문했다.
“죽을 수도 있을까요?”
“음? 글쎄. 어렵지 않을까?”
“…….”
“누가 일부러 죽어라 훼방 놓지 않는 이상. 그건 힘들지.”
스노우는 이 인원과 구성이 중형급 가시도 해결하지 못하면 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며 살벌한 소릴 실없는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제거하는 게 정말 어렵고 위험했으면 딸에게 껌뻑 죽는 데니다스가 저런 곳에 아퀼라를 들여보낼 리가 없었다.
“아, 근데 세라는 죽이려 들 수 있겠다~.”
방금 전까지 세라를 안심시켜 주었던 스노우는 바로 다음 순간 해맑게 그녀만은 예외일 수 있다며 까르르 웃었다.
“……스노우.”
세라가 재수없는 소리를 하는 스노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농담으로 치부하고 웃어넘기기엔 어제 그녀에 대한 데니다스의 집착이 워낙 강했어야지. 아퀼라도 신경 써야 하고, 본인 목숨도 챙겨야 하고. 세라는 오늘 몹시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말이 없어진 게 겁이 나서라고 생각한 걸까. 스노우가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제법 애인 같은 소리를 해 왔다.
“근데, 궁금한 건 그게 다야?”
“예?”
“뭐, 더. 다른 건 없어?”
“…….”
스노우는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며 세라를 재촉했다. 그게 단순히 세라의 호기심을 풀어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묘하게 기다리는 질문이 있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문제는 세라가 그게 뭔지 전혀 감을 못 잡겠다는 거다.
뭔가를 더, 물어봐야 하는 건가?
“으음…….”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지만 역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 잇속이라도 챙기기로 한 세라가 현재 가장 답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주인님. 왜 삐진 건지 아세요?”
제 등 뒤를 가리킨 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라와 스노우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에서 정확히 정면에 놓여 있는 의자에 에녹이 앉아 있었다. 세라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금 제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웬일로 새벽같이 참석한 그는 아까부터 저렇게, 도무지 신경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세라를 노려봤다. 얼굴이 뚫릴 것 같을 때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이 마주치면, 시위하듯이 또 팩, 고개를 돌려 버려서 더더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두고두고 성가시게 굴게 뻔했다.
세라는 벌써부터 제 미래가 그려져 절로 푹푹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와, 너 진짜.”
세라의 질문을 받은 스노우가 실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야. 됐어…….”
스노우가 의기소침하게 말끝을 끌었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그가 의자에 추욱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어제 나한테 했던 대로만 하면 바로 풀릴 거야.”
그러면서 누가 들어도 빈정 상한 목소리로 에녹을 턱짓했다.
“…….”
세라는 곧장 반응하지 못하고 두 눈을 끔뻑였다.
그냥 어쩌다 저렇게 됐나 이유를 물었을 뿐인데, 해결책이 떨어졌다. 그래도 솔깃하긴 했다. 내가 어제 스노우한테 뭘 했지? 기억을 더듬던 세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정말 그딴 걸로 풀릴까요?”
“풀려.”
스노우가 재고의 여지가 없는 어조로 단언했다.
에녹과 가장 절친한 사이인 그가 하는 말이니 신빙성이 급격히 치솟아 올랐다.
“그럼 잠깐 다녀올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금방 에녹에게 닿았다. 세라가 제게 걸어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에녹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꺾어 그녀를 외면했다. 세라는 너무나도 피곤하지만, 그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담아 그를 불렀다.
“주인님…….”
“누구세요?”
에녹은 세라가 자신을 부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뚱한 눈이 정말로 모르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처럼 생경했다.
단단히 토라진 모양인데. 난감한 한숨을 내쉰 세라가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했다.
“계속 이러실 거예요?”
“내가 뭘?”
“설마 제가 어제 회의장에서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죠?”
속전속결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한 세라가 곧장 핵심을 찔렀다. 스노우에게는 왜 화가 났는지 아느냐 물었지만 사실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알고도 믿고 싶지 않으니까 물었을 뿐.
‘연인 사이의 일이니 제삼자는 빠져 주시겠어요?’
에녹의 미운 300살 같은 태도는 어제 회의장에서 저 말을 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아니. 전-혀 아닌데.”
에녹은 그것만은 결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한껏 비틀린 목소리는 네가 생각한 그게 바로 정답이라 외치고 있었다.
음. 역시 맞았군.
완전히 확신하게 된 세라가 좀 더 사근사근한 어조로 바꿨다.
“그 사태를 해결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제 계속 연극이라고 신호도 보냈잖아요.”
응? 그치? 알아들었잖아. 우리 어제 서로 동의한 거잖아.
세라는 신뢰와 기대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그랬어?”
그러나 에녹은 금시초문이라며 생긋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제삼자라서 몰랐지.”
“……아, 진짜!”
어제 자신이 한 말을 똑같이 인용하여 빈정거리는 에녹에 세라가 작작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와요!”
표정을 굳힌 세라가 거만하게 앉은 에녹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에녹은 나는 제 삼자라 너와 함께할 수 없다고 빈정대다가 어깨를 얻어맞고는 순순히 끌려와 주었다.
체구가 작은 세라가 커다란 에녹을 끌고 가는 광경은 금세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앞장서서 성큼성큼 숲으로 들어가는 걸음걸이에 화가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어휴 저 둘이 또 싸우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그너스 길드원들이 쯧쯧 혀를 찼다. 누군가 주먹질은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으나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쭉, 숲길을 따라 들어갔다.
“으휴, 내가 진짜 주인님 때문에!”
적당히 사람들이 없는 곳까지 에녹을 끌고 온 세라가 그를 커다란 나무에 내팽개쳤다.
“왜 외간 남자 손목을 잡고 그래?”
에녹은 자기도 지지 않겠다는 기세로 세라에게 잡혔던 손목을 흔들어댔다. 저리 치워! 그 얄미운 손길을 한 방에 쳐 낸 세라가 으르렁 이를 드러냈다.
“좀 잘 지내 보나 싶었더니 꼭 초를 치지. 정말.”
“그건 너겠지.”
“시끄러!”
조용! 조용!
세라가 한마디도 지지 않는 미운 300살을 기합으로 조용히 시켰다. 또 제삼자가 어쩌니 해 대면 이번에는 입술을 때려 주려고 했는데, 에녹은 의외로 얌전히 세라의 말을 들었다.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요.”
미간을 구긴 세라가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로 에녹에게 다가섰다. 여기까지 와서도 아직까지 마음에 번뇌가 몰아쳤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게 맞아? 하지만 곧 가시에 들어가야 할 세라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고, 이 신경 쓰이는 상태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고 딱히, 이 방법 이외에 시도해 볼 만한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 나한테 했던 대로만 하면 바로 풀릴 거야.’
스노우의 확신에 찬 조언을 떠올린 세라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아니기만 해. 스노우. 가만 안 둬.
깊이 심호흡을 한 그녀가 퍽! 하고 에녹의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사포 문지르듯 제 머리를 벅벅 비벼대며 웅얼거렸다.
“어, 어제 그렇게 말해서 미안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