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검에 새겨져 있던 술식이 날을 타고 벽으로 기어들었다.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인 비틀린 문자들이 희미한 마력이 새어 나오는 빈칸으로 기어들어 가 식을 완성 시켰다.
제 모습을 되찾은 마법이 불길한 빛을 찬란하게도 내뿜었다.
“벽에, 이상한 문양이……!”
“시리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겐가!”
그로 인해 이제 세라의 눈에만 보이던 흑마법이 실체를 갖게 되었다.
불길한 빛이 깃든 술식이 철컥. 철컥. 소리를 내며 쪼개지더니 곧 톱니바퀴 모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술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시의 모든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증식했다. 놀란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쿠르릉. 땅이 울린다.
“……!”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하는 바람에, 세라의 목이 칼날에 살짝 베였다.
위기 상황에 봉착하자, 알타이르 길드원들은 더 이상 세라든 시리안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진이다!”
“어서, 공주님을 보호해……!”
“공주님! 우선 이곳에서 멀어지셔야 합니다!”
아퀼라의 주변을 에워싼 길드원들은 고귀한 후계자를 보호하기 위해 난리였다.
“누굴 섬겨야 하는 줄도 모르는 멍청한 놈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리안이 크게 비웃었다.
벽에 꽂아 놓았던 검을 뽑아 버린 그가 잔인한 눈빛으로 도망치려는 자들을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쩌저적!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지가 갈라졌다.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길을 타고 일렬로 쭉 뻗어 나갔다. 그들에게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알려 주려는 것처럼 빈틈이 없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쿠궁. 쿠궁. 단단하게 받쳐 주던 땅이 울렁거리며,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처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앗!”
시리안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바닥에 세라를 내팽개쳤다. 인질을 잡을 필요가 사라졌다는 듯 그녀에게서 모든 관심을 끊어 낸 그가 세라를 위협하던 검을 돌연 제 목을 향해 겨누며 씨익, 웃었다.
“시리안!”
내내 주시하고 있던 아퀼라가 그를 말리듯 소리쳤다.
하지만 서슬 퍼런 칼날이 비치는 눈동자에는 이미 광기가 충만하였다.
“올바른 알타이르를 위하여.”
아퀼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시리안은 망설임 없이 검날로 제 목을 그어 버렸다.
푸욱.
귀가 먹먹할 정도로 굉음이 울리는 와중에도 검날이 살을 꿰뚫는 소리가 선명했다. 챙그랑.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커흑……!”
목을 움켜쥔 시리안이 울컥, 피를 토해 냈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으악!”
뜨거운 피가 후두둑, 세라의 옷을 적셨다. 질색을 한 그녀가 어떻게든 시리안과 멀어지려 뒤로 물러났다.
“대체 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퀼라의 입에서 안타까운 절규가 터져 나왔다. 처절한 물음에도 시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컥, 크흑, 커흑…….”
뒷걸음질을 친 시리안이 검은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와 닿은 벽면에 파문이 인 것처럼 일렁거렸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 벽이 피에 반응하듯 시리안을 집어삼켰다.
세라는 시리안의 몸이 벽 너머로 사라질 때, 첨벙이는 물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우우우우!
그를 완전히 잡아먹은 벽이 길게 울며 전율했다. 공기를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포효에 세라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어떻게 된 거야! 가시가 왜……!”
“설마, 시리안 저 자식. 안타레스교와 거래를……?”
“제길……! 땅이 갈라진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길드원들이 뒤틀려 꿈틀대기 시작하는 대지에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렸다.
“…….”
그 와중에도 아퀼라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 시리안이 서 있던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그녀는 처음으로 그 나이 또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추락에 대비해!”
넋이 빠진 아퀼라 대신 사람들을 진정시킨 사람은 스노우였다.
“으아악! 다리! 내 다리가 끼었어!”
“벽! 벽에 검을 박아서 버텨!”
“공주님!”
여러 목소리가 한데 뭉쳐 어지러진다.
도무지 통제가 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빠르게 포기한 스노우가 엎어진 세라를 향해 다가왔다.
“세-.”
하지만 그 걸음을 채 한 발자국 떼어 보기도 전에.
쿠르르릉!
땅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출정식이 끝난 이후, 천막으로 자리를 옮긴 데니다스와 에녹은 거창한 만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피차 얼굴 마주 보며 하하 호호 밥이나 먹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만, 데니다스가 부득불 제 딸이 돌아오기 전에 보상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성화를 부렸으므로 겸사겸사 마련된 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길드를 재건 중이라지. 어떻게, 우리 쪽에서 기술자라도 지원해 줄까?”
“……아니.”
“습격이 꽤나 요란했던 모양이야. 겨우 저 정도 가시도 없애지 못해서 기한을 넘기다니.”
음식엔 손도 대지 않은 에녹과는 달리 데니다스는 입맛이 도는지 얄미울 정도로 맛있게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다.
“면역자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깬 것도 그렇고……. 이제 시그너스도 한물갔군.”
밥을 먹을 땐 말없이 밥만 먹었으면 좋겠는데, 잔뜩 신이 난 데니다스는 열심히 입을 놀려 깐족거렸다.
“……데니다스.”
원래도 인내심이 깊지 않은 에녹이 그 귀찮음을 감수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참다못해 말문을 연 에녹이 성가시게 구는 어린아이를 나무라듯 한마디 했다.
“좀, 조용히 해.”
“…….”
“계속 귀찮게 굴면 조약이고 뭐고 저 가시를 내 손으로 부숴 버릴 테니까.”
그러고는 자꾸 귀찮게 굴면 알타이르를 기다리지 않고, 제 손으로 가시를 부숴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건 절대 안 되지!”
펄쩍 뛴 데니다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며 쾅! 커트러리를 내려놓았다.
“조약이 유지되는 한, 저 가시를 해결하는 건 우리 알타이르의 몫인데!”
“아, 그래. 그놈의 조약.”
자꾸만 조약을 들먹이는 태도에 에녹이 신물이 난다는 식으로 으르렁거렸다. 저 귀찮은 길드 간의 조약으로 인해, 금방 끝날 수 있는 사태가 이렇게나 길어져 에녹의 노예가 자꾸만 바깥으로 나돌게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대륙에 살아남은 길드끼리 협의를 한 조약은 절대 불가침 한 계약으로 제아무리 에녹이라 하더라도 어겼다가는 재판장에 끌려가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래!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싶지 않다면 가시에는 손끝 하나 대지 마라!”
의기양양하게 소리친 데니다스가 다시 스푼에 손을 가져다 대며 으스댔다.
“너는 거기에 가만히 앉아 우리 알타이르에게 보상으로 무엇을 바칠지나 고민-.”
우르릉!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이어서 천막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이 둘을 덮쳤다.
“무슨 일이지?”
데니다스는 멋지게 이야기하던 것이 막혀 분한 표정을 했다. 그가 천막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눈짓했지만, 계속 데니다스와 함께 있던 그들이 자초지종을 알 리가 만무했다.
쿠르릉! 쿠릉! 콰르르릉!
지진은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린 테이블에서 음식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 대장!”
겨우 주변이 조용해지자 시그너스 길드원 하나가 천막으로 뛰어 들어왔다.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그가 에녹을 보자마자 곧장 소리쳤다.
“가시가, 자라나고 있어!”
“……뭐?”
그건 300년 남짓 살아온 에녹도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검은 가시가 자라다니.
흑마법에 의해 이 세상에 내리꽂힌 그 재앙 덩어리는 생물 같은 게 아니었다. 면역자를 앞세운 다른 길드의 조사에 의하면, 주변 대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구조가 아니라고 들었다.
여태까지 오랫동안 한 자리에 세워진 가시라 하더라도 외관상 크기가 변하거나 하는 일 또한 없었기에 그 가설은 거의 진실로써 굳어진 실정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잡종! 가시가 자라다니……!”
이 소식을 어깨너머로 대화를 엿들은 데니다스가 펄쩍 뛰었다.
한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에녹이 부하를 향해 상황을 캐물었다.
“그래서, 자라난 가시의 상태는?”
길드원은 자신이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대형급,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야.”
챙그랑.
데니다스가 들고 있던 스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가 얼어붙어 있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선 에녹이 천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하의 말이 사실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다.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에녹은 바로 다음 순간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
천막을 열어젖히자마자, 한눈에 보기에도 가시의 크기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한참을 꺾어야 올려다볼 수 있는 검은 가시는 로우드 지역 어디에서도 보일 정도로 웅장했다.
“……정말로 가시가 자랐군.”
에녹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불어오는 바람결에서 흑마법의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오, 오오. 안 돼. 안 된다.”
한발 늦게 에녹을 따라 나온 데니다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이 깃들었다. 그는 제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무언가와 싸우는 것처럼 연신 고개를 젓다가, 평소 목숨처럼 고수하던 위엄이나 왕족의 무게감을 전부 집어치운 채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 이렇, 이렇게 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있는데, 무서워서 차마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에녹은 데니다스가 무슨 생각을 하느라 저토록 엉망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하늘에 닿을 것처럼 자라난 가시를 보는 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저 안에 들어간 인원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얘기군.”
상황 판단을 끝낸 에녹의 입에서 냉정한 평가가 내려졌다.
“아, 아퀼, 아퀼라, 어, 어억……!”
확인 사살을 당한 데니다스가 가시로 들어간 딸의 이름을 부르짖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폐하!”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알타이르 길드원들이 쓰러지는 왕을 받아 내기 위해 몰려들었다. 데니다스는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충격을 받은 듯 힘없이 늘어진 채 거친 숨만 헐떡였다.
“어떻게 처리할까? 대장?”
잠시 그쪽에 시선을 주었던 시그너스 길드원이 에녹의 의견을 물었다. 그 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대형이라면, 서른 이상의 인원이 투입되어 몇 달에 걸쳐 공략이 이루어질 정도로 위험도가 극히 높은 가시였다. 대형 가시의 핵은 특별히 단단해서, 전 대륙을 통틀어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당연하게도, 알타이르에는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없었다.
“에, 에, 에녹 소서 경…….”
데니다스는 그것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매번 반역자. 반역자 거리며 깐족거리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곧장 호칭을 붙여 제대로 존칭을 써 주었다.
“왜?”
돌아오는 대답이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데니다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부, 부디, 저 가시를 제, 제거해 주시-.”
“조약이 있는 한-.”
에녹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말허리를 무참히 잘라 냈다.
누구보다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는 주제에, 말투만은 태연한 그가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저 가시는 알타이르의 소관이 아니던가?”
“……!”
데니다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그는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
“…….”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녹은 이제 어떻게 나올 거냐는 눈으로 그의 반응을 재촉했다.
데니다스가 바쁘게 눈을 굴렸다. 그가 속으로 어떤 계산을 돌리고 있는지, 에녹에게까지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돌려도 제게 유리한 답이 나오지는 않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데니다스의 눈가에 촉촉한 눈물이 맺혔다.
짧지 않은 시간을 고민한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
죽어.
죽음을 품은 ‘목소리’에 쿵! 또 한 마리의 마물이 쓰러졌다.
“커헉! 켁! 콜록!”
벽을 짚은 세라가 거센 기침을 토해 냈다. 대량의 마력이 훑고 지나간 목구멍은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해서, 한 번 ‘목소리’를 쓰고 나면 꼭 이렇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구어어…….
마물을 쓰러뜨리자 이번에는 또 다른 게 나타났다.
“아, 켈록, 또, 뭐야-.”
짜증스레 미간을 좁힌 세라가 기침 때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전방을 노려보았다가.
그어어…….
그대로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앞에 나타난 존재는 시체가 된 알타이르 길드원이었다.
마물에게 당한 듯 가슴에 깊이 팬 상처를 달고 있는 궁수는 그새 가시의 마법에 걸려 제 동료를 없애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
위기감을 조성하기에 딱 알맞은 등장이었으므로, 세라의 표정은 당연히 곱지 않았다. 겨우 기침을 멈춘 세라가 연이어 ‘목소리’를 쏟아 냈다.
흙으로 돌아가.
그으-.
그것에 닿자마자 세라를 향해 다가오던 시체가 흙처럼 흩어져 바닥에 흩날렸다.
“케헥! 콜록! 콜록! 콜록!”
그리고 또 한차례 요란한 기침을 쏟아 냈다. 도저히 목구멍이 간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말할 틈도 없이 더욱 격렬하게.
만약 여기서 한 마리라도 더 나타났으면 진심으로 위험할 뻔했는데, 다행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아……. 미친. 더럽게 복잡하네.”
겨우 진정한 세라가 피곤한 눈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추락 이후, 정신을 차려 보니 세라는 혼자였다. 그토록 요란한 붕괴가 일어났음에도 그녀의 주변으로는 무너진 땅의 잔해 하나 굴러다니지 않고 있었다.
대신, 끝이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꼬여 버린 미궁의 한가운데였다.
‘위쪽은 속임수였고, 여기가 진짜였나?’
면역자인 세라조차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고,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독기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으로 강렬했다. 상대하기 벅찬 마물도 자주 출몰하고 말이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마력의 밀집도, 죽음의 냄새, 숨통을 조이는 압박감, 모든 것이 세이옌을 구하러 갔을 때 경험했던 조잡한 가시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래서야 함께 떨어진 사람들 중에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스노우는 살아 있을까.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그가 살아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다행인 점은 눈에 박힌 별의 조각 덕분에 한 명의 생사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은, 아퀼라부터…….”
세라가 제 눈에만 보이는 벽 너머, 미궁 어딘가에 있는 검은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윽…….”
무심코 걸음을 옮기려던 세라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통증이 이는 곳으로 시선을 떨군 그녀는 그새 중요한 사실을 까먹은 스스로에게 짜증스러운 한숨을 토해 냈다.
‘아, 맞아. 나 발목 다쳤지.’
재수가 없게도, 추락할 때 어디를 잘못 디뎠는지 세라의 발목은 제대로 접질려 걸을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별수 있나. 일단은 가야지.”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세라는 벽에 몸을 의지하여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 문득 뇌리를 강타한 의문에 두 눈을 번뜩였다.
근데 나, 오늘따라 흑마법을 되게 잘 쓰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