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84화 (84/131)

#84

세라가 손으로 제 가슴팍을 더듬어 보았다. 이런다고 해서 영혼에 새겨진 상처가 만져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통증이 없다는 사실 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흑마법을 쓰고 나면, 어떻게든 어그러진 회로가 타는 듯이 아파 왔는데…….

‘이번에는 왜 아무렇지도 않지?’

고개를 갸웃거린 세라가 시험 삼아 마력을 움직여 보았다.

“……?”

그러자 그녀의 영혼에 새겨져 있는 회로에서 언제 끊어진 적이나 있었냐는 듯 마력이 매끄럽게 흘렀다. 부활 이후 하도 쓰지 않아 좁아진 회로를 타고 갑자기 막대한 마력이 비집고 들어왔다.

“케헥! 콜록! 콜록!”

급격한 마력 운용으로 인해 세라의 입에서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통증은 없었다.

아무리 마력을 끌어올리고, 돌리고, 별 난리를 다 쳐도 영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던 상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영문 모를 현상에 세라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제 회로를 고칠 방법을 찾기는커녕, 흑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제대로 신경도 쓰지 못하고 살았었다.

세라가 지상에 올라와 받은 치료라고 할 만한 거라곤…….

“……설마.”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살색 향연의 기억에 세라의 미간이 흠칫, 굳어졌다. 도저히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에게 새겨진 상처든 고통이든 무언가가 나았다면 원인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 짓 때문에 상처가 나은 건가?”

말하면서도 거짓말 같다.

그러니 믿지 말아야지.

세라는 애써 떠오른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외면했다. 과정은 모르겠고, 흑마법을 잘 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쓴 건 뱉어 버리고 단것만 삼킨 세라가 다시 아퀼라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

무심코 벽 너머의 검은 덩어리를 바라보는데, 별의 조각이 반응을 보였다.

쩌적.

가장자리에 균열이 가면서, 아퀼라의 미래가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로 세라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시리안의 배신으로 가시에 고립된 아퀼라는 홀로 마물을 상대하다, 마물이 된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차마 제 손으로 없애지 못하고 천천히, 고통스럽게 사망에 이르게 되고…….

지금이 바로 그 천천히 고통스럽게 사망에 이르기 직전의 상황이라고 말이다.

“에이씨……!”

아퀼라의 죽음을 직감한 세라가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뀨우우웃! 벽을 투과하여 보이는 검은 덩어리들이 어서 와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소리 높여 울었다.

원근감으로 보아서는 아퀼라와 세라 사이의 거리가 멀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미궁이었다.

구불구불 복잡하게 꼬부라진 미로를 정직하게 달려 나갔다가는 적절한 순간에 아퀼라에게 닿지 못할 게 뻔했다.

게다가 지금은 발목도 접질려서, 평소보다 훨씬 속도가 느린 상태였다.

뀨우웃! 뀨우우웃!

그리고 지금 이 순간조차도, 아퀼라의 죽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돼. 내 형량!

위기감을 느낀 세라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간 통로의 끝, 그녀의 시야를 막아선 미궁의 벽을 짚었다.

파지직!

그러기가 무섭게 보랏빛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세라의 손바닥에 뜨거운 작열감이 느껴지며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가시에 부여된 술식이 세라에게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무래도 가시를 설계한 자가 아니면 술식을 건드릴 수 없도록 보호진을 새겨 놓은 모양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철저하네.

그 반항을 가소로운 눈으로 내려다본 세라가 제힘으로 마법진을 찍어 누르며 명령했다.

열어.

파지직! 파직!

강한 힘과 맞붙은 벽에서 눈부신 불꽃이 연달아 튀어 올랐다.

쩌적. 별의 조각에 균열이 하나 더 늘었다.

벽이 반항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퀼라의 죽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세라가 더 강하고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열어!

우우웅-!

벽이 비명을 지른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세라에게 맞서던 술식이 막대한 마력에 밀려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우우웅! 우웅!

술식이 밀려난 자리에는 본래의 벽만 남았다. 폭풍을 맞이한 듯 출렁이던 검은 바다가 서서히 옆으로 걷혀 나갔다.

비단 밀려나기 시작한 건 세라의 눈앞에 있는 벽 하나만이 아니었다.

마력의 형태로 불어넣어진 그녀의 의지는 가시 전체에 퍼져 있는 술식을 타고 전달되었다.

힘의 논리에 지배당한 미로가 양옆으로 갈라진다. 사람 하나 거뜬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벌어진 벽들은 세라가 가고자 하는 자리,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곧장 길을 내어 주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벽이 사라지자, 마침내 긴 통로 끝에 선 아퀼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는 알타이르 길드원들의 시체까지도.

“……!”

갑자기 양옆으로 갈라지는 벽에 놀랐는지, 아퀼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세라가 소리쳤다.

“아퀼라! 이쪽으로 와!”

존댓말도 잊어버린 다급한 외침에, 아퀼라가 시체와 세라를 번갈아 쳐다보다 곧 세라를 향해 달려왔다.

저도 모르게 제게 뛰어드는 아퀼라를 감싸 안은 세라가 소녀를 보호하듯 품에 안은 채, 뒤따라오는 시체를 향해 쏘아붙였다.

사라져.

날카로운 ‘목소리’에 닿은 시체들이 다리부터 부서져 내렸다. 흩어지는 형체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세라가 열어 놓은 벽들이 원래대로 돌아와 통로를 닫아 버렸다.

짧은 틈에 격하게 움직인 두 사람이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쩌저적. 쩌적. 갈라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아퀼라의 미래가 모습을 감추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니?”

“방금 그거, 당신이 한 거예요?”

어느 정도 호흡을 정리한 둘이 동시에 첫마디를 내뱉었다.

“아-.”

아퀼라의 지적을 받은 세라는 찔리는 게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아퀼라의 눈앞에서 버젓이 흑마법을 사용해 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다는 대답보다 더 확실한 반응에 안 그래도 동그랗게 떠진 아퀼라의 눈이 이제는 튀어나올 기세로 커졌다.

“당신, 설마……!”

자신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켜는 아퀼라에, 세라가 낮게 혀를 찼다. 그녀는 긴장한 눈으로 아퀼라를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 영구히 기억을 조작하는 주술을 생각했다.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킨 아퀼라가 푸른색 눈을 번뜩이며 뒷말을 이었다.

“마법사였어요?!”

“어엉?”

“대단해……. 마법사를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에요!”

“……어, 아니, 나는-.”

그건, 세라가 예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반응이었다.

반가움.

아퀼라는 놀랍게도 세라를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있었다.

“아바마마께 들었어요! 마법사들은 물길을 가를 수 있고, 바닷속에서도 불을 피울 수 있다고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소녀는 동경하는 존재를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듣자 하니, 아퀼라는 흑마법사와 마법사의 차이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게 가능한가? 대체 얼마나 곱게 자란 거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순진함에 세라가 속으로 기함을 토했다. 어찌 됐든 그녀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아퀼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크륵.

그때, 지척에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의 소란으로 인해 주의를 끌어 버린 모양이었다.

쿠궁. 쿠궁. 육중한 발걸음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기척이 들리는 곳을 경계하기가 무섭게, 안개를 뚫고 거대하고 흉측한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건 제가 처리할게요.”

겁이 나지도 않는지, 활기차게 대답한 아퀼라가 등에 메고 있던 기다란 봉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중간에 튀어나온 돌출부를 꾹, 누르자 은색의 봉 끝에서 챙, 하고 거대한 날붙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르!

무기를 꺼낸 아퀼라가 달려드는 마물을 향해 제 몸만 한 도끼를 휘둘렀다.

세라는 가녀린 아퀼라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날붙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도끼……?’

콰직!

가뿐하게 휘둘러진 도끼가 그대로 마물의 목을 날려 버렸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양날 도끼는 웬만해서는 생채기도 잘 나지 않을 질긴 마물의 목덜미를 무 썰 듯이 싹둑 잘라 버렸다.

쿠궁, 머리가 날아간 몸이 뒤늦게 대지에 쓰러졌다. 잘린 목에서 흘러나온 녹빛의 진득한 액체가 바닥에 동그랗게 퍼져 나갔다.

“…….”

“제, 제가 힘이 좀 세서. 검을 사용하면 날이 금방 상하거든요.”

세라의 시선을 느낀 아퀼라가 수줍게 뺨을 붉히며 해명했다.

‘이래서 도끼…….’

세라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물의 목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정도의 괴력이라니. 앞으로 절대 아퀼라에게만큼은 까불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평정심을 되찾은 세라가 차분하게 다음 계획에 대해 물었다. 원래는 가시의 핵을 파괴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지만, 이변이 생긴데다가 병력이 크게 줄었다.

완전한 모습을 되찾은 가시는 결코 둘이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을 함께 데려갈 수 없는 건 유감이지만, 지금은 일단 두 사람만이라도 밖으로 나가 상황을 알려야 할 때다.

“당연히 핵을 찾아야죠.”

……라고, 생각하는 건 세라 혼자뿐인 모양이었다.

세라는 진심이냐는 눈으로 아퀼라를 쳐다봤다.

아퀼라는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스노우 오라버니도 그쪽으로 오실 테니까요.”

“……? 스노우가?”

그에 세라가 못 미더운 듯이 미간을 모았다. 면역자도 아닌 그놈이 무슨 재주로 핵을 찾아내? 딱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스노우와 죽고 못 사는 연인 행세를 하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표정이다.

“마, 맞아. 우리 자기라면 틀림없이 찾아올 거야.”

가까스로 제 신분을 떠올린 세라가 은근슬쩍 맞장구를 치며 앞장서서 전진하려던 참이었다.

“어디 가세요?”

아퀼라가 그쪽이 아니라는 듯이 세라를 붙잡아 세웠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업히셔야죠.”

“……어?”

“발목, 다치셨잖아요.”

“…….”

아퀼라가 힐끗, 아까부터 절뚝거리고 있는 발목을 눈짓했다. 본인만 챙겨도 벅찬 상황에, 아퀼라는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다리가 불편한 세라를 위해 등을 내어 준 것이다.

“…….”

“괜찮아요. 전 엄청 튼튼하거든요.”

선뜻 업히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짐짓 씩씩한 척 너스레를 떨었다.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아무리 씩씩한 척을 한다 하더라도 아직은 아이였다. 괜찮은 척 환하게 웃고는 있지만, 세라는 근심이 섞여 든 눈빛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저리 보여도 배신으로 급변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시리안의 발언 등으로 인해 속이 복잡할 터였다.

“업히세요. 얼른. 그래야 출발할 거예요.”

궁지에 몰린 상태임에도, 아이는 여전히 말간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비록 도끼를 휘두르기는 하지만, 아퀼라는 흑마법이 뭔지 모를 정도로 곱게 자란 공주님인데 아이는 보는 사람 마음이 싱숭생숭할 정도로 철이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으, 응…….”

아퀼라의 성화에 이기지 못한 세라가 어색한 몸짓으로 등에 무게를 실었다. 누군가에게 업힌다는 건 세라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의 옷을 입은 듯 어색한 체감과는 달리 체구가 작은 그녀는 또래보다 키가 큰 아퀼라의 등에 업혀도 큰 위화감이 없었다.

“저에게 방향을 알려 주세요.”

힘이 세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지, 세라를 업은 아퀼라는 힘든 기색도 없이 곧장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가시를 감싸는 흑마법의 힘이 강해진 덕분에, 미궁 깊숙한 곳에서 세라를 끌어당기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저게 핵인 모양이지.

하지만 거리가 무척이나 멀었고, 눈앞을 가리는 안개하며, 대지에서 올라오는 독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직까지는 아퀼라가 멀쩡히 버틴다지만, 언제 사달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이었다.

“……내가 길을 열어 줄게. 곧장 가자.”

그래서 세라는, 이왕 들킨 김에 흑마법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세라가 다시 한번 마력을 불어넣어 미궁의 길을 열었다.

마물이나, 걸어 다니는 시체 따위가 나타나지 않도록 뚫린 길의 양옆을 가로막아 확실하게 안전한 길을 만들어 준 건 덤이었다.

이런저런 옵션을 추가한 덕에 대량의 마력이 쭉, 빠져나가 눈앞이 어지러웠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우와아-. 굉장하다. 이렇게 쉽게 핵을 찾으러 가는 건 처음이에요.”

아퀼라는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세라가 열어 준 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거칠게 움직여 세라의 발목이 아플까 신경 쓰는 게 티가 났다.

철철 넘치다 못해 질질 흐르는 선의에, 세라가 근심 어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은 아이.’

알고는 있었지만 아퀼라에게는 상대로 하여금 나쁜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흔들리는 은발을 바라보는 자수정 빛 눈동자에 언뜻 그리운 감정이 스쳤다.

이토록 남을 쉽게 믿고, 순수하고, 악의라고는 없는 아이를 그녀는 또 하나 알고 있었다.

‘누나.’

볼품없이 마르고, 눈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내가 어른이 되면, 그땐 내가 누나를 업어 줄게.’

자신이 어른만 되면 업어 주겠다 큰소리치던 작은 아이.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 버리면 안 돼?’

피를 나눈 가족 혹은 거추장스러운 짐.

하지만 세라 로젠바움이 유일하게 지키고 싶었던 존재.

그러나 결코 지키지 못했던, 동생.

불쌍한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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