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85화 (85/131)

#85

‘그 애한테 업혔으면 대충 이런 느낌이었을까.’

서글픈 감상에 세라가 쓰게 웃었다.

죽은 동생과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가, 자꾸만 아퀼라와 그 아이가 겹쳐 보였다.

비제도 그렇고, 세이옌도 그렇고, 혹시 나는 이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약한 건가.

본의 아니게 제 약점을 발견해 버린 세라가 졌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퀼라.”

“네?”

“넌 절대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그건, 어쩌면 남몰래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아이를 위한 배려이자, 자신을 처음으로 업어 준 상대에 대한 보답이었다.

여태까지는 단순히 형량을 줄이기 위해 움직였다면 앞으로는 그것과 상관없이 아퀼라를 살리기 위해 움직이겠다는 각오이기도 했다.

에휴, 저답지 않은 말랑한 생각에 세라가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착한 아이는 성가시다. 나쁜 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드니까.

“……?”

그런 세라의 속도 모르고,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퀼라가 푸핫, 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꼭, 스노우 오라버니처럼 이야기하시네요.”

“내가?”

네. 아퀼라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으쌰, 몸을 들썩여 세라를 추어올린 소녀가 웃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당신도 무언가를 꿰뚫어 보나요?”

“…….”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질문이었다.

정곡을 찔려서 아니라고 잡아떼야 할지, 당신‘도’라니 스노우가 뭘 보긴 보나 보지? 라고 떠봐야 할지.

“다 왔으니 이제 그만 내려 줘도 돼.”

정하지 못하고 어물대는 사이에, 두 사람은 세라가 만든 길의 끝에 다다랐다. 침입자가 왔다는 걸 핵도 눈치챈 모양인지, 통로 너머의 어둠 속에서 쿵, 쿵, 둔중한 맥박 소리가 들려왔다.

“아, 벌써 다 왔나요?”

힘들었을 게 뻔한데도, 아퀼라는 아쉬운 기색으로 세라를 내려 주었다. 드디어 두 발로 서게 된 세라는 절뚝거리는 걸음이나마 앞장섰다.

“아마도 이 끝에 가시의 핵이-.”

그리하여, 구불구불한 미로를 완전히 벗어난 세라가 자신이 찾아낸 강력한 기운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당신은……?”

상대를 알아본 세라에게서 경계심이 돋아났다.

그에 어둠 속에서 축, 늘어져 있던 인영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시리안-.”

뒤이어 어둠 속의 존재를 발견한 아퀼라가 상대의 이름을 읊조렸다.

희번득한 시선이 세라와 아퀼라를 훑고는 허연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미소 짓는다.

“아직도, 살아 있을, 줄이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시리안이었다.

“목숨줄, 하나는, 정말 질긴, 꼬맹이군.”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아퀼라를 본 그가 웃음을 지었다. 그륵, 그에 맞춰 시리안의 목에서 피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쿵, 쿵, 그때까지도 통로에서 들었던 둔중한 맥박음이 느릿하게 자리를 채웠다.

멈춰 있던 세라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몸이 벽과 하나가 되어 공중에 고정된 그는 못 본 사이에 미라처럼 비쩍 말라비틀어진 꼴을 하고 있었다.

벽에서 뻗어 나온 넝쿨들이 시리안의 몸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는데, 스스로 상처를 냈던 목덜미에 특히나 많았다.

그곳에 들러붙은 검은 줄기에서 주기적으로 꿀꺽대며 그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꿀꺽. 꿀꺽…….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둔중한 소리였다.

그제야 세라는 자신이 들었던 맥박음의 정체를 눈치챘다.

“……가시와 하나가 된 건가?”

핀에 꽂힌 나비처럼 벽에 박제된 시리안의 주변으로 무시무시한 술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살핀 세라는 시리안을 감싸고 있는 마법을 단숨에 읽어 냈다.

생명력을 빨아들여 움직이는 가시는 시리안을 숙주 삼아 움직이고 있었다. 생기를 강탈당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나, 가시가 그의 몸에 꽂아 넣은 수많은 촉수들이 쉽게 죽지 못하도록 시리안의 목숨줄을 붙드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시리안은 온몸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쥐어짜이다가 죽을 것이다.

세라는 난생처음 보는 방식의 활용법이었다.

보고 있으면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였다. 누가 이런 끔찍한 걸 만들어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인간을 질 좋은 연료 정도로 생각하는 놈일 것이다.

“더러운 면역자라 그런가, 한눈에 알아보는군.”

이 복잡한 마법을 한 번에 해석해 내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도 모르고, 시리안이 냅다 빈정거리고 봤다.

“나한테 더럽다고 하기 전에 본인 꼴이나 돌아보시지.”

의도하지 않아도 절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시리안을 턱짓한 세라는 친절하게도 그가 지금 적반하장을 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고상한 척은 혼자서 다 한 주제에 안타레스랑 손을 잡아?”

세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안타레스’라는 단어에 반응한 건 아퀼라였다. 놀라운 감정을 추스르고 앞으로 나선 그녀는 끔찍한 꼴을 당한 시리안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리안. 어째서 이런 불명예스러운 짓을…….”

“제가, 하면, 불명예입니까.”

시리안이 주저 없이 아퀼라를 비웃었다.

감정을 삭이듯 고개를 툭, 떨군 그의 어깨가 연신 들썩거렸다.

큭큭대는 그의 웃음은 목에 꽂혀 있는 가시가 피를 빨아먹을 때마다 억지로 끊어져 더더욱 기괴해 보였다.

그러다 뚝,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네들이, 하면, 명예롭고?”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도무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 다고?”

그는 아퀼라가 제대로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가로챘다. 아무것도 몰랐다는 무고한 소녀를 진심으로 경멸하는 눈초리였다.

“데니다스 폰, 베델기아.”

그는 일평생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했던 왕의 이름을 증오스럽게 읊조렸다.

뀨우우…….

그 감정에 반응하듯 아퀼라에게 붙어 있던 먹구름들이 얕게 울었다.

왜 이러지?

세라가 그곳에 잠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시리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 욕심 많은 영감이, 안타레스의 힘을 빌려, 태어난 아이가 바로 너! 아퀼라 폰 베델기아잖나!”

“……!”

그리하여 아퀼라의 출생이 품고 있던 또 다른 내막이 밝혀졌을 때.

쩌적. 하고 별의 조각에 균열이 일었다.

“내, 가-?”

경악하는 아퀼라의 음성이 멀어진다.

그녀의 과거를 드문드문 비추던 어둠이 걷히고, 세라는 빠르게 진실을 향해 빨려 들었다.

“네가, 아직 배 속에 있을 때, ‘그 남자’가 알타이르를 찾아왔지.”

되감긴 시간 속에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얼굴을 한 데니다스가 등장했다. 그의 곁에는 부른 배를 끌어안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두려워하는 제 아내를 모른 척한 그는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를 향해 연신 허리를 굽신대고 있었다.

‘사내아이는 필요 없소. 나에게는 딸이 필요하오.’

체면과 위엄을 목숨처럼 여기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비굴한 태도였다.

‘우리의 왕국을, 재건해 줄 딸이……!’

남자를 올려다보는 두 눈에는 눈앞의 과실을 놓칠까 전전긍긍해 하는 탐욕이 투명하게 비쳤다.

내려다보던 상대는 그것이 기꺼운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이의 성별을 바꾸어 주는 마법이 필요하겠군.’

‘그, 그게 정말이오?!’

데니다스는 뛸 듯이 기뻐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연이어 입술을 달싹였다.

“‘그 남자’는…… 당신과, 알타이르의, 운명을, 바꿔 주겠다고, 크륵, 했지.”

너와, 너의 자식, 그리고 네가 속한 길드의 운명을 모조리 바꾸어 주겠다고.

‘다만, 대가가 좀 크겠어.’

하지만,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딸만 낳을 수 있다면 내 어떤 값이든 치르리다!’

데니다스는 망설이지 않고 무엇이든 하겠다 외쳤다. 손을 들어 올린 남자가 데니다스의 미간을 가리키며 대가를 정했다.

‘그럼 당신의 수명으로 하지.’

‘지, 지금 내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겐가?!’

그건 싫었는지, 데니다스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남자가 입술을 한 번 더 달싹이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던 움직임이 중간에 멈추었다. ‘목소리’를 쓴 것 같았다.

데니다스를 제압한 남자가 여유로운 어조로 그를 진정시켰다.

‘아니. 내가 바라는 건 그 반대야.’

‘반대, 라니?’

‘부디 오래 살도록 해. 거슬릴 정도로 오래.’

아주, 오래. 오래.

그 어감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남자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손을 뻗어 왕비의 배에 얹은 남자가 배 속 태아를 향해 불길한 언어를 읊조렸다.

“그러고는 흑마법으로, 배 속 아이를, 딸로 바꾸었다.”

‘아아악!’

배를 움켜쥔 왕비가 고통을 호소하며 실려 갔다. 혼비백산한 데니다스가 시종들에게 들려 가는 왕비를 따라 퇴장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로브가 벗겨져 얼굴이 드러났다. 물결치는 군청색 머리카락이 바깥으로 쏟아졌다. 남자의 발끝에 닿아 있던 시야가 서서히 올라붙는다.

“읏……!”

그리하여,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세라의 시야가 파삭! 박살 나면서,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파사삭! 바삭! 가루가 될 기세로 갈라진 별의 조각이 그로 인해 어떤 운명이 비틀어졌는지 그제야 실토하기 시작했다.

알타이르 길드의 차남으로 태어난 아퀼라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인 데니다스에게 쓸모없는 장기 말 취급을 당하고, 형으로부터는 왕위를 위협하는 경쟁자로서 견제당하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란다. 마땅한 경쟁자는 없었으나, 코락스가 못 미더웠던 데니다스는 그를 쉽사리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큰아들은 아퀼라가 열셋이 되던 해 반란을 일으킨다. 둘로 나뉜 알타이르는 내분의 여파를 이기지 못해 자멸하고, 유일한 왕가의 생존자인 아퀼라는 로우드 지역을 떠나 세상을 유람하다 홀로 쓸쓸하게 죽었다.

알타이르 길드가 공중 분해된 덕분에, 그들의 관할 지역은 고스란히 시그너스 길드에게로 넘어갔고, 대형 길드 2개가 융합한 규모가 된 시그너스는 명실상부한 대륙의 패자로서 더욱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갖게 된다…….

빼앗긴 운명을 일순한 세라의 정신이 쫓겨나듯 현실로 돌아왔다.

“…….”

그녀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진다.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진실에 머리가 다 먹먹해졌다.

검은 덩어리가 먹구름처럼 불어나 있길래 아퀼라가 딸로 태어나는 바람에 알타이르가 막대한 손해를 입은 줄 알았더니, 정반대였다…….

“안타레스의 손을 탄 당신이, 알타이르의 후계자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시리안은 제게 심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얼굴로 어린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소녀 덕분에 제 목숨이 부지되고 있었던 줄 꿈에도 모르고.

“…….”

아퀼라는 충격이 큰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치 시리안이 정의의 편이고, 아퀼라가 나쁜 놈이라도 되는 것 같은 구도였다.

어찌나 대단하신 정의의 편인지.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아주 최선을 다하는 대견한 모습이다.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그저 이용당했을 뿐인 아퀼라에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광경에, 울컥 감정이 솟아올랐다.

“불만이 있으면 당신들 길드장에게나 할 것이지. 왜 아무 죄 없는 애한테 지랄이야.”

전에 없이 살벌하게 목소리를 깐 세라가 아퀼라를 대신해 시리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같은, 안타레스 출신이라고, 감싸는 꼴, 하고는.”

코끝으로 그녀를 내려다본 시리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벽에 붙어 있다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는 태도였다.

“물론, 고결한, 알타이르를 더럽힌, 데니다스 또한, 대가를 치를, 예정이다.”

이젠 폐하라고 부르기도 싫은지, 함부로 데니다스의 이름을 언급한 그가 지옥의 사자처럼 엄숙하게 선포했다.

“오늘을 끝으로, 알타이르는, 더러운 얼룩을, 벗고, 제자리로, 돌아갈-.”

“저기, 아까부터 시리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말은, 중간에 끼어든 아퀼라에 가로막혀 멋없이 져 버리고 말았다. 중요한 말을 방해받은 시리안이 불쾌한 표정으로 아퀼라를 쏘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맑지만, 상처 하나 없이 단단했다.

일방적으로 심한 비난을 들었음에도, 아퀼라는 상대를 증오하는 법이 없었다.

“뭐라고?”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이유가, 정말 그게 끝인가요? 제가…… 흑마법으로 인해 딸이 되었다는……?”

그저, 근본적인 것을 궁금해했지.

모범적인 학생처럼 손을 들어 의견을 발표한 그녀는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 봐도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

시리안은 침묵했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제가 후계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단순히 그 이유뿐만이 아닐 텐데요.”

고개를 갸웃거린 아퀼라가 기억을 잘 떠올려 보라는 듯이 그를 눈짓했다.

“오라버니가 멍청해서지.”

“……!”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튀어나온 솔직한 평가에, 시리안의 눈매가 움찔 반응을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퀼라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사라지면, 오라버니가 갑자기 똑똑해지기라도 하나요?”

비꼴 의도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순수한 질문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