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던 긴장감이 한 번에 툭, 끊어졌다.
아퀼라는 눈을 가리기 쉬운 흑마법이니, 안타레스니 하는 복잡한 포장지에 흔들리지 않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 냈다.
“…….”
“…….”
세라도, 시리안도 황당한 눈으로 아퀼라를 바라보았다. 특히 세라는 생각해 보니 그렇네. 딱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가, 감히, 그딴, 모욕적인-.”
왜냐하면, 한 박자 늦게 분개해 하는 시리안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예? 하지만…….”
아퀼라는 제가 한 말이 어떻게 모욕씩이나 될 수 있느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코락스 오라버니는, 여태 제대로 해낸 일이 하나도 없는걸요.”
“그, 더러운, 입에-.”
“제대로 도전하기는커녕 편법이나 써서 뭐든지 쉽게 얻으려 하고.”
“-그분의 이름을, 올리지-.”
“힘들어 보이는 일이 있으면 부하들에게 미루기나 하는 사람인 건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오, 올리지-.”
소신 있게 자신의 의견을 펼쳐 나가는 아퀼라와는 달리, 시리안의 목소리에는 점점 자신감이 사그라들었다.
뭐라도 하나 속 시원하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충성스러운 신하가 보기에도 그것까지는 영 아니었는지 제대로 말도 못 해 보고 이만 부득부득 갈아댔다.
“지금도, 오라버니 대신 당신이 제 눈앞에 서 있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아퀼라가 친히 시리안을 가리키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주군 대신 거사를 짊어진 기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가요……?”
가장 잔인한 점은, 이렇게 할 말 없게 만들어 놓고 대답을 촉구하는 순진함이다. 그녀는 정말로, 이렇게나 엉망진창인 제 오라버니가 저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마법처럼 유능한 인재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아퀼라. 그만해.
상대는 이미 죽었어…….
만약 이것이 싸움이었다면 세라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같은 편인 그녀조차 이렇게 갈비뼈가 욱신거리는데, 반대편인 시리안은 이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푸흡!”
세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웃지?’라는 눈으로 바라본 아퀼라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저 또한 얼마든지 후계자의 자리를……!”
“닥쳐-!!!”
거기서 그치지 않고, 흔쾌히 후계자의 자리를 양보하는 대범한 모습에, 시리안이 노성을 토해 냈다.
원하는 대로 아퀼라를 몰아붙이지도 못하고, 말대꾸도 하지 못하니 남는 건 분노를 터뜨리는 일 뿐이었다.
섬뜩한 호통을 들은 미궁이 크게 요동쳤다. 쾅! 아퀼라의 등 뒤로 세라의 힘에 굴복해 길을 터 주었던 벽들이 이제야 제정신을 찾은 것처럼 다급하게 입을 닫아 버렸다.
쿵, 쿵, 쿵, 쿵!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벽의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감히! 건방지게! 오염된 핏줄이 그분을 욕보이는가!”
보통 열받은 게 아닌 것 같은 모습에 세라가 아퀼라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나무랐다.
“살살 좀 하지. 이렇게 무턱대고 열받게 하면 어떻게 해?!”
“예?! 화가 나요? 왜?!”
토끼처럼 놀란 아퀼라가 진짜냐고 묻듯이 시리안을 바라보았다.
“혹시 제가 오해하고 있었나요?”
“닥쳐! 닥치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마!”
시리안은 더 이상 아퀼라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봤자 본인이 모시는 주군의 모자람만 부각되는 일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알타이르를 위해 죽어라! 더러운 안타레스의 딸!”
부글부글 끓어오른 검은 벽에서 끝이 날카로운 촉수가 돋아나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어라.
다급히 ‘목소리’를 끌어낸 세라가 명령하자 그중 절반이 궤도를 달리해 휘어졌다. 끼기기긱. 벽과 땅에 부딪린 끝에서 샛노란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건재했다.
“어떻게 그런 패륜아 같은 말을……!”
카각!
그것을 앞으로 나선 아퀼라가 막아 냈다.
“남의 아버지를 함부로 바꾸다니요!”
도끼로 가시를 쳐 낸 그녀는 그제야 심한 말을 들었다며 항의했다.
콰직! 콰직!
거대한 도끼가 순조롭게 촉수를 끊어 냈다. 세라도 틈틈이 ‘목소리’를 이용해 그녀를 도왔다.
하지만 상황은 그저 끊어 낸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았다.
“대체 왜 자꾸 늘어나는 거야!”
두 사람이 촉수를 끊어 내고 막아 낼 때마다, 시리안에게서 뻗어 나온 징그러운 줄기들이 두 개, 세 개로 분열하면서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새도 없이 쳐 내고 또 쳐 내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의 주위에는 거대한 덤불에 둘러싸인 듯 새카만 줄기들로 빼곡했다.
“예로부터,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결코 끊어 낼 수 없는……!”
“지금 그런 거 따질 때냐고!”
세라는 아직까지도 노인네 같은 소리나 해대는 아퀼라를 단속했다.
“죽, 으어어!”
공격이 이어질수록, 시리안의 눈이 광기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꿀꺽. 꿀꺽. 꿀꺽. 가시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지독한 흑마법이 그의 이성을 잠식한다.
“크으, 끄으, 크으으으!”
침을 질질 흘리며 이를 드러내는 그는 점점 짐승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
머지않아 완전히 이지를 상실한 시리안의 입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포효가 내질러졌다. 그의 울음이 닿는 모든 공기가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그에 세라와 아퀼라를 공격하던 촉수들이 한 번에 뒤로 물러났다가.
쐐애액!
소름 끼치는 파공음을 내며 일시에 달려들었다.
멈-.
세라는 첫마디를 내뱉음과 동시에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목소리’로 저지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닿으면 뼈도 못추릴 것처럼 날카로운 촉수들이 사방에서 이리 떼처럼 달려들었다.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의 공격이었다. 그렇게, 덫에 걸린 짐승처럼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어 있던 그때-.
“뒤로 세 걸음.”
어둠 속에서, 정답을 일러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물러나.”
“……!”
단번에 상대를 알아본 세라가 아퀼라를 다급하게 붙잡고 뒤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한 걸음. 검은 줄기가 성큼 거리를 좁히며 가까워졌다.
두 걸음. 검은 줄기가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속도보다 다가오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이대로라면 눈 깜짝할 새에 몸이 꿰뚫릴 것 같았다.
세 걸음. 탁, 세라와 아퀼라의 등이 벽에 닿았다. 두 사람이 막혀 있는 사이 검은 줄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날카로운 선단이 세라의 눈동자 바로 앞에 덮쳐들었다.
“……멈췄, 어?”
하지만, 촉수가 세라와 아퀼라를 꿰뚫기 바로 직전,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종이 몇 장 들어갈 정도로 간발의 차였다.
먹잇감을 꿰뚫지 못한 가시가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게 분한 것처럼 공중에서 바들바들 떨어댔다.
“참 잘했어요~.”
짝짝짝, 정답을 일러 준 이가 장난스럽게 박수를 쳤다.
뚜벅, 뚜벅, 여유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어둠을 비추는 푸른빛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충분히 가까워진 상대가 어둠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을 때-.
‘……눈?’
세라의 머리 위로 푸른 눈송이 하나가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내자, 세라에게 닿은 눈송이는 작은 빛 입자가 되어 퍼져 나갔다.
“……!”
기시감이 드는 감촉에 세라의 두 눈이 크게 홉떠졌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얼어붙은 그녀의 머리 위로-.
푸르른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팔랑팔랑.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아름답게 흩날리는 눈송이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크, 으으으?”
시야를 어지럽히는 눈보라에, 시리안의 관심이 침입자를 향해 돌아갔다.
“스노우 오라버니!”
반색한 아퀼라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퀼라도, 시리안도, 모두 어둠을 걸어 나오는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세라만 제 손을 내려다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 부름에 응하듯, 어둠을 걸어 나온 스노우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아퀼라.”
동네 마실 나온 듯 여유작작한 모습으로 나타난 스노우가 자신을 반겨 주는 소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행이다! 살았어요! 스노우 오라버니께서 저희를 찾아오셨-.”
크게 안도한 아퀼라가 세라의 팔을 흔들며 좋아하다가.
“……!”
뒤늦게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
고개를 숙인 세라의 얼굴에는 어린 아퀼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살벌한 분노가 응어리져 있었다. 아퀼라는 저토록 차분한 무표정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은 분노를 내뿜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안녕. 자기야.”
그때, 스노우가 먼저 세라에게 알은체를 해 왔다.
움찔, 세라의 손끝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느리게 고개를 튼 세라가 조금도 분노를 삭이지 않은 채로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눈보라에 감싸인 그의 두 눈에는 신비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세라가 씹어 뱉듯이 첫마디를 읊조렸다.
“너-.”
그 한 음절에는 수만 가지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각자 다른 색채를 지닌 감정이 한데 뭉쳐 시커먼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깊은 심연의 색.
그 감정의 이름은 증오였다.
“어때?”
자신을 향하는 감정을 씁쓸하게 받아 마신 스노우가 마음에 드냐는 듯이 두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 세라의 반응에 놀란 아퀼라와는 달리, 그는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이제,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겨?”
그에 세라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하염없이 제 손에 닿아 부서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다 뿌득, 이를 갈았다.
관심이 좀 생기냐고?
생기다 못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따져 묻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는 시선이 증오스럽다는 듯이 신비롭게 일렁이는 푸른빛을 노려보았다.
누군가 나서서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녀는 방금 전의 일로 스노우가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저 증오스러운 빛을.
고귀하다는 눈동자 속에 든 무한한 지혜를.
진리를 꿰뚫어 본다는 그 힘을.
그건, 피를 이어 계승되는 요정의 축복이자-.
“너, 누구야-.”
세라가 첫 번째로 팔아넘긴 페이덴 왕족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능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