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지혜.
그것은 오래전, 남쪽 숲의 요정이 페이덴의 선조에게 건네준 축복이었다.
아직 신화와 동화가 살아있던 시절, 인간의 문명에 호기심이 든 요정 하나가 숲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들이 지닌 ‘지혜’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치를 꿰뚫는 힘이었으나,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교활한지 알려 주지 못했다.
노예상에게 속아 화를 입을 뻔한 요정을 살려준 이는 당시에 그곳을 지키던 자경단의 단장이었다.
은혜를 입은 요정은 자신의 은인을 남쪽 숲으로 초대했고, 남자는 인간 최초로 요정들의 영역에 들어가 그들의 왕을 만났다.
제 딸을 구해준 인간을 깊이 치하한 왕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겠다 호언장담했다.
남자는 인간답지 않게 큰 탐욕이 없어 필요한 게 없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가난한 시골에서 나고 자라 배움이 깊지 못한 것이 큰 미련이었다. 자신이 배운 것이 없어서, 곧 태어날 아이도 똑같이 무식쟁이로 자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근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신이 배운 것이 없어 내 자식도 그럴까 봐 걱정된다고. 호탕하게 웃어젖힌 왕은 내 기꺼이 너의 자손들에게 우리의 지혜를 나눠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떴더니, 남자는 어느새 숲 밖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직 산달도 되지 않았는데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아내의 품에 안긴 아기는 남자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금발 머리에 가을하늘처럼 시린 새파란 눈동자.
갓 세상에 태어난 그의 아들은 방금 만났던 요정왕과 비슷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페이덴 왕국의 시작이었다.
요정왕이 나눠준 지혜는 인간들 틈에 섞이니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대가가 필요하긴 했지만, 아무리 어려운 문제나 위기, 진리라 할지라도 답을 알 수 있었다.
너의 자손에게 우리의 지혜를 나눠주겠다는 약속은 피가 이어지는 한 영속적이었다.
그러나 피가 옅어질수록, 지혜는 모든 자손에게 똑같이 부여되지 않고 첫 아이에게만 선택적으로 부여되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지혜 덕분에 페이덴 왕국은 언제나 성군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이치를 꿰뚫어 보는 이들은 사사로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진 평화에 만족하며 그것을 소중히 지켜냈다.
하지만, 좋은 씨앗도 언젠가는 썩은 잎을 틔우는 법.
그 어찌할 수 없는 불행이 페이덴 왕국에도 찾아왔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아름다운 왕국은 그 대에서 끝이 났다.
‘동생이 보고 싶으냐? 그럼 내 말을 잘 들어야겠지.’
세라는 그 썩은 잎이 제게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들이 주었던 고통, 강탈당한 시간.
강요된 이별까지 전부.
‘누나…….’
꺼져 들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희미해지던 숨, 떨리는 몸, 그 몸에 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까지도. 짓밟히고 짓밟혀 죽어가던 어린것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쿵, 쿵, 쿵, 쿵.
세라의 심장이 뜨거운 피를 내뿜으며 폭주했다. 호흡이 가빠지며, 마력 회로가 맹렬하게 끓어오른다.
그 족속들을. 저주받은 일족의 싹을 모조리 뽑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가 있었던가.
실패를 직감한 눈앞이 꺼멓게 죽어 들었다.
분노와 회한에 사로잡힌 세라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 줄도 잊은 채 스노우를 노려보았다.
“대답해. 너 누구냐고-.”
그 질문이 반가운 듯, 스노우의 미소가 환해졌다.
“누구긴.”
어느새 성큼 가까워진 스노우가 세라의 물음에 답했다.
“네 애인이지. 자기야.”
간드러지게 애교를 피운 스노우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장난치듯 실실대는 얼굴은 세라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지금 나랑 장난-.”
끓어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세라가 스노우를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어, 잠깐!”
아퀼라가 그것을 저지하려 손을 뻗었으나 이미 세라의 등이 벽에서 떨어진 후였다.
쐐애액!
그러기가 무섭게 멈춰 있던 촉수들이 일시에 세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
위험을 직감한 세라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에는, 스노우의 품이었다. 스노우와 세라의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촉수가 땅을 꿰뚫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란 세라와는 달리, 스노우는 평소와 똑같이 장난스럽게 그녀를 놀렸다.
“우리 자기는 조심성이 없구나~.”
기껏 구해 줬더니 그걸 걷어차네.
킥킥대며 웃는 그의 머리 위로 두 번째 공격이 쏟아졌다.
그 공격이 닿기 전에, 스노우가 세라를 품에 안은 채 뛰어올랐다. 그는 제게 쏟아지는 촉수들을 피하고 밟으며 공중을 수놓았다.
그 모습이 꼭 한 마리의 나비처럼 가볍고 여유로워 보였다. 자신이 어디를 언제, 어떻게 밟아야 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당연하지.
저 두 눈에 일렁이는 ‘지혜’가 정답을 속삭여 주었을 테니까!
“얼굴 뚫어지겠어~.”
찌를 듯한 시선을 느낀 스노우가 능글맞게 너스레를 떨어댔다. 매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세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져 물었다.
“너, 대체 언제부터-.”
“당연히 처음부터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한 마차에 탔겠어?
스노우는 세라의 질문보다 더 빠르게 답을 돌려주었다.
처음부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세라의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분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을 먼저 물었다.
“에녹에게는-.”
“대장한테는 말 안 했어.”
우려와는 달리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에녹에게 털어놓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면, 에녹이 자신을 여태 살려 둘 리 없었다.
세라에게는 다행인 일이지만 여전히 그를 경계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에녹만큼이나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해야 할 남자가 여태 그녀를 묵인해 주고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말하지 않았지?”
“그래야 재밌잖아~.”
“야, 이 미친……!”
생각보다 더 하찮은 이유에 세라가 목청을 높였다.
“쉿, 조용히 해야지~.”
그러자 스노우가 어린아이를 나무라듯 목소리를 낮춰 주의를 주었다. 세라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스노우가 얄밉게 속살거렸다.
“그러다 네가 누군지 들키면 어떻게 해~?”
“이……!”
진저리를 치며 그를 제 귓가에서 털어 낸 세라가 스노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하!”
그녀를 괴롭혀서 뿌듯한 걸까.
스노우가 시원하게도 웃음을 터뜨렸다.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모양 좋은 입술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어두운 미궁 속에서도 햇살을 녹여 만든 듯한 선명한 금발이 찬란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나니, 그동안 알아보지 못한 게 원통할 정도로 스노우는 선조의 특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모습이었다.
“하-.”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은 세라가 스스로의 무심함을 탓하며 투덜거렸다.
“내가 이걸 못 알아보다니…….”
“그러게.”
본인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는데, 스노우는 곧장 맞장구를 쳐 왔다. 세라와 이마를 맞댄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다며 작게 키득거렸다.
“너 나한테 진짜 관심 없더라…….”
그 한마디에, 세라는 스노우가 딱히 제게 정체를 감추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
할 말이 없어진 세라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처음 이 의뢰를 시작할 때 알타이르가 왜 그렇게까지 너에게 집착하느냐고 제대로 캐물었어도, 하다못해 데니다스를 만난 후에라도 대체 저 아저씨는 너의 무엇이 좋아서 질척대느냐 물어보기만 했어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사이 마지막 공격마저 피해 낸 스노우가 사뿐히 아퀼라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세라를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은 그는 애교가 담뿍 묻어나는 어조로 빙글거렸다.
“기분 풀어~. 자기야.”
자기야.
그 웃기지도 않은 호칭에 세라의 미간에 슬며시 금이 갔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현실을 자각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퀼라가 보였다. 아이는 가장 반가워해야 할 사람이 스노우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상황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제야 자신이 스스로를 너무 드러냈다는 자각이 든 세라가 마지못해 장단을 맞췄다.
“왜…… 이제 왔어. 자기야.”
감정을 억누른 세라의 입에서 가까스로 자기야 소리가 나왔다.
“다음부터는…… 내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자기가 말하고 나서도 듣기 싫어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하던 말이건만, 스노우가 페이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자신과 그가 연인 행세를 하고 있는 지금이 꿈만 같았다.
더럽게 얽힌 악몽.
“스, 스스스, 스스스-!”
모든 공격이 실패하자 약이 바짝 오른 시리안이 그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세라나 아퀼라를 노려볼 때보다 한층 더 험악한 눈매로 보아하니 평소 그에게 적잖은 원한을 지니고 있던 모양이다.
자신을 향한 살기를 여유롭게 무시한 스노우는 세라의 등이 벽에 닿도록 하는 데 열중했다.
“자, 여기 서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
아퀼라, 너도.
벽에 붙어 있는 게 안전하다고 한 주제에, 스노우는 두 사람을 나란히 붙여 놓자마자 뒤로 멀리 물러섰다.
“스, 스, 스느아!!!”
시리안이 스노우의 이름과 닮은 괴성을 울부짖었다.
그에게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일제히 스노우를 향해 겨누어졌다.
사방에서 쏟아진 새카만 촉수가, 검은 파도처럼 스노우를 덮쳤다.
그러자 스노우의 눈동자에 어린 ‘지혜’가 한층 깊어지며 제 눈앞에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을 비췄다.
그가 들여다보는 ‘지혜’가 깊어질수록, 푸르른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리하여, 한차례의 눈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단순하네~.”
거대한 해일을 앞둔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고개만 젖혀 첫 번째 공격을 피해 낸 그는 다리를 노리는 촉수를 밟고 높이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촉수를 베지 않고 튕겨 낸 뒤, 가장 굵은 촉수를 발판 삼아 공중을 빙글 돌아 아래로 추락한다.
시리안이 그가 착지할 자리를 노리고 공격을 가했으나, 이마저도 예상한 스노우가 가까운 촉수에 검을 꽂아 그 반동으로 힘의 방향을 바꾸어 또다시 날아올랐다.
“크아아아!”
검에 찔린 시리안이 한층 더 분개한 울음을 내지르며 스노우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유히 빠져나가는 스노우로 인해 바짝 약만 오를 뿐이었다. 스노우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시리안의 공격을 흘려 냈다.
검을 쥐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촉수를 베거나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괜히 무턱대고 베어 봤자 분열하여 수가 늘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르게 부서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가볍게 공중을 날아오르는 그는 검무를 추는 무희처럼 아름다웠다.
‘아니, 하나도 안 아름다워.’
단칼에 생각을 끊어 낸 세라가 쯧, 하고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나비처럼 날아든 그는 시리안도 알지 못하는 새에 점점 그와의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세라는 그가 왜 공격을 하지 않고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스노우를 쫓아 우왕좌왕 달려든 촉수들이 자기들끼리 엉키기 시작했다. 저 짓을 몇 번만 더 반복하면 엉망으로 엉겨 붙은 촉수들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멀찍이 떨어진 세라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 결말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성이 많이 흐려진 시리안은 자신의 패배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기…….”
“응?”
“죄송해요.”
그때, 아퀼라 뜬금없이 사과를 해 왔다.
대체 네가 왜?
세라가 멀뚱히 아퀼라를 쳐다보았다. 그새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게 된 아이는 면목이 없다는 듯 세라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저희 길드 때문에, 계속 안 좋은 일만 당하게 만들어서요.”
“…….”
“이번에 돌아가면, 후계자 자리도, 스노우 오라버니와의 약혼도 전부 깰 생각이에요.”
“갑자기?!”
극단적이기까지 한 결론에 세라가 펄쩍 뛰며 이유를 물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시리안에게 자신의 정당한 자격을 떳떳하게 증명하던 아퀼라였다. 맞는 말만 해서 시리안조차 변명하지 못하게 만들더니 이제 와서 그걸 내려놓겠다니……?
“그게 옳은 일이니까요.”
아퀼라는 명쾌했다.
“아바마마는, 본인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옳지 못한 행동을 하셨어요.”
그녀는 자신이 이루고, 지키고, 바라 왔던 모든 것들이 아깝지 않은 것처럼 산뜻하게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러니,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안 되죠.”
말간 눈동자가 오래도록 동경하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봄날처럼 따스했다.
아퀼라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조리 내려놓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녀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던 검은 덩어리들이 꿈틀거리며 어둠을 걷어 냈다.
쩌적, 별의 조각이 그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펼쳐질 아퀼라의 미래를 비추었다.
후계자 자리와 약혼을 파투 낸 아퀼라는 더 이상 데니다스에게 가장 소중한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내게 페이덴의 핏줄을 안겨 줄 게 아니라면 너는 필요 없다. 단호히 선언한 그는 반역을 일으킨 아들을 받아들여 함께 알타이르로 돌아간다.
알타이르로 돌아간 아퀼라는 첨탑에 갇혀 유폐 당한다. 그녀를 시기한 코락스는 아버지의 관심이 식은 틈을 놓치지 않고 제 동생을 독살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데니다스는 코락스를 꾸짖으며 후계자의 지위를 박탈하고, 이에 앙심을 품은 코락스가 반란을 일으켜 알타이르 길드는 멸망으로 향하는 내전에…….
“…….”
거기까지 들여다본 세라가 끝까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결국, 알타이르는 정해져 있던 결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퀼라로 인해 비틀린 운명이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세라의 형량은 줄어들 것이다. 정말 잘된 일이다.
정말 잘된 일인데…….
“…….”
어째서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걸까.
한숨을 내쉰 세라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전부 포기하면, 데니다스는 널 버릴 거야.”
“네.”
아퀼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우도 보지 못해. 그는 이곳에 남을 테니까.”
“네. 맞아요.”
“너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푸대접을 받을 수도 있어.”
“그렇겠죠. 그래도-.”
예정된 불행 앞에서도 아퀼라는 담담하게 모든 것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옳지 못한 행위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세라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두려움이나 불안, 일말의 망설임 따윈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저 작은 몸으로 한 길드의 후계자로서 지켜 온 정의와 자부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누구라도, 잘못을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러야 해요.”
아퀼라의 단단한 정의가 세라의 가슴을 찔렀다.
그 순간.
서걱.
마침내 시리안의 목이 베여 나갔다.
포물선을 그리며 튕겨 나온 머리는 공중에 진액과도 같은 피를 흩뿌리다가.
툭, 볼품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르르릉!
가시를 감싸는 흑마법이 크게 뒤틀리며 대지가 요동을 쳤다.
“대가…….”
그 와중에도 못 박힌 듯 아퀼라를 바라보던 세라가 그 말을 입 안으로 굴렸다.
잘못한 게 있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말은 세라의 인생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저주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세라는 언제나 코웃음을 쳤었다. 인과응보라는 말을, 그녀는 믿지 않는다.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죄를 지은 놈이 반드시 벌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살아생전에는.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
세라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눈보라는 그치고, 통로를 가득 채우던 촉수들도 녹아 사라졌다.
그래서, 제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평생 만날 일 없다고 여겼던 사람.
언제, 어디서 제 등에 칼을 찔러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
인과응보 같은 건 없다고 믿었는데, 이 상황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신의 뜻인가.
제게 다가오는 스노우를 바라보며, 세라는 그가 제게 원하는 대가가 무엇일지 가늠해 보았다.
“짠, 해결~.”
스노우는 세라와 아퀼라를 감싸는 심각한 분위기와 맞지 않게, 한없이 가벼운 장난을 쳤다.
“저게 바로 대형 가시의 핵이야~.”
아이들과 놀아 주는 어른처럼 과장스럽게 양손을 팔랑거린 스노우가 갈라진 시리안의 가슴 안쪽, 시커멓게 응어리진 구체를 가리켰다.
“근데, 우린 못 부숴.”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고 속삭였다.
“……뭐?”
가라앉아있던 세라의 의식이 번쩍 깨어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한걸음에 다가간 그녀가 스노우를 제치고 핵을 들여다보았다. 새카맣게 칠해진 암석은 분명 흑마법의 기운으로 점철이 되어 있건만 어떤 술식이 걸려있는지 너무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았다.
“아, 여기 대형 가시군요?”
스노우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아퀼라가 손뼉을 치며 알은체했다.
“그럼 저게 숙주였나요?”
“응. 대형은 처음이지?”
“네. 좋은 경험이 되었어요.”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대화가 이어진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결국 눈앞에 핵이 있는데 부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
이제 와서 꼬여버린 상황에 세라가 해결책을 물었다.
스노우는 간단한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위치는 알아냈으니까. 나가서 부술 수 있는 사람을 데려-.”
흠칫, 표정을 굳혔다.
그의 두 눈이 푸르게 일렁이며 지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좋지 못한 답을 보았는지, 미간을 점점 찌푸리던 스노우가 작게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유난이네.
“세라.”
“……?”
그리고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세라를 향해 주문했다.
“옆으로 한 발자국만 가줄래?”
“……?”
고개를 갸웃거린 세라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오른쪽으로 딱 한 발자국 이동했다.
“네~. 잘했어요~.”
짝짝짝. 손뼉을 친 스노우가 에휴, 한숨을 쉬고는.
“……오, 오라버니?!”
가만히 있던 아퀼라를 들고 멀리 날아올랐다.
왜 저래?!
당황한 세라가 자신만 두고 도망친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왜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시선이 가시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라붙었을 때-.
콰아아아앙-!
붉은 유성이 그녀를 향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