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88화 (88/131)

#88

하늘이 어떻게 갈라졌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냅다 거리를 벌리는 스노우를 쫓아 시선을 올렸는데, 그냥 그렇게 되어 있었다.

추락하는 붉은 잔상을 발견한 것이 먼저였고 소리는 그다음이었다. 벼락이 내려치는 듯한 파열음. 그리고 광풍.

얼굴로 곧장 들이치는 어마어마한 바람에 세라는 질끈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손으로는 귀를 틀어막았다.

으아악! 비명을 질렀던가. 귀를 틀어막았는데도 손바닥 너머로 들이닥치는 굉음이 워낙 요란하여 분간이 가지 않는다.

앞에서 불어오던 광풍은 벽에 부딪혀 다시 세라의 등 뒤를 덮쳤다. 머리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그 잠깐이 마치 영원과도 같았다.

후우웅!

마지막으로 강하게 들이친 바람이 등을 밀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던 것도 같다.

그와 동시에 툭, 앞으로 쏠린 얼굴이 단단한 품에 부딪혔다.

“……?”

움찔, 놀라서 뒷걸음질 치려니 뻗어 온 손길이 당연하다는 듯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혔는데, 더욱 기가 막힌 건 그러기가 무섭게 안도하는 자신이었다.

힘주어 세라를 당긴다.

휙, 끌려간 몸이 제자리를 찾아든 퍼즐 조각처럼 품 안에 쏙 안겼다.

어쩐지 익숙한 품, 익숙한 손길.

세라는 눈을 뜨기도 전에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지상에 그녀의 몸이 그런 식으로 느낄 만한 사람이라곤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바람이 잦아든다.

영원과도 같던 순간의 격변이 지나가고, 세라는 감았던 눈을 떴다.

“…….”

그리하여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하늘에서 떨어지든 땅에서 솟구치든 놀랍지도 않은 사람.

에녹 소서를.

세라와 눈을 맞춘 에녹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게 다였다. 안녕.

가시를 가르고, 이 난리를 부리며 등장했으면서 집 앞을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사람인 양 태연자약한 인사였다.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에 세라는 친히 에녹이 잃어버린 상식을 대신 찾아 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물음이 에녹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쯤 어디 볕 좋은 곳에 앉아 그들이 나올 때까지 풍경이나 구경하고 있어야 할 양반이 이토록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빠른 해결.”

간단히 대답한 에녹이 세라의 어깨 너머를 턱짓했다.

고갯짓을 따라 뒤돌아보니 벌어진 틈 너머로 바깥이 훤히 비치고 있었다.

세라는 공기 중에 흩날리는 시커먼 재를 바라보며, 방금 전의 충격으로 그곳에 있던 게 완전히 부서졌음을 눈치챘다.

검격으로 인해 깨끗하게 갈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몸만 남아 축 늘어져 있던 시리안의 시체도, 그 안에 자리 잡은 시커먼 핵도.

“으음….”

가시는 내부에서만 부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자신이 들었던 말과 완전히 상반되는 결과에 세라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가시는, 내부에서만 부술 수 있다고-.”

“표정이 왜 그래?”

그와 동시에 에녹과 말이 겹쳤다.

뚱하게 표정을 지적한 그는 세라의 턱을 잡고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제 표정이 어때서요?”

“썩었잖아.”

“썩…….”

“못생겨졌어.”

“…….”

너무나도 직설적인 표현에 할 말이 없어졌다.

요즘 못생겼다는 말 자주 듣네.

연속해서 두 번이나 들은 말이지만 지난번처럼 화가 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염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가 이랬지?”

얼굴을 가까이 댄 에녹이 세라의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 동공이 바짝 조여진 연둣빛 눈동자가 기민하게 그녀를 들여다본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 속에 남겨진 생채기들의 출처를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는데, 그게 티가 났던가.

감추고 싶던 비밀을 들킨 기분에 세라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먼저 에녹의 시선을 피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런 식의 회피를 용납할 에녹이 아니었다.

재차 세라의 턱을 주물럭거린 에녹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비틀어 자신을 쳐다보도록 했다.

“말해 봐. 왜 못생겨졌어?”

지금 저게 대답하라고 하는 질문인가.

참 듣는 사람 말하기 싫게 만드는 화법이었지만, 어쩐지 세라의 입술이 멋대로 들썩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에녹이 자신을 심히 우쭈쭈 해 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그에게 모조리 일러바치고 싶은 기분이 들어 버렸다.

평생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방금 마주치고 말았다고.

심지어 그 사람은 여태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인데,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참기 힘든 건.

제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도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상대가 이제는 무엇을 달라고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아 무섭다고 말이다.

‘말해서 어쩌게.’

하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에게 제 약점을 고스란히 일러바치는 것만큼이나 멍청한 짓은 없으니까.

중요한 건 그녀가 그걸 알면서도 제 마음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있다는 거다.

참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 놈이다.

평소에는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더니, 왜 하필 지금 다정하게 굴고 지랄이야.

세라는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근질거리는 입술을 거칠게 짓씹었다.

“어우, 좀 떨어져요.”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에녹을 강하게 밀어냈다.

“제가 먼저 물었으니까 먼저 대답해야죠.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요. 조약 때문에 이 가시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그와 닿았던 곳들을 의식적으로 탁탁 털어 냈다. 순순히 떨어져 준 에녹이 여상한 말투로 대꾸했다.

“조약은 파기됐어.”

“예?!”

“내가 가시를 없애 주는 조건으로.”

“갑자기요?”

“알타이르에는 대형 가시를 제거할 능력이 없거든.”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에녹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중얼거렸지만, 세라를 힐끔대는 시선에는 적지 않은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그 모습이 어째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아주 조금 깜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주 조금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요란하게 해결했어요? 그냥 저희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약이 파기된 건 참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오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더? 내가 뭐, 네가 기다리라고 하면 계속 기다리는 개새끼야?”

그 말을 입에 담자마자 에녹이 발끈했다.

내심 그가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던 세라는 괜히 제 발이 저렸다.

“이제 기다리는 건 지긋지긋해.”

흥분을 가라앉힌 에녹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뭘 얼마나 기다렸다고…….

세라는 오늘따라 조급해 보이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기껏해야 가시에 들어오고 몇 시간 정도나 기다렸을 거면서 생색은…….

“그럼, 이제 알타이르랑은 계산할 거 없는 거죠?”

에녹의 감정을 따라가지 못한 세라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그에 씨근덕대던 에녹이 기다렸다는 듯이 두 눈을 번뜩였다.

“보상을 받기로 했어.”

“보상까지…?”

그사이에 참 알뜰하게도 챙겨 먹었다.

어쩐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키운 것도 아닌데, 왠지 뿌듯한 것 같기도 하고.

세라는 어디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받아 냈는지 들어나 보자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평정심을 되찾은 에녹이 한껏 으스대며 자신이 받아 낸 보상을 일러 주었다.

“아무거나 내가 원하는 거 하나.”

와우. 세라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아무리 대형 가시가 무서워도 그런 걸 보상으로 하다니, 데니다스가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쟤로 달라고 하면 되겠네.”

말을 마친 에녹이 세라의 어깨 너머를 턱짓했다.

“대장~. 이걸 이렇게 부수면 어떻게 해?”

그때, 때마침 땅에 내려선 스노우가 툴툴거리며 끼어들었다.

“가, 가, 가, 가, 가시를…….”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아퀼라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창백한 낯으로 갈라진 틈과 에녹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것을 위로하듯 아퀼라의 머리를 몇 번 토닥여 준 스노우가 과장스럽게 우는소리를 해댔다.

“하마터면 우리까지 전부 썰릴 뻔했잖아~.”

에녹은 스노우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럴 리가. 알아서 피하겠지.”

“…….”

세라는 그 무심한 대답으로 말미암아 에녹이 스노우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긴, 당연한 말이긴 했다. 저 예민한 놈이 아무나 곁에 두지는 않았을 테니.

쿠르릉.

핵을 잃은 가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그토록 애먹였던 가시는 에녹의 일격에 허무하리만치 쉽게 사라졌다.

형태를 잃은 술식들이 바스러진다. 조각나 떨어지는 잔해들은 대지에 닿기도 전에 검은 재로 화해 흩날렸다.

그 모습이 꼭 검은 눈송이가 날리는 것 같아 보였다.

“어때. 마음에 들어?”

물어 오는 목소리에 서린 것은 선명한 기대감이었다.

에녹은 무너지는 가시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세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후에 에녹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궁금한 건 오로지 세라의 반응뿐이라는 것처럼.

시선이 마주치자 에녹이 씨익, 웃으며 답을 재촉했다.

“나 잘했지?”

세라는 에녹이 제게 그 한마디를 듣고 싶어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걸 눈치챘다. 어떠한 속임수나 숨겨진 의도 따위 없이,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남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탐욕스럽지 않았다.

그냥… 귀여웠다.

이번에는 좀 많이.

언제는 자기가 개새끼냐고 하더니.

하는 짓만 봐서는 영락없이 주인 손 타고 싶어 안달인 어린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그 단순한 욕망으로 반짝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복잡하게 꼬여 있던 머릿속이 덩달아 말끔해졌다.

“네.”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자 절로 굳어 있던 입매가 흐물거렸다. 픽, 처음엔 바람 빠진 웃음을 내쉰 세라가 다음에는 입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크게 미소 지었다.

“잘했네요.”

“…….”

그가 만족할 만한 보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는 에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힘들었으니까.

“야!!! 대장!!! 내가 바깥에서는 가시 부수지 말라고 했지!!!”

무너져 내리는 가시 너머에서, 처절한 마커스의 절규가 들려왔다.

“이러다 숲 다 망가지겠다!”

대체 왜 저렇게 유난인가 했더니. 에녹이 내려친 자리를 기점으로 기다란 검격이 로우드 숲을 처참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예전에, 헤타를 죽이러 갔을 때 산맥에 남았던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런 일이 두어 번 더 일어났다가는 시그너스에서 열심히 보호하고 있는 천혜의 숲이 금방 망가질 게 뻔했다.

“대형 가시를, 일격에…….”

“대단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가시가 무너져 갈수록 외부의 소리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부서지는 틈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질린 얼굴이었다.

특히나 앉은 채로 기절한 것 같은 데니다스의 표정이 너무나도 우스워서, 세라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 버리고 말았다.

***

“으음…….”

가시를 완전히 제거하고 난 뒤, 시그너스와 알타이르는 돌발 상황에 대한 원인 규명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어디다 자랑스럽게 떠들 만한 내용은 아니었으므로, 그 자리에는 사건을 판단할 데니다스와 에녹 그리고 당사자이자 가시에서 생존한 세 사람이 함께였다.

스노우와 아퀼라를 통해 시리안의 일을 전해 들은 데니다스는 조용히 코락스를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아, 아바마마…….”

방에서 쉬다 끌려온 코락스는 자신이 무슨 용건으로 불려 나왔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코락스.”

골치 아픈 표정으로 제 아들을 내려다본 데니다스가 고통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퀼라의 말이 사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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