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90화 (90/131)

#90

“내가 쫓아오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스노우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세라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겉으로는 가벼운 흥밋거리를 대하듯 웃고는 있지만 사실 속으로는 많이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처럼 물어보면 대답해 줄 ‘지혜’도 없을 텐데 작정하고 기척을 죽인 자신을 이토록 쉽게 눈치챈 게 재미있었다.

두 눈을 반짝인 스노우가 자신이 가진 흥미를 가감 없이 표현했다.

“대장 이외에 날 알아챈 사람은 네가 처음-.”

꿇어.

말을 하던 도중에, 미약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무릎이 몹시 아파 왔다. 왜 아프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난 뒤였다.

“……!”

미묘하게 달라진 시선의 높이를 인지한 스노우가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밀과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그였지만, 남이 속삭여 주는 지식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천지 차이였다.

세라 로젠바움의 흑마법은 단순히 연마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권능에 가깝다고 하더니 정신력이 꽤 강하다고 자부하던 스노우조차 자신이 무엇에 당하는지도 모르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과연 전성기에는 얼마나 강렬했을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쭈뼛거렸다.

물론, 지극히 원초적인 의미에서.

완벽한 힘의 격차 앞에 나오는 건 한숨보다는 순수한 감탄이었다.

경이로운 눈으로 세라를 우러러본 스노우가 홀린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와~. 이게 ‘목소리’야? 실제로 당해 보니까 훨씬-.”

쉿.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번도 그의 의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입이 접착제라도 붙은 것처럼 합, 다물어졌다.

조용해진 그의 머리 위로 신랄한 경고가 떨어졌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스노우는 ‘지혜’를 빌리지 않고도 정답을 알 것 같았다. 저건 적을 바라보는 자의 눈이었다.

하긴, 저쪽은 내가 조금도 반갑지 않을 테지.

스노우가 알아들었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찾아온 목적이 뭐야?”

세라는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물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내심 기대하던 스노우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지혜’ 덕분에 스노우는 자신의 핏줄과 세라 사이에 얽힌 악연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

페이덴과 세라 로젠바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굳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로 지정해야 한다면 ‘원수’가 가장 적절했다. 그리고 스노우가 생각했을 때, 근 300년 만에 만난 원수의 핏줄에게 할 첫마디치고는 지나치게 실용적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부터 물어볼 줄 알았는데~.”

낙담한 스노우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적어도 자신이 세라의 입장이었다면, 제 손으로 끝장낸 왕국의 핏줄이 버젓이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부터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딴 거엔 관심 없어.”

하지만 세라는 지나간 과거 따윈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날 왜 찾아온 건지나 말하고 꺼져.”

“…….”

재차 용건을 캐묻는 말투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불친절하게 뚝뚝 끊어지는 게 그와 깊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게 티가 났다.

이래 봬도 최근 들어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 정도 인연으로 참작해 주기에는 제 이름 뒤에 딸려 오는 과거가 너무 무거운 모양이다.

아, 그것도 아닌가.

내심 서운함을 느끼던 스노우는 곧 이마저도 참작해 준 덕에 얻게 된 융숭한 대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인색하게 굴었다면, 구태여 그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권능에 가까운 흑마법으로 스노우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노우는 순조롭게 광인이 되어 버리고 말이다.

“찾아온 건 너겠지. 잊었어? 먼저 시그너스에 있던 사람은 나였잖아~.”

그걸 알면서도 스노우는 여기서 더 나은 대접을 원했다.

자고로 대화란 오해가 없어야 제대로 오가는 법이니까.

“너희한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하지만 그 시도는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세라는 일말의 신뢰도 없는 태도로 스노우를 대했다.

“답을 원하기만 하면 내가 나타날 길목에 서서 기다릴 수 있는 놈들이잖아. 너흰.”

“아, 역시 안 통하네~.”

그런 어설픈 설득으로 풀어내기에는 둘 사이의 골이 워낙에 깊었다. 페이덴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세라 로젠바움은 그들이 물려받은 ‘지혜’의 저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네 말이 맞아.”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기 힘들겠다는 결론에 이른 스노우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내 선조의 의지에 따라 널 기다리고 있었어.”

굳이 네가 아니었더라도, 난 여기 있었을 테지만.

스노우는 마지막까지도 입가에 맴도는 말을 조용히 씹어 삼켰다.

그런 사소한 변명 따윈 이 자리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결국 만났으며, 대를 이어 스노우에게까지 전해진 선조의 유언을 비로소 이행할 때가 왔다는 사실이었다.

“왜. 네 잘난 조상들이 기어코 복수라도 해야겠대?”

하, 차게 비웃어 준 세라가 한껏 비아냥거렸다.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이다.

“음, 대신 갚아 주었으면 하는 게 있기는 하셨지.”

“……나는 뭐, 순순히 받아 주고?”

“…….”

스노우는 자신을 노려보는 세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흐린 하늘 아래 서 있는 그녀는 유독 불길해 보였다. 이제는 저주의 상징이 되어 버린 자수정의 눈동자에는 사이한 빛이 어린 채였다. 그가 허투루 움직이면 언제든지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사냥을 준비하는 맹수 같았다.

“……순순히 받아 줬으면 좋겠는데, 왜냐하면 내가 갚아 주려는 건 꽤 좋은 거거든.”

“헛소리하지 마. 너희가 나한테 줬던 것 중에 좋은 건 아무것도-.”

빈틈없이 사나운 얼굴 위로 앳된 소녀의 얼굴이 겹쳐진다.

지금보다 더 날카롭고, 야위고, 불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어린아이.

하지만 제게 내밀어지는 작은 호의에도 어쩔 줄 몰라 하던 들고양이.

스노우는 세상 모든 것에 발톱을 세우던 작은 짐승이 무슨 말에 속아서, 스스로 목줄을 차고,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알았다. ‘지혜’가 하나도 빠짐없이 속삭여 주었으니까.

그 기억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이 있었다.

딱 한 번 들여다보았을 뿐이지만, 그 한 번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힘주어 눌러쓴 글씨처럼 스노우의 뇌리에 깊이 자국을 남겼다.

어두운 지하실, 갇혀 있는 소녀,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의 실험을 버텨 낸 아이가 어떻게 대륙을 공포에 몰아넣는 흑마법사 세라 로젠바움이 되었는지.

아주 오래전, 요정왕이 제 딸을 구해 준 인간에게 선뜻 ‘지혜’를 넘겨준 건 그의 영혼이 지닌 순수함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선한 마음은 자식에게로, 그리고 그 자식에게로 이어져 왕국을 이루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요정의 방대한 지식은 한낱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현명한 선조들은 그럭저럭 잘 해냈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미리 답을 외워 둔 시험지를 풀어내는 학생처럼 성실하게 ‘지혜’의 가르침을 따랐다.

‘지혜’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아들에게서 딸에게로, 그리고 다시 아버지에게로 이어졌다. 특별하게 태어난 이들은 혼자, 혹은 둘이서 머리를 맞대어 왕국을 다스렸다.

착오라고 한다면 그것을 가능케 한 선한 마음이 무한히 이어지는 유전 같은 게 아니라는 것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혜’의 무게는 더해졌으나 그것을 이어받는 이들의 현명함은 그와 반비례하여 흐려졌다.

그러니 페이덴의 이름 아래 범인의 범주에도 끼지 못하는 아둔한 자가 태어난 것 또한 숙명이라 할 수 있겠다.

‘지혜’를 이어받고도 가장 어리석은 왕을 자처한 남자는 진리를 거스르는 모든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기어코 소녀를 찾아낸 그는 대의라는 이름 아래 아이의 인생을 비틀었다. 그리고 한없이 무지하게 굴었다. 제 손으로 길러 낸 괴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껏 착취했다.

‘세라 로젠바움이 나라를 팔았다!’

방심의 대가는 언제나 그렇듯 처참한 죽음이다.

페이덴 왕국이 소서 제국에 편입된 이후, 가장 먼저 시가지에 매달린 남자는 산 채로 불타 죽어 가며 그녀의 배신에 몸서리쳤다.

그리고 스노우에게 ‘지혜’를 전승한 인물은 그것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다.

제 가족이 불타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그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나는-.”

그러니 스노우가 세라를 찾은 이유는 복수가 될 수 없었다.

“아니, 우리는.”

주어를 바꾼 후손의 눈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지혜’가 기지개를 켰다. 긴 세월 이어 내려온 누군가의 죄책감이 짙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감정에 몸을 내어준 스노우는 기꺼이 제 선조가 염원하던 속죄를 할 수 있도록 제 몸을 내어주었다.

“너에게 사죄를 하러 왔어. 세라 로젠바움.”

그리하여 마침내 내뱉는다.

어쩌면 세라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마지막 남은 페이덴의 의지를.

“미안했어.”

흐릿하던 하늘이 기어코 크게 울었다.

쿠르릉. 천둥을 움키는 소리를 낸 먹구름에서 툭,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심상치 않은 빗줄기가 뺨을 긋고 내려갔으나, 스노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죄를 이어 나갔다.

“내 선조들이, 너에게 저지른 그 모든 행동들.”

감히 페이덴의 이름이 닿았던 모든 행위를 사죄하는 스노우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중했다. 세상의 진리가 모여 있다는 푸른 눈동자에 일순 낯익은 그림자가 서성거렸다.

감출 생각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감정은 스노우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움트고 있던 연민. 무력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

악귀들만 들끓던 왕궁에서, 그녀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던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너-.”

꿈틀,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챈 세라의 눈가가 크게 경련했다.

“왕세자의 자손이구나.”

그녀가 손수 엿을 먹인 페이덴의 국왕.

그의 장자이자 왕국의 왕세자. 아비와는 달리 총명하고 심성이 나약했던 제 또래의 남자가 뇌리를 스쳤다.

“…….”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한 스노우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그려진다.

세라를 똑바로 마주 보던 시선이 방향을 바꿔 아래로 미끄러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슴팍, 정확하게는 마력 회로가 새겨져 있을 영혼의 한가운데.

스노우의 ‘지혜’가 거세게 요동치며 저것이 새겨지던 때의 일을 상세히 속삭여 주었다.

예전에는 남의 이야기를 듣듯 무심하게 흘려 넘긴 것들이었으나, 세라를 실제로 알게 된 이후로는 가벼이 흘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전해졌다.

“너를 흑마법사로 만들고.”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살인자로 만들었으며.”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지.

“네 유일한 가족을 인질 삼아 널 착취한 것도.”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어째서 도망치지 못했는지.

“끝끝내 지켜 주지 못한 것마저 전부.”

그러다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영원히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담담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죄를 입에 담은 남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그 자세를 유지했다.

세라는 스노우가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하지만 알면서도 섣불리 말문을 뗄 수가 없었다.

긴 시간을 돌아 전해진 왕세자의 사죄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 시시해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300년이나 자신을 기다렸다기에 지극히 대단한 복수극이라도 기획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오래전 제게 범했던 죄를 고해성사한 뒤 사과하는 거였다.

왜 나에게 사과를 하지?

결국 페이덴은 망했고, 승리자는 그녀였다.

만약에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 그건 페이덴이 아니라 세라의 몫이어야 했다.

이기고도 패배자의 역할을 떠맡게 된 입장에 세라의 심기가 사납게 뒤틀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스노우가 입을 뗀 첫마디부터 마지막 한마디까지.

그 어떤 문장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야.”

설령 사과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그딴 허울뿐인 사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사죄를 하고, 그 사실을 위안 삼아 편히 눈을 감을 이는 오래전에 죽고 없다.

사죄를 듣고, 그를 용서해야 할 사람도 죽어, 이제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너 따위가 미안하다는 말 좀 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애가 살아 돌아와……?”

진정으로 저 사죄를 받아야 할 주인공은 가장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가족이 모르는 곳에서, 세라가 없는 곳에서, 무섭고 쓸쓸하게.

때를 놓쳐도 한참이나 놓친 미안해라는 말은 이토록이나 공허했다.

세라는 동생을 떠올릴 때마다 차라리 미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심장이 타들어 갔다.

슬프고, 비참하고, 절망스러워서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를 살게 한 건 아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분노가 전부였다. 세라는 제게서 동생을 앗아 간 세상 모든 것들을 저주하기 위해 살았다.

그 처절한 세월을 고작 한마디로 어루만져 주겠다니 얼마나 우스운가.

한심하리만치 동화 같은 발상이라 비웃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너희는 여전히 멍청하구나.”

그 감상을 숨기지 않은 세라가 스노우를,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페이덴을 경멸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방법은 모르지만.”

자신을 찌르는 가시에 묵묵히 찔린 스노우가 끊어졌던 말을 이었다.

세라는 페이덴의 사죄가 말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틀렸다.

“네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직, 그들이 준비한 속죄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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