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91화 (91/131)

#91

“……!”

세라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두 눈을 크게 홉뜬 그녀가 진의를 가늠하듯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네가 페이덴 때문에 잃은 가족.”

감히 그녀의 동생을 입에 담은 스노우에게서는 흔들림이 없었다.

피하지 않고 직시해 오는 태도는 기만의 기색 따위 없이 투명한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걸 되찾아 주기 위해 널 기다렸어.”

페이덴 국왕의 장자.

망국의 왕세자.

마지막 남은 ‘지혜’의 전승자.

착취당하는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진 유약한 청년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대륙을 떠돌았다.

“…….”

푸른, 눈이 내린다.

스노우에 의해 불어닥친 눈보라는 금세 골목을 채우고, 세라를 감쌌다.

‘지혜’가 범람한다. 진리를 들여다본 스노우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왕세자의 자식들이 300년에 걸쳐 찾고, 또 찾고, 그리하여 도달한 진실을 전해 주기 위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간이 멈춘 듯 바짝 얼어붙어 있던 세라의 동공이 바짝 수축했다.

“세라. 네 동생을-.”

“말하지 마.”

첫마디가 들려오자마자 세라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사명을 다하는 자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하지 마! 말하지 마! 닥-.”

순조롭게 끝을 향해 달려가는 스노우의 음성 위로 다급한 고함이 덧씌워진다.

닥쳐!

필사적으로 그를 멈추려던 세라에게서 급기야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그러자 원하던 대로 스노우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으나, 세라는 그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닥쳐! 닥쳐! 닥쳐!

듣기 싫다는 듯이 두 귀를 틀어막은 그녀가 연신 ‘목소리’를 뿜어냈다.

조절하지 않고 그저 방출할 뿐인 마법은 한 번에 어마어마한 마력을 앗아 갔다. 두 번, 세 번, 같은 주문이 쏟아져 나올수록 위력은 떨어졌다.

둑이 터진 댐처럼 막힘없이 흐르던 마력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닥…….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세라가 기어코 한 번 더 흑마법을 사용했을 때.

“커흑!”

세라가 ‘목소리’ 대신 붉은 선혈을 토해 냈다.

“콜록! 콜록! 케헥!”

갑자기 기도를 막은 핏물이 여러 번에 걸쳐 쏟아져 나왔다.

무너진 세라가 바닥에 엎어진 채 연신 피를 토했다.

몸이 들썩일 정도로 기침할 때마다 심장께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영혼을 파고드는 작열감과 함께 소스라칠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세라가 겨우 아픈 몸을 추슬렀을 때에는, 예전처럼 회로가 망가진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 이게, 왜…….”

상처 부근을 더듬거린 세라가 혼란스럽게 눈을 굴렸다.

갑자기 왜 또 망가진 거지?

다 나은 게 아니었던가?

“흑마법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래.”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스노우에게서 들려왔다.

‘지혜’의 힘으로 세라의 상태를 꿰뚫어 본 그는 세라 본인보다 더 그녀의 상태를 잘 아는 사람처럼 고통의 원인을 알려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세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그 상처는 완전히 나을 수 없어. 세라.”

“…….”

“성검은, 그런 거야.”

“치워.”

세라는 그 손길을 매섭게 쳐 냈다.

“너희가 하는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 없어.”

스스로 일어선 그녀가 입가에 맺힌 핏물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들어 보지도 않고서, 스노우가 전해 줄 이야기를 벌써부터 헛소리라 치부하고 있었다. 그녀가 왜 이다지도 불신하는지 아는 스노우는 그저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세라 로젠바움은 제 동생 이야기 앞에서는 여전히 털을 잔뜩 세운 들고양이처럼 굴었다.

퉷,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낸 세라가 사납게 일갈했다.

“볼일 끝났으면 이제 그만 꺼져.”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맺은 세라가 스노우를 지나쳐 골목을 나섰다. 쫓기는 사람처럼 급한 걸음걸이였다. 스노우가 불러온 푸른 눈송이에 빗줄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더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그럴듯한 핑계를 앞세운 그녀가 불편한 발목을 재촉해 골목을 거의 빠져나갔을 즈음이었다.

“에델은-.”

그런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스노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리운 이름이었다.

에델 로젠바움.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세라는 숨통이 막히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스노우는 세라가 잠시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눈이 녹기 전에 남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어.”

“…….”

결국 끝까지 들어 버린 세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에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가.

“……거짓말.”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을 속삭이곤 그대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던 스노우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범람하던 ‘지혜’가 사그라들자 휘몰아치던 푸른 눈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찔끔대던 빗줄기가 솨아아-. 장대처럼 시원하게도 쏟아졌다.

마지막 가을비는 곧 찾아올 겨울을 닮아 얼음장처럼 시렸다.

***

세라와 헤어진 후, 길드 회관으로 돌아온 스노우는 완전히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버렸다. 방에 들어가기 전 젖은 머리를 손으로 탈탈 털어 내는데, 문득 그것만으로도 눈앞이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아, 졸려.

혼잣말을 중얼댄 스노우가 유난히 피로한 눈을 꾹꾹 내리눌렀다.

“……한동안은 못 보겠네.”

인간의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진리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느라, ‘지혜’가 깃든 곳이 뜨겁게 과열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구만~.”

얼마간의 피로를 푼 스노우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받은 사명을 드디어 이뤘음에도 가슴 벅찬 감동이나 뿌듯한 보람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해야 할 일을 하고 났는데도 영 뒷맛이 찝찝했다.

아마도 그의 선물을 받은 사람의 반응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낯빛이 바뀌던 세라의 얼굴이 자꾸만 뇌리 한 귀퉁이에 남아 그를 괴롭혔다. 그건 예전에 처음 ‘지혜’ 속에 저장되어 있던 세라 로젠바움의 생애를 보았을 때보다 더 강렬한 감각이었다.

아직도 그 ‘세라 로젠바움’과 시그너스 길드의 ‘세라’가 동일인이라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실제로 만난 세라는 그가 ‘지혜’를 통해 엿보던 과거의 모습보다 훨씬 유하고 귀여웠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서도 곧장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았다. 딱히 원대한 음모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재밌으니까.

특히 ‘자기야’ 하고 불러 줄 때에는 너무 즐거워서 살맛이 났었는데.

하지만 이젠 날 싫어하지.

부정할 수 없는 결말에 닿은 그가 우울하게 투덜거렸다.

“이렇게 빨리 밝힐 생각 없었는데.”

로우드에서 돌아오는 마차에서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스노우는 첫눈이 오기 전까지만 그녀를 지켜보자며 스스로와 약속했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세라 로젠바움이 버젓이 부활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지혜’에게도 답을 구해 보았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진리는 모조리 꿰뚫고 있는 요정의 지식마저도 그녀가 되살아난 이유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세라의 거짓말을 도와 그 의심을 완전히 지워 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혜’의 힘으로 세라 로젠바움을 한눈에 알아본 자신과는 달리, 정작 에녹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으니까.

스노우가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용히 곁에서 지켜본 결과, 세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에녹이 관련되어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알 것 같았는데.

이젠 지켜보기는커녕 웃으며 인사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이게 다 그 영감 때문이야.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스노우가 제 계획을 틀어 놓은 장본인을 떠올렸다.

그에게 ‘지혜’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라면 발바닥이라도 핥을 기세였던 욕심 많은 남자.

‘정말 아까워.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군.’

데니다스 폰 베델기아.

‘도대체 왜 우리를 거부하는 거지? 그 힘만 있다면, 에녹 소서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텐데!’

어젯밤, 스노우는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기에 그를 찾아갔다.

안 그래도 속이 쓰린 표정을 짓고 있던 데니다스는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된 데릴사위를 향해 너는 야망 같은 것도 없느냐며 역정을 냈다.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선명한 탐욕.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 스노우가 퍽 재미있는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교만하게 굴었다가 망한 나라를 하나, 알고 있거든.’

‘…….’

스노우만이 할 수 있는 뼈 있는 농담에 데니다스는 침통하게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그가 말한 ‘망한 나라’가 오래전 멸망한 스노우의 고국임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약혼 파기를 끝으로, 더 이상 알타이르와 페이덴 사이에 이행해야 할 약속은 없어.’

데니다스를 앞에 두고도 스노우는 당당하게 하대를 했다.

더 이상 알타이르 소속이 아니니, 그를 향해 말을 높여야 할 이유 따윈 없었다.

‘……하아-. 선왕의 안배를 이런 식으로 날려 먹다니.’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그러니 이제는 너희가 약속을 지킬 때다.

마침내 원하는 순간에 도달한 스노우가 후련하게 요구했다.

‘알타이르에 남아 있는 페이덴의 기록을 모조리 지워.’

데니다스의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지혜’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텐데?’

그는 ‘지혜’의 유실을 염려하고 있었다.

평범한 촌부를 왕국의 왕으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잊혀져 왕의 재목이 다시 평범한 촌부가 되어 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거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노우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최악의 재앙이라 불리는 ‘세라 로젠바움’의 탄생을 그녀의 사악함 때문이라 손가락질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애초에 페이덴 왕국에 ‘지혜’가 전승되지 않았다면 세라 로젠바움이 흑마법사로 각성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힘은 언젠가 반드시 멸망을 부르게 되어 있었다.

‘지혜’가 또다시 멸망의 밑거름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가 많이 오네~.”

상념에서 깨어난 스노우가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신화와 동화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헛된 희망이나 야망을 심어 유지되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이 났다.

“스노우 오라버니…….”

그가 멍하니 빗물이 흐르는 창가를 서성이고 있을 때, 옆방 문이 열리며 아퀼라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인기척을 듣고 스노우인 줄 알고 있었지만, 나올 타이밍을 재지 못해 이제야 문을 연 것 같았다.

“오-. 아퀼라. 방에 있었구나~.”

다시 빙글대는 낯을 되찾은 스노우는 아퀼라가 민망하지 않도록 반가이 맞아 주었다.

쭈뼛대며 밖으로 나온 아퀼라가 연신 걱정스러운 눈으로 비에 젖은 얼굴을 힐끗거렸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어려서부터 스노우를 잘 따랐던 아이는 그의 작은 변화도 기민하게 알아채곤 했다. 이렇게 들키는 것도 몇 년 만이네. 피식, 웃어 보인 스노우가 짐짓 엄살을 부리는 사람처럼 너스레를 떨어댔다.

“아아~. 제법 깊이 들여다봤거든.”

“그럼, 이번에는 얼마나 깎였나요?”

뭐가?

스노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퀼라가 왜 못 알아듣는 척을 하냐며 덩달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버니의 수명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