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
아, 스노우의 입에서 소리 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퀼라가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는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이는 걱정과 긴장의 더미에 파묻혀 숨통이 조여드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해처럼 깊은 ‘지혜’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타나는 눈보라.
아름답게 흩날리는 푸른 눈송이는, 바로 ‘지혜’에 머리를 담근 인간의 수명이라는 사실을.
“……아퀼라.”
스노우가 한숨과도 같은 웃음과 함께 아이의 이름을 토해 냈다.
그토록 밀어냈는데도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소녀가 걱정되어서였다.
“네 짝은 내가 아니야.”
“그것도 ‘지혜’가 가르쳐 준 건가요?”
아퀼라가 제법 도전적으로 되물었다.
나름의 반격일 테지만 스노우의 말문을 막히게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그런 건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여유롭게 흘려 넘긴 스노우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구는 아퀼라의 머리를 장난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쉬어. 밖에 비 오더라.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안 나가는 게 상책이야~.”
“……주무시나요?”
“응.”
“얼마나?”
“흠, 글쎄.”
손을 거둔 스노우가 제 상태를 가늠하듯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는 유독 ‘지혜’를 깊이 들여다볼 때마다 긴 잠에 들곤 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주간 깨지도 않고 쭉.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잠들까 예상하자니 벌써부터 눈이 감겼다.
극심하게 밀려오는 수마는 겨우 하루 이틀 잠드는 걸로는 어림도 없다고 속삭였다.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무거운 피로감에 스노우가 대충 기간을 때려 맞췄다.
“적어도 겨울 안에는 깨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히익, 생각보다 긴 기간에 아퀼라가 기겁을 했다. 희게 질린 얼굴 위로 걱정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스쳤다. 이렇게 오래 잠들 정도로 들여다봤으니, 이번에야말로 수명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제가!”
비장하게 표정을 굳힌 아퀼라가 냅다 첫마디를 내질렀다.
“지켜드릴게요……!”
그러고는 스노우가 잠들어 있는 겨울 동안 자신이 안전하게 지켜 주겠다 맹세했다. 방금 전에도 스노우가 습관처럼 자신을 밀어냈다는 사실은 기억도 못 하는 얼굴이었다.
못 말리겠네.
하지만 이 정도는 사랑보다는 효심에 가까운 행동이니 넘겨 줄까.
봐줬다는 얼굴로 씨익, 웃어 보인 스노우가 거창한 목표를 하향 조정해 주었다.
“때마다 내 고양이 밥이나 잘 챙겨 줘~.”
부탁할게.
유쾌하게 손을 흔든 그가 여남은 말 없이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아~. 피곤하다~.”
탁, 등 뒤로 문을 닫은 스노우는 곧장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비에 젖은 몸이 찝찝했지만, 제멋대로 감기는 두 눈은 한가로이 목욕이나 할 여유 따위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풀썩, 커다란 인영이 그대로 침대에 엎어지자 구석에 있던 검은 털 뭉치가 냉큼 그 위로 올라앉았다.
미야옹~.
귀를 간지럽히는 울음소리에 스노우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감긴 눈을 뜨지는 못하지만, 아직은 가벼운 입술을 움직여 사랑해 마지않는 제 고양이를 불렀다.
“못난아~.”
햐아악!
그러기가 무섭게 머리맡에서 앙칼진 하악질 소리가 들려왔다.
베개에 고개를 묻은 스노우가 짓궂게 킬킬거렸다. 웃음을 그친 그는 손만 움직여 제 곁을 지키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세라가 잘해 줘야 할 텐데. 걱정이다. 그치~?”
어차피 그는 잠이 들 테고, 생각보다 이르게 사명도 끝마쳤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세라가 자신의 가족을 만나기를 바랐다.
짐승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대던 그의 손이 곧 힘없이 떨구어졌다.
머리 위에서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 졸음이 그새 입술까지 내려와 혀를 무겁게 했다. 심연과도 같은 잠에 발을 담근 스노우가 가물거리는 의식에 취해 제멋대로 읊조렸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인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느리게 이어지던 말이 결국 끝에 다다랐다.
완전히 늘어진 스노우가 새액, 새액 고른 숨을 내쉬었다.
미야오옹-.
깊은 잠에 빠진 주인의 머리맡에서, 고양이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어 물기를 떨쳐 냈다. 앞발을 들어 고양이 세수를 한 ‘못난이’의 새초롬한 얼굴이 옆으로 기울었다.
수염을 파르르 떤 ‘못난이’가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렸다.
“세라……?”
***
세라는 비가 쏟아지고 있는 거리를 우산도 없이 걸었다.
불길한 긴장감을 조성하던 알타이르도 물러났고, 이른 아침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아직 휴일이 아님에도 번화가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로 인해 세라의 몸은 금세 흠뻑 젖어 버렸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젖어 그녀의 얼굴과 등에 아무렇게나 들러붙었고, 물을 먹은 겨울옷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발목까지 들러붙은 치맛자락이 안 그래도 절뚝이는 걸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직 완전히 겨울이 되지 않아 눈이 아닌 비가 내리지만, 기온이 최근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누구든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지만, 희게 질린 세라는 이미 체온이 떨어져 차가운 줄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 눈에만 보이는 유령을 쫓는 사람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눈이 녹기 전에 남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어.’
빗물이 고여 먹먹한 귓가에 자꾸만 스노우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지난 생에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동생을 드디어 만날 수 있다고 해 주던 그 말.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어 죽어 버린 희망에 뒤늦게 비를 퍼부어대는 말이었다.
마치 겨울이 다 되어 이제 와 폭우를 쏟아 내는 하늘처럼.
‘만날 수 있어.’
늦어도 너무 늦은 희망이다.
다 타서 재만 남은 토양에 이제 와 비를 뿌려 봤자 제대로 된 싹이 틀 리 만무했다.
자꾸만 맴도는 목소리를 거짓말. 거짓말. 하며 부정한 세라가 자신을 쫓아오는 희망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발길을 재촉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몸과는 달리 세라의 정신은 더 없이 뒤로, 먼 과거의 시간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 일만 잘 끝내면 동생을 만나게 해 주마.’
페이덴의 국왕은 세라에게 무슨 일을 시킬 때마다 그런 약조를 하였다.
그럴 때면 세라는 거짓인 줄 알면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행여나 자신이 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어 가여운 제 동생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리고 후회했다.
왕이 에델을 돌봐 주겠다고 했을 때, 알겠다고 하지 말걸.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것만 입혀서, 귀하게 키우겠다는 말에 혹하지 말걸.
그것이 앞도 보이지 않는 애를 인질로 붙잡겠다는 말인 줄 알았더라면, 평생 제 등에 업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허무하게 국왕의 손에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세라의 유일한 약점을 손에 넣은 국왕은 동생을 보여 달라는 그녀의 말에도 매번 다음, 그다음 그리고 또 다음을 기약하며 차일피일 미루다, 세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에서야 숨통을 터 주듯 에델을 보여 줬다.
‘누나. 이번에는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녀를 기다리는 아이는 언제나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넓고 화려한 저택에 홀로 적응하지 못하고 먼지처럼 둥둥 떠다녔다. 더 이상 거리로 나가 음식을 구걸할 필요가 없음에도, 에델은 그때와 똑같이 춥고 불안해 보였다.
‘우, 우리 집에 언제 가?’
에델은 집에 있으면서도 세라만 보면 집에 언제 가느냐며 물었다.
어미를 찾는 새끼처럼 어깨에 머리를 비비면서.
아이에게서 묻어나는 짙은 고독을 느낄 때면, 세라는 지금이라도 전부 버리고 동생과 함께 도망칠까 하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결 좋게 정리된 동생의 머리칼이나, 깨끗하게 정리된 손톱, 왕족이나 입을 수 있는 값비싼 옷에 휘감긴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에델. 여기가 이제부터 우리 집이야.’
‘싫어. 여기는 너무 넓고 이상한 냄새가 나. 누나도 없잖아…….’
‘배부른 소리 하지 마. 그깟 판잣집이 뭐가 좋다고!’
그래서 자꾸만 돌아가자고 떼를 쓰는 동생을 호되게 야단쳤다.
가진 것 없는 고아 두 명이 이렇게까지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는 건 국왕 덕분이라고. 또 길바닥에 나앉고 싶지 않으면 돌봐 주는 사람들 말 잘 듣고 착하게 굴어야 한다고.
국왕은 비록 그녀의 인생을 비틀어 버린 개새끼였지만, 동생과 관련해서는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네 동생을 돌보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건 알지?’
그래서 믿었다.
세라에게 하는 국왕의 요구가 점점 인간의 선을 넘어가게 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동생 이야기만 꺼내면 말을 돌려 버려도.
점점 동생을 만나는 간격이 멀어져도.
몰래 에델이 머물고 있는 저택을 찾아가자, 국왕이 동생의 거처를 그녀가 모르는 곳으로 옮겨 버렸을 때도.
국왕이 제정신이 박혀 있는 자라면, 세라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잘 돌봐 주고 있을 것이라고 무작정 믿었다.
그렇게 점점 에델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세라를 살게 한 건 그래도 어디선가 동생이 좋은 곳에서 좋은 것만 먹으며 잘 살고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지긋지긋한, 희망이라는 이름이었다.
그 희망의 결말이 무엇이었는지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세라가 좀 더 재게 발을 놀렸다.
그 결말이 어땠는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끔찍한 기억이 자꾸만 세라의 뒤를 따라붙었다. 세라는 그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처럼 서서히, 서서히,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고는 이내, 곧 붙잡히는 게 무서운 사람처럼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빗길을 마구잡이로 내달렸다.
스노우건 뭐건 이제는 전부 싫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다고 할 때에는 갖은 핑계를 다 대며 못 만나게 하더니.
이제 와 속죄랍시고 다시 동생을 들먹이는 게 괘씸했다.
그녀의 눈앞에 다시 희망이라는 열매를 들고 흔드는 게 꼭 조롱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희망을 주지 마.
세라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허억, 허억, 쉬지 않고 내달린 덕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폐가 터져 버릴 것처럼 괴로웠지만, 세라는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스노우가 던져 준 미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여름밤에 꾸는 단꿈 같은 게 아니었다.
세라는 이제는 그런 고문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배신당하고…….
그런 격변을 견뎌 내기엔 그녀는 너무나 지쳤다.
버석하게 마른 사막이자 모든 것이 불탄 뒤 잿더미만 남은 폐허였다.
그 황폐한 토지에서 유일하게 싹을 틔운 희망이란 환생뿐이었다.
배신당하고, 배신을 하고, 또다시 배신을 거듭하면서 세라는 더 이상 동생과의 재회를 꿈꾸지 않았다. 잘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형량을 모조리 깎고 환생하여 전부 잊고 싶었다.
그리고 이만 편해지고 싶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그 일념 하나로 세라는 아무도 없는 빗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혹사당한 몸이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체력을 넘어 정신력으로 움직이던 몸이 불안하게 절뚝거리다가.
“아윽!”
결국, 제 발에 자기가 걸려 가열 차게 넘어졌다.
제대로 미끄러진 세라가 몇 바퀴를 굴렀다.
말로 형용 못 할 통증을 견디며 겨우 몸을 일으켜 앉는데, 머리 위로 대차게 쏟아지던 비가 멎었다.
“……?”
세라는 갑자기 조용해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뭐 해?”
“…….”
제게 우산을 씌워 주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허억, 허억, 허억, 말없이 그를 알아본 세라가 대답 대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에녹은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세라를 따라 쪼그려 앉은 그가 그녀를 한 번, 그녀가 달려온 방향을 한 번 번갈아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오는 중이었어?”
집?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세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번화가와 한참이나 떨어진 한적한 구역, 낯이 익은 거리.
그녀는 어느새 에녹의 집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
제 위치를 확인한 세라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야말로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분명 생각 없이 앞으로만 달린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녹이 눈앞에 있었다.
“다쳤네.”
그때, 에녹이 손끝으로 세라의 무릎을 건드렸다.
찌릿한 통증이 느껴져 시선을 내리니 어느새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 밑으로 장렬하게 넘어진 무르팍에 피가 비치고 있었다.
“하여튼 눈만 떼면 다치지.”
쯧, 낮게 혀를 찬 에녹이 못마땅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잘 좀 하라고 짜증을 내는 와중에도 우산이 세라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섞여 든 다정함에 세라는 울컥, 목이 메었다.
또다. 또 그때와 같은 기분이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 눈앞에 남자에게 모든 걸 일러바치고 싶은 어린 충동.
입 밖으로 꺼내 봤자 스스로 약점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는 바보 같은 짓.
“에녹-.”
그것을 알면서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충동적으로 영웅의 이름을 부른 악당이 작게 속삭였다.
“나 아파.”
그에 에녹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가.
“…….”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산을 고쳐 쥔 그가 입술을 길게 찢어 웃는다.
“아프면 치료를 해야지.”
우산 그늘 아래 미소를 감춘 주인님이 상처 입은 노예를 향해 흔쾌히 두 팔을 열어 주었다.
이리 와.
그 부름에 이끌린 세라가 기꺼이 에녹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든 에녹이 그들의 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세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에녹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세라에게는 지금, 그가 해 주는 치료가 절실했다.
빗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혔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인과 노예는 오롯이 둘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