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93화 (93/131)

#93

집 안은 평소와는 달리 훈기로 가득했다.

웬일로 불을 피우고 있었는지, 거실의 벽난로에서는 타닥타닥, 난롯불이 힘차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감촉의 공기가 비에 젖어 냉기를 내뿜는 세라를 어루만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에녹의 품속에 작게 옹송그렸다.

“차갑네.”

세라의 이마에 제 뺨을 대어 본 그가 낮게 혀를 찼다. 새파래진 얼굴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내려다본 그가 세라를 안은 채 2층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수전을 틀자 곧장 따뜻한 김을 내뿜는 온수가 콸콸 쏟아졌다. 욕조 턱에 앉아 기다리던 에녹은 물이 발목 정도 차오르자 세라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욕조는 두 사람이 들어가도 좋을 만큼 넓었다. 그녀를 따뜻한 곳에 둔 그는 물에 젖어 무거워진 옷을 한 꺼풀씩 벗겨 내 주었다. 그 손길이 논란의 여지없이 담백했다. 이건 탐한다기보다는 보살펴 주는 손길이었다.

“…….”

세라는 건전하기 그지없는 에녹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곧장 달려들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에녹은 느긋했다. 그의 여유가 세라의 조바심을 자극했다. 평소에는 하지 말라고 해도 들러붙었으면서 왜 오늘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걸까. 그가 선사해 줄 버거운 행위를 기대하던 세라가 원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까드득. 까드득. 충동을 참지 못한 그녀는 무의식중에 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자꾸만 발목을 잡아 오는 악몽 같은 기억으로 인해 의식이 자꾸만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귓가에 자신을 붙잡던 동생의 애원과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페이덴 국왕의 뱀 같은 속삭임이 번갈아 번졌다.

만날 수 있을 거야.

국왕의 목소리는 곧 스노우의 것으로 변해 세라를 괴롭혔다. 희망을 속삭이던 스노우는 다시 동생으로 변한다. 왜 나를 버렸어. 상상 속의 에델이 그녀를 저주한다. 성인이 되지 못한 동생은 여전히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채였다.

영원히 시간이 멈춰 버린 동생이 표독스럽게 그녀를 비난한다. 누나 때문에 내가 죽었어. 자신과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앞이 보이지 않던 에델과는 달리 또렷한 눈으로 세라를 노려보는 소년의 이름은 죄책감이었다.

차라리 거기서 죽어 버리지. 동생의 얼굴을 빌려 저주를 일삼던 죄책감이 돌연 온순해졌다. 세라가 아는 에델로 돌아온 소년은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빌려 입술을 달싹였다.

만날 수 있을 거야.

삐이익. 이명이 울린다.

까드득. 드득. 과거와 현재가 뒤섞일수록 세라가 더 세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희망과 절망이 번갈아 그녀를 찌른다. 더는 무엇도 하기 싫은 세라는 그 사이에 갇혀 피를 흘렸다. 이미 한번 죽은 몸에서 다시 한번 생명력이 줄줄 새어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이토록 힘차게 뛰는데도 그녀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사라지고 싶었다.

까드득. 까드득. 하나의 생각에 골몰하게 된 세라의 귓가에 제 살을 깎아 먹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제멋대로 뻗쳐 나가는 생각을 붙잡기가 점점 힘이 들었다.

제발 누군가, 뭐라도, 악몽으로 치닫는 의식을 부숴 산산이 조각내 주기를 바랐다.

투둑. 물어뜯는 힘을 이기지 못한 손톱이 기어이 찢겨져 나갔다.

축축하게 젖은 손끝에 뜨거운 기운이 확 쏟아지며 뜨끔한 고통이 의식의 한구석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 다행이다.

돌파구를 찾은 세라가 기꺼운 마음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겉으로 드러난 생살을 괴롭힐수록 통증이 커져 갔다. 한숨이 쏟아질 정도로 아팠지만 세라는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만.”

그때, 에녹이 세라의 손을 낚아챘다.

그녀가 상처를 괴롭히지 못하게 높이 들어 올린 그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쩡한 손톱은 왜 자꾸 물어뜯어?”

주의를 준 에녹이 피가 흐르는 손톱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찢어져 너덜거리던 손톱이 말끔하게 고쳐졌다.

잠시나마 세라에게 안정을 주었던 통증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라졌다.

겨우 찾아낸 탈출구를 잃은 그녀에게 시커먼 악몽이 밀려와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삐이익, 멀어졌던 이명이 다시 가까워진다. 동생과, 스노우와, 국왕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그녀를 조롱했다.

“……네가-.”

신경질적으로 에녹을 뿌리친 세라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아무것도 안 하잖아.”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바닥에 꿇어앉은 에녹은 이미 쫄딱 젖은 상태였다. 그녀를 안아 올릴 때부터 젖어든 셔츠가 잘 빠진 몸에 쩍 들러붙어 안쪽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 근육이 육감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위험한 꼴을 하고서도, 에녹이 하는 일이라곤 고작 세라의 목욕 시중을 드는 일이었다. 그것도 몹시나 건전하게.

“알았어. 알았어. 치료해 줄게.”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에녹이 마침내 벗겨 낸 겨울옷을 욕조 밖으로 걷어 냈다.

스노우가 사 입힌 값비싼 맞춤복이 철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노예를 나체로 만들어 버린 주인님은 이제 됐냐는 듯이 그녀의 턱을 틀어쥐었다. 그는 제 것에 난 흠집을 확인하는 것처럼 샅샅이 세라를 훑었다. 그러다 도무지 온기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뺨을 쓸어내리며 낮게 한숨을 쉰다.

대체 어디 가서 어떻게 구르다 온 건지, 제 노예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많은 상처를 달고 돌아왔다.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 손에 얌전히 얼굴을 맡기는 게 기꺼워 화도 내지 못했다.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쉰 에녹이 도무지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노예를 괘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느새 가슴까지 차오른 물이 찰랑일 때마다 물에 잠긴 군청색 머리칼이 해초처럼 나부꼈다.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는 여체는 아직도 그가 새겨 놓은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아직도 생생한 울혈들이 새하얀 천 위에 수놓인 꽃처럼 그녀와 잘 어울렸다.

너무 잘 어울려서, 좀 더 짙은 색채로 물든 뺨이나 혹사당해 부은 발목조차 상처가 아니라 그것의 일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선명한 외상의 흔적이 폭력적일 정도로 강렬한 정사의 흔적과 어우러져 기묘한 감상을 부추겼다. 포획당한 세이렌처럼 얌전히 물에 잠겨 있는 노예는 놀라울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약해빠진 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움츠리는 법 없이 빤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온몸이 난리네.”

처연하기까지한 그 모습에 에녹의 입에서 낮게 실소가 샜다.

얼굴은 아직도 시체처럼 창백하지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눈가에는 발긋하게 물기가 몰려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저것은 분명한 유혹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것과 마주한 에녹이 말캉한 입술을 덧그리던 엄지를 홀린 듯이 축축한 동굴 속으로 쑥 쑤셔 넣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지?”

“…….”

장난스러운 물음에도 세라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저항 없이 에녹의 손가락을 빨아 물었다. 차가운 살갗과는 달리 그녀의 입 속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욕조의 물만큼이나 뜨거웠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쫀득하게 물어대는 점막의 감촉이 다른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아, 아랫배가 지끈거리는 감각에 에녹이 낮게 탄성을 터뜨렸다.

움찔, 세라의 입에 물린 손가락을 아래로 구부려 말캉한 혀를 내리눌렀다.

뜨거운 숨을 내쉰 에녹이 지문으로 살살 오돌토돌한 표면을 긁어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혀를 끼워 바깥으로 빼내서 쓰다듬었다.

세라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것처럼.

자신을 향해 벌어진 새빨간 동굴을 내려다보는 에녹의 눈이 점점 새카맣게 번들거렸다.

제 손 아래 순종적으로 움직이는 노예를 보고 있자니 치료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는커녕 이대로 완전히 부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끓었다.

울고 저항해도 억지로 벌리고 들어가 더, 더 연약하게 비틀어 제 품에 떨어뜨리고 싶었다. 그렇게 완전히 망가뜨리면, 다시는 멋대로 그의 품을 떠날 생각 따윈 하지도 않을 테고, 그러고 나면 이번처럼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만든 상처를 달고 돌아오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이러다 일내겠군.

심상치 않은 충동을 겨우 억누른 에녹이 다급하게 입술을 내려 세라에게 키스했다. 입맞춤이 깊어질 새도 없이 일부러 엉성하게 혀를 놀린 그는 와 닿았던 것만큼이나 급하게 입술을 떼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서 풀려난 세라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진 후였다. 에녹이 정말로 순수하게 그녀를 ‘치료’해 준 것이다.

“상처는 다 나았으니까 따뜻해질 때까지 여기서 몸이나 녹이고 있어.”

제법 상식적인 당부를 남긴 그가 아무런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등을 돌렸다.

“왜-.”

상체를 일으킨 세라가 얼른 팔을 뻗어 에녹의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왜, 안 해?”

그리고 물었다.

당황한 표정의 그녀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앞섶을 눈짓하며 물었다.

“섰잖아.”

“하-.”

그에 에녹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저가 지금 무슨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는지도 모르고 물에 젖은 젖가슴을 함부로 내놓는 꼴이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무방비해도 너무 무방비한 모습에 자꾸만 사냥하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렸다.

꼬일 대로 꼬인 성격에 이제는 스스로에게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게 치료해 달래서 해 줬더니 이제는 보따리 내놓으라네.”

이를 사리문 에녹이 까부는 어린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어른처럼 아프지 않게 그녀의 손길을 털어 내다가.

“맡겨 놨어? 아프면 그냥 얌전히-.”

“못생겨서 싫어?”

“뭐?”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담인가? 싶어서 내려다봤지만 그를 바라보는 세라의 표정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못생겨져서 이제 나랑은 하기 싫어졌어?”

“……너 뭐, 머리도 다쳤어?”

불쾌한 반응을 보인 에녹이 왜 그런 개소리를 하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정말 다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라의 머리를 더듬거렸다. 그때까지도 에녹을 붙잡은 셔츠를 놓치지 않은 세라가 목적이 분명한 손짓으로 그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안 해?”

그에 물가에 놓인 머리칼이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출렁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를 가리는 머리칼이 몹시 거슬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성가신 방해꾼을 틀어쥐고 싶은 것을 참아 낸 에녹이 자꾸만 자신을 충동질하는 노예를 향해 쯧, 혀를 찼다.

“……아프다며.”

호의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내용만큼은 다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아마 저 노예는 그와 몸만 닿으면 모든 상처가 다 낫는 줄 아는 모양이지만, 치유의 힘을 사용하는 데에도 조건이 있었다.

그리고 에녹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이번만큼은 그녀를 치유하지 못하리라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내가 지금, 자제할 자신이 없어.”

그래서 조금 모양은 빠지지만 솔직하게 제 상태를 털어놓았다.

노예가 몇 주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괜히 잘못 건드려서 학을 떼고 또 달아나겠다고 하면 그때야말로 정말로 짜증 날 것 같았으니까.

“그런 걸 왜 해?”

위해 주려는 제 마음도 모르고, 노예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의 손을 끌어온 세라가 뜨끈한 손바닥에 제 입을 갖다 댔다. 헉, 뭉그러지는 입술의 감촉에 에녹이 헛숨을 내쉬었다.

갸녀린 두 팔이 넝쿨처럼 에녹의 팔을 휘감았다.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손길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끄는 대로 기울어진 에녹의 상체가 욕조를 짚으며 물에 닿았다.

“그냥 해. 참지 말고.”

새하얀 팔이 강인한 목을 감싸 안으며 그를 더 깊은 물 속으로 이끌었다.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세라가 뱃사람을 홀리는 세이렌처럼 속살거렸다.

“안아 줘요. 주인님.”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나를 완전히 부숴 버릴 것처럼.

유혹의 숨결이 닿은 남체가 딱딱하게 굳었다.

기껏 끌어올린 배려를 보기 좋게 거절당한 주인님의 턱이 단단하게 불거졌다.

“애 버릇을…….”

꾸드득. 욕조를 짚고 있던 손을 힘주어 움켜쥔 그가 분한 목소리로 짓씹었다.

“완전히 버려 놨네.”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주인님이 스스로 부서지겠다는 노예를 가소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겨우 떨쳐 낸 잔인한 충동이 실낱같이 남아 있던 이성을 뒤흔들며 해일처럼 그를 집어삼켰다.

“중간에 후회하지나 마.”

차갑게 일갈한 영웅이 기꺼이 세이렌이 기다리는 물속을 향해 뛰어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리던 수위가 거칠게 욕조를 흘러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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